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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공에게 덕질당하는 중입니다-147화 (147/159)

<147화>

* * *

철딱서니 없는 아이처럼 굴긴 했지만, 내게도 생각이 있었다.

‘첩자를 잡아야 하는데.’

여러 사건에 휘말려 잊을 뻔했지만, 공작가 내부에 첩자가 있는 건 분명했다.

해서 미끼도 뿌려 보고, 부러 틈도 좀 보여 봤는데 전혀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친 클로드와 단둘이서 방 안에 있는 건, 첩자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물론 첩자가 신중한 성격일 수도 있었지만……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승권을 가진 황족의 씨가 마르다시피 해서, 클로드가 죽으면 2황자가 자동으로 황제가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황비 입장에선 모험을 해 볼 만도 한 것이다.

황비가 괜히 웬델라이트 영식이라는 무리한 패를 활용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첩자는 수도에 없는 게 아닐까?’

유출된 도면의 원본이 북부령에 있었기에 든 의심이었다.

북부에서 어떻게 수도 저택의 일을 엿듣고 황비에게 전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북부와 수도를 잇는 통신구가 있다는 말로 해결되었다.

또 공작은 측근들 중 일부는 아예 데려오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알아볼 가치는…… 충분해.’

마침 황비는 무기한 근신을 받은 참이었다. 근신하는 몸으로 첩자와 내통하기 어려울 테니, 연락이 끊어졌을 터. 첩자 역시 이에 당황하고 있을 터였다.

‘바로 그때. 내가 등장하는 거지.’

최고의 공격은 역시 기습이었다.

그런 면에서 로이의 생일은 좋은 구실이었다.

나를 잘 모르는 북부인들에게, 철부지 어린애란 이미지를 심어 주기 딱 좋으니까.

첩자 앞에서 부러 허술한 모습을 보여, 덫에 걸려들게 하는 게 내가 세운 계획의 전부였다.

물론 이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니나라면 모를까, 람튼은 연기를 못하는 축에 속했으니까.

“도착했구나.”

나는 람튼이 가리킨 곳을 보았고…….

“?!”

반사적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거기엔 저택이 아니라 성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공작가 본 저택은 어마어마했다.

그리로 마차가 가까워졌다.

“오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북부 저택에도 집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책을 맡은 것치고는 어린 것 같아 물어보니, 전 집사의 딸이라고 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가문의 일을 도맡아 했기에 실력엔 문제가 없다고.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북부에 머물면서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으응. 참, 혹시 아빠한테 받은 연락은 없었어?”

“주인님께 말입니까? 아직 없었습니다만…… 받게 된다면 아가씨의 안부를 전해 드릴까요?”

“아니!”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철없는 가출 소녀를 연기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럼 공작이 바로 여기로 올 거 아냐.’

물론 언젠가는 공작의 귀에 내 행선지가 알려지겠지만, 가급적 그 시기를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게, 음, 사실 조용히 쉬고 싶어서 왔거든. 그러니까 아빠한테 연락 오면 귀띔만 해 줘.”

나한테 살짝, 몰래.

람튼은 말없이 집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새삼 나를 데리고 북부령까지 왔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 사실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니나는 그를 열심히 흘기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 ‘이 화상아’ 정도의 말을 속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집사는 그 모든 무언의 언어들을 못 들은 척했다.

“예, 아가씨.”

“참. 할아버지는? 어디 계셔?”

“지금은 전선에 나가 계십니다. 귀환하시려면 보름은 넘게 걸리실 겁니다.”

집사는 할아버지가 북부 끝에서 마물을 토벌 중이라 했다. 겨울은 마물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라면서.

대충 설명만 들었는데도 급박한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래도 연통은 보낼 수 있는데, 준비해 드릴까요?”

제아무리 용맹한 전사라 한들, 물과 음식 없이 싸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해서 북부에선 꾸준히 보급 물자를 공급해 주고 있었는데, 그 길을 따라 짤막한 서신이나 지원 요청 등이 오간다고 했다.

어쩐지 할아버지의 답신이 심각할 정도로 짤막하더라니. 그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도 안 보고 가는 건 좀 아쉬워서,

“그럼 부탁할게.”

나는 짧은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그나저나 할아버지까지 전선에 나가 있으면 공작가는 비어 있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첩자 역시 주인 일가가 없는 빈집에서 어깨를 펴고 방심하고 있을 테니까.

