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공에게 덕질당하는 중입니다-150화 (150/159)

<150화>

* * *

“안 오시네요.”

“……그렇군.”

분명 할아버지가 편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소식이 없었다. 그보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엔 보급품을 추가로 더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무래도 토벌 일이 힘드신가 봐요.”

“역효과가 났나?”

우리는 동시에 다른 말을 했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이사벨이었다.

“먼저 집무실로 올라갈 테니 일 보도록.”

알아서 후식을 먹으란 뜻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랑 덩달아 공작가에 머물게 된 니나가 일하러 가는 이사벨에게 가벼운 예를 갖추었다.

니나는 아직 이사벨이 불편해 보였지만, 해야 할 것을 잊지 않을 만큼의 이성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사벨이 나간 뒤, 니나는 바로 내게 와서 물었다.

“오늘은 외출하실 건가요, 아가씨?”

“그래야지. 람튼 영식 생일이 곧이잖아.”

바로 니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쩐지 헛웃음이 났다.

“북부령에도 미첼 저택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불편했으면 다른 곳에 머물러도 되는데, 라는 뜻이었다.

“힘드신 아가씨를 두고 제가 어딜 가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나 완전 잘 먹고 잘 지냈는데.’

식사나 잠자리의 질은 공작가와 비교해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이 저택에 와서 신경 쓰는 건 첩자 정도였다.

그게 북부까지 내려온 본 목적이었으니까. 해서 요 며칠 동안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다.

‘첩자가 방심하고 있다면, 나를 잘 모르고 있을 지금이 적기일 것 같거든.’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흘리기도 하고, 별 의미 없는 서류를 품에 가지고 다니기도 해 봤는데…….

‘하나도 안 물더라고.’

만만치 않은 이일 거란 직감이 왔다. 혹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이일지도 모른다.

해서 나는 아예 자리를 비워 보기로 했다.

‘아예 첩자가 북부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외출의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니나는 마냥 들떠 있었다. 북부의 눈 냄새도 향긋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걸 보아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마차에 타는 순간.

니나의 입에 걸려 있던 빗장이 풀려 버렸다.

저택엔 낯선 사람들이 가득하다 보니 편히 말하지 못했던 듯했다.

“분명히 일부러 그러신 거라니까요.”

니나가 주로 말한 건 람튼이었다.

“다 알고서 도망가신 거죠.”

람튼이 이사벨의 성격을 알고, 혼자 공작가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란 얘기였다.

람튼은 오랫동안 공작의 친우였으니 이사벨과도 알고 지낼 만했다. 그러니 니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의외로 니나는 이사벨을 불편해하기는 해도, 이사벨 자체에 악감정은 없었다. 원래 이사벨 성격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것을 어쩌겠냔 뜻이었지만.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본 이사벨은…….

‘포커페이스 잘 되는 할아버지 같았단 말이지.’

처음엔 나도 니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이는 것이 있듯, 이사벨의 태도에서 서툼과 다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저기, 니나. 그거 말인데.”

아닐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마차가 멈췄다.

어느새 람튼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마차는 니나의 것이었지만, 마부는 여기서 따로 고용한 사람이었다.

니나는 그에게 소정의 팁을 찔러 주었고, 마부는 잠시 다른 곳을 돌고 오겠다 말하며 사라졌다.

니나는 마차를 내리자마자 저택으로 들어갔다. 람튼을 찾아 따져야겠다면서.

나는 뒤늦게 그녀를 말리러 따라갔지만,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아직 어렸고, 니나는 하녀 출신답게 걸음이 빨랐다.

다행히 니나는 멀리 가지 않았다.

저택 1층 홀.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있었고, 그 앞에 람튼 아저씨도 있었다.

옆에 있던 로이가 까치발을 들고서 람튼에게 뭐라 속삭이고 있었는데, 워낙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니나는 그들 옆에 침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람튼을 말로 조지겠다며 들어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무슨 일인데요?”

“그게…….”

니나가 말을 흐렸고,

“문제가 생겼다.”

람튼이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고…….

“……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 * *

“모두 예약은 마쳤겠죠?”

“그럼요.”

“라튼 홀과 에밀 홀은 진작 점거했답니다.”

“파티에 필요한 물품들 역시 죄다 예약해 놓았고요.”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어떤 파티도 여실 수 없을 거예요.”

여러 모임이 있는 수도 사교계와 다르게, 북부 사교계는 크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웰링스 부인을 비롯해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이 이끌어 가는 부류가 하나. 지금 모인 것처럼 마레브 부인을 중심으로 젊은 부인들이 모인 부류가 또 하나 있었다.

원래 북부 사교계의 중심은 공작 부인, 혹은 공녀가 맡아 왔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죽었고 그 대리 격인 이사벨은 원래 사교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진 중심을 그리워하며 앓아 가던 차에, 공녀가 북부에 발을 들였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 공녀가 가장 첫 번째로 참석할 자리가 로이 람튼의 생일 파티라니……!

