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헌팅 시즌 (전편) (3)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은 기억이라곤 별게 없었다.
살기 위해 스태프를 손에 쥔 순간부터, 정처 없이… 그저 스태프의 의지에 따라 수십 년을 보냈고.
사람의 업을 보게 된 시점부터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나이를 세는 것도 잊어버릴 무렵.
한 여자를 만났다.
“그란! 여기예요!”
가문명조차도 제게는 구속이라며 훨훨 자유로이 날던…….
나비 같은 여자였다.
“이것 봐요. 은방울꽃. 귀엽죠?”
짧고 곱슬거리는 밀색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구불거리는 앞머리 아래에 자리 잡은 연분홍색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아리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사뿐사뿐 자신에게 다가왔다.
수줍게 미소를 짓던 그녀는 손을 뻗어 제 볼을 감쌌고…….
그란데일은 그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주려던 찰나.
“짠!”
머리에 은방울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아하하! 잘 어울려요!”
“…죽고 싶나. 아리엘.”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폴짝폴짝 도망갔다.
여인이라기보다는 장난기 많은 사내아이 같은 자였다.
그란데일이 치미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
“…….”
저와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서로를 똑 닮은 부녀가 꽝꽝 얼어붙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영원 같던 몇 초가 흐르고.
그란데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넌 뭐냐.”
“…부르셔서 왔는데요.”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그란데일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내뱉었다.
“근처에 올 때까지 반응도 하지 못했다니. 감이 많이 무뎌졌군.”
남자는 안경을 벗어 협탁 위에 대강 던져 버리곤 소녀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
사나엘은 새하얀 손가락을 보며 갈등했다.
‘뭔가 훈련받는 강아지가 된 느낌인데.’
그럼에도 소녀는 순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란데일의 손이 사나엘의 손목을 감싸듯 마나티어를 쥐었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그란데일의 몸에서 피어오른 검은 마나가 사나엘의 손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금세 마나티어의 모든 보석이 푸르게 빛이 차올랐다.
“…고작.”
그란데일이 손을 떼며 한숨 쉬듯 말했다.
“마나 충전을 위해 내 휴식을 방해하다니. 거슬리는군.”
…아니?! 그러니까 님이 저 부르셨잖아요!
사나엘이 억울함에 이를 부득부득 갈다, 저 남자에겐 상식이 통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그으럼 마저 쉬세요, 전하. 저는 이만 실례…….”
“어딜 가지. 아직 할 말 남았다.”
냉랭한 명령조에 사나엘이 걸음을 멈췄다.
“하를링에서 별짓을 다 하고 다녔다더군.”
“윽. 드, 들으셨나요.”
“자객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란데일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암살자의 접근을 허락하다니. 랜돌프가 대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힐난하는 듯한 어조에 사나엘이 깜짝 놀라며 받아쳤다.
“그, 그건! 제가 억지를 부려서 밖으로 나간 거라……!”
그래서 호위가 덜 붙었다고, 자신의 잘못일 뿐이라고.
사나엘은 랜돌프와 케이디아를 변호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냈다면 적어도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을.”
“예?”
대뜸 폭탄 발언이 떨어졌다.
사나엘은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것을 억지로 붙들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농…담이겠지? 그 왜, 나 놀려 먹는 거 은근히 즐기잖아, 이 사람.’
그때 귀환 연회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대체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았지만…….
사나엘은 이 어색한 침묵을 깨부수기 위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하, 거, 걱정 마세요! 자객이야, 달리아 궁에서 지낼 땐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질리도록 많이 만났는데요, 뭘!”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농담조로 말한 사나엘이었지만.
“그때에 비하면 백작저에서는 아주, 아아주 쾌적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하하하…….”
“…….”
“하하… 엥?”
그란데일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 * *
아스터 궁의 중심부.
국왕의 거처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흑단과도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진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화려하면서 기품 있는 소녀가 바로 군주의 친딸 중 하나.
사나엘 드 스카디였다.
소녀를 훔쳐보던 하인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저 꼴찌 후보분. 요즘 왕래가 잦으시죠.”
“국왕 전하께선 어지간해서 대전까지 사람을 들이지 않는데…….”