‘찾아내기 쉬울지도.’

하지만 이 생각에 오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저녁 식사 때였다.

* * *

“이사벨 롤케이드다.”

상석에 앉아 있는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공작의 누나이자, 내게는 고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본래 그녀는 할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면서 사라졌다가, 남편이 일찍 죽은 뒤 공작령으로 되돌아왔으며. 지금은 공작을 대신해 공작가를 지키고 있노라 했다.

즉 그녀가 공작의 대리인인 셈이었다.

‘어쩐지 공작도 북부에 신경을 덜 쓰는 느낌이더라니.’

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공작과 흡사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성별이 혼동될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잘생긴 편이었다.

어깨도 떡 벌어지고 소매로 나온 손도 거칠거칠하고 굳은살이 박혀 있어 그녀가 단련된 무인임을 알려 주었다.

공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서 기껏 가출해서 온 곳이 북부라고?”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 차가운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북부의 찬바람을 느껴야 진정한 북부인이라고 하셔서 늘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춥긴 춥네요. 수도 바람을 왜 순풍이라 하는지 알 것 같달까요…… 하하.”

“확실히 그런 옷차림으로 발을 들일 곳은 아니긴 하지.”

이사벨이 내 상체를 가리켰고, 집사가 부랴부랴 털 망토를 걸쳐 주었다.

포근한 온기에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좀 우울해졌다.

‘바보 연기가 너무 잘 먹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사벨의 눈치를 보아, 천진난만하고 대책 없는 아이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자마자 영감탱이에게 편지부터 쓰려 했다며? 이유가 뭐지?”

“어, 그게요, 고모님.”

“……고모님?”

이사벨이 마시고 있던 와인을 내려놓았다. 입가를 소매로 문지르는 걸 보면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작게 ‘예법 선생이’, ‘벌써부터 애를’이라고 중얼거리는 걸로 보아…… 내 예법을 지적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여기선 사적인 친분을 내세우기보단, 가주 대행님 혹은 이사벨 님 등으로 부르는 게 적합할 것 같았다. 특히나 초면인 상황이니 말이다.

“죄송해요.”

“…….”

이사벨은 조금 실망한 얼굴이긴 했지만, 더 따져 들진 않았다.

“식사나 하도록.”

차갑다.

북부령이 이렇게 추운 건 이 사람 때문이 아닐까?

이사벨은 할아버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할아버지 역시 거칠긴 했지만, 잔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감정의 낙폭이 큰 편이라, 갈무리되지 않은 감정을 잘 흘리고 다니는 편이었다.

거기서 그가 얼마나 공작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후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이사벨은 그냥 딱딱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얼음이었다. 그녀에게선 어떤 감정의 편린도 읽을 수 없었다.

참고로 람튼은 아들을 보러 간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해서 내 옆에는 니나만 앉아 있었는데…….

“…….”

‘완전히 기에 눌렸네.’

니나는 말없이 먹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교계가 전장이라지만, 진짜 검을 들고 설쳐 대는 사람은 드물었다. 교묘한 말을 던져 상대를 견제하거나 시비를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니나도 저렇게 분위기로 압살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사실 뭔가 받아치려 해도…… 이사벨은 너무 말이 없었다.

‘식사나 빨리 끝내자.’

빨리 먹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

열망을 담고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

‘이거 왜 잘 안 썰려.’

그때 이사벨이 말했다.

“너.”

“네?”

“칼질이 좀,”

이사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잔뜩 힘주어 자르던 고기 조각이 그대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철퍽!

이사벨의 옷자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진 뒤 바닥에 떨어져 버렸으니까.

“…….”

“…….”

긴 침묵이 있었다.

이사벨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스테이크 접시를 빼앗아 갔다.

“제가 할 수 있,”

“손대지 말도록.”

차가운 목소리에서 아까보다 더 딱딱한 벽이 느껴졌다.

‘미움받았다…….’

어쩐지 좀 시무룩해졌다.

* * *

식사를 마친 엘리샤가 방에 처박혀 있을 그 시각.

“어떤 것 같지?”

이사벨은 이상한 질문으로 집사를 괴롭히고 있었다.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나?”

“예?”

“같이 봤지 않나. 초면인데 날 고모라고 불러 주는 것을! 너무 귀여워서 볼 깨물어 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털외투도 입어 주고! 내가 썰어 준 스테이크도 먹어 주다니!”

“…….”

“역시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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