“람튼 백작께서 강권하신 게 틀림없어요.”

“제 생각도 같아요. 공녀께선 람튼 경께 입은 은혜가 크셔서 쉬이 거절하지 못하신 것이겠죠.”

“람튼 경께서는 아들의 소원을 이뤄 주시려다가 무리를 하신 거고요.”

“어린 영식이 아버지 위세만 믿고 공녀를 좌지우지하려 하다니. 무모하기도 하지.”

북부 사교계가 어떤 곳인데.

람튼이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 한들, 사교계까지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에선 자신들이 앞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자신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람튼이 먼저 물러서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람튼 경께서도 너무하시지. 아드님께서 철없는 부탁을 한다면 거절하시는 게 도리인데 말이에요.”

“어렵게 찾은 아들인 만큼 귀하고 이쁘신 건 이해하지만…….”

“어디 그뿐이겠어요? 공작님의 친우고 하니 욕심이 나신 거겠죠. 아들과 공작이 될 분의 결혼이라니…… 누가 탐을 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드님께선 병약하시잖아요.”

제국에 공작이 되지 못한 롤케이드는 있어도, 검을 쓰지 못했던 롤케이드는 없었다.

엘리샤의 부군이 병약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소리다.

귀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욕에 휩쓸려서 규칙을 깨려 하시다니요.”

“자식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니…… 경께서도 어쩔 수 없으셨겠죠.”

람튼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부인도 있었다. 물론 그녀 역시 람튼의 본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귀부인들이 엘리샤의 첫 북부 사교 모임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엘리샤가 유력한 공작 후보로 거론되고 있어서였다.

엘리샤가 누구의 파티를 선택하는지, 누구와 교분을 맺는지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 누군가는 엘리샤의 남편이 될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엘리샤는 수도 사교계에서 먼저 활동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은 그런 부분은 눈곱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수도에서 자랐으나 결국 엘리샤 역시 북부인. 결국 정착과 결혼은 북부에서 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고…… 그런 만큼 엘리샤의 첫 북부 사교 모임을 불쾌하지 않은 것으로 바꿔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열한 수도 놈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는 거지!’

그래야 엘리샤가 오래 북부에 머물지 않겠느냔 말이다.

“공녀님께서도 람튼 경과의 사이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신 듯한데…… 그럼 저희가 잘 끊어 드려야지 않겠어요?”

“승낙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파티를 열 수 없게 되었으니. 불편한 거절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거지요.”

“어리신 분이니까요. 당연히 저희가 도와야지요.”

“이게 북부인의 의리 아니겠어요?”

귀부인들이 웃었다.

물론 모두가 같은 마음인 건 아니었다.

‘로이 람튼은 안 돼.’

‘아무리 봐도 내 아들이 더 나은데.’

‘적당한 파티에서 자연스럽게 내 아들을 접촉시키면…….’

하지만 그들은 능숙히 욕망을 감추었다.

“그럼 공녀께 가장 먼저 보낼 초대장은 무엇이 좋을까요?”

“역시 티 파티가 좋겠죠?”

“조용하고 격식 있는 자리에서 북부 사교계의 역사를 보실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수도 사교계는 따라올 수 없는 멋이 있으니, 분명 엘리샤도 만족하리라.

“좋아요, 좋아.”

마레브 부인은 능숙하게 깃펜을 움직여 초대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죄송합니다. 벌써 그날은 예약이…….”

벌써 몇 번째로 저 말을 듣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건물 밖을 나왔다. 그런 내 뒤로 침울한 얼굴의 람튼과 니나가 따라 나왔다.

“여기가 마지막이었죠?”

“……그렇지.”

람튼은 아들 생일 파티를 열기 위해 적당한 홀이나 살롱을 예약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웬걸. 찾아가는 곳마다 예약이 이미 되어 있다고 퇴짜를 맞았다.

로이의 생일은 물론 생일 앞뒤로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남은 날짜는 생일이 한참 지나, 축하의 의미가 없는 날들뿐이었다.

물론 파티를 열려고 하면 람튼 저택도 있었지만…… 건물이 꽤나 노후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장소도 협소했고.

하지만 세상엔 돈지랄이란 말이 존재했다.

부족한 것은 돈으로 발라 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람튼은 그럴 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참에 저택부터 집기까지 싹 사 버리는 건…….”

그러다 람튼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없구나.’

저택이고 파티 장식이고 뭐고 그냥 매물이 없어서 못 사는 거다.

람튼은 허탈하게 웃더니 건물 벽에 기댔다. 그가 습관처럼 시가를 꺼내다가 나를 보고는 쓱 집어넣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진작 예약해 놓을 것을.”

“아니, 누가 이런 일을 예상해요?”

니나가 어이없어했다.

“규모로 보나, 들인 자금으로 보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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