그중 한 하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서, 설마! 드디어 공주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조짐인 게……?!”
“거기. 시끄럽군요.”
그때, 복도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엄한 아스터 궁의 하인 된 자가 한낱 사담이라니. 궁내 규율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은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무표정하게 시종들을 꾸짖었다.
“죄… 죄송합니다.”
시종들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남자는 신하들을 이끌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남자의 모습이 작아지자 하인들이 입술을 벌렸다.
“…저희 같은 아랫것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이라니.”
“역시, 귀족의 귀감이라 불리는 다렌 공작님다우세요.”
뒤편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칼리온은 신경도 쓰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중정 너머를 바라보았다.
국왕의 자녀, 퍼블리코 소녀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칼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사나엘은 쾅쾅 바닥을 내려찍듯 걸으며 분을 삭였다.
‘한참 아무 말도 않다가, 갑자기 또 나가라니. 뭘 어쩌라는 거야, 이 아저씨야!’
도무지 저 남자의 심리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나엘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마구 내지르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러다 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에 사나엘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더라.”
본래대로라면 중앙 본성을 나와서 칸나와 합류하고 백작저로 돌아가야 했는데.
늘 그란데일과 보던 집무실이 아닌 곳에서 출발하다 보니 길을 잃고 말았다.
“하인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겠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주변엔 개미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낮의 강렬한 햇빛을 받고 있는 작은 화원과, 어마어마하게 높다란 회랑.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야 하나.”
사나엘이 볼을 긁적이다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이 근처에서 유일하게 나 있는 입구였다.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였고, 사나엘은 다리가 아팠다.
“안에는 사람이 있겠지.”
사나엘은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입구로 향해 걸어갔다.
입구로 들어가자 20미터쯤 되는 복도가 나타났고.
조금 어두컴컴한 복도를 끝까지 따라갔을 때, 사나엘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와… 예쁘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그 끝을 알 수 있을 만큼 까마득한 높이의 거대한 유리창.
섬세하게 색유리들이 이어 붙여진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 아홉 개가 일렬로 나란히 길게 늘어져 있는 광활한 공간이었다.
초대 국왕, 루나툼 드 스카디.
하얀 머리카락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신비로운 외양을 가진 미녀의 형상부터.
그리고 지금의 국왕. 그란데일 드 스카디.
흑발에 푸른 정복을 입은 딱딱한 인상의 장신의 남성까지.
국왕 아홉 명의 모습이 색유리 위에 새겨져 있었다.
유리창을 뚫고 내려온 빛이 일제히 홀 중앙에 쏟아져 마치 보석처럼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광경 한 가운데에…….
한 소년이 있었다.
“…….”
눈부실 만큼 반짝거리는 은색 머리카락 아래에 위치한 투명한 푸른 눈이, 사나엘을 담자마자.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사나, 엘?”
곧 소년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사라지고.
눈꼬리를 살짝 접어 올렸다.
“사나엘.”
다시 한번 더, 가슴에 새기듯 천천히 부르는 이름에.
사나엘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눈을 몇 번 비벼 봤으나,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은발 소년은 예나 지금이나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어쩐지 등 뒤에 분홍빛 꽃이 넘실거리는 것 같은 게…….
‘바, 반가워하는 건가?’
꼬리라도 달려 있었으면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어 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유안이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문장을 만들었다.
“다시 만났네요. 사나엘.”
가까이서 보아야만 겨우 알 수 있는, 아주 미미한 미소였다.
그 얼굴에, 사나엘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꽉 눌렀다.
심장이 뭔가… 옥죄어 오는 기분이 들었다.
* * *
“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또 뭐냐.”
쿠루드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소파 위로 털썩 앉았다.
“아니, 간만에 따님이랑 만나서 기분 전환 좀 했나 싶어 왔더니만. 완전 살얼음판이길래.”
그란데일은 쿠루드의 말을 무시하고 마저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쿠루드는 다리를 꼬고서 턱을 괴었다.
“마나 블로커. 아직 단서는 털끝 하나 못 찾았죠?”
“심증은 있다.”
“그거야 저도 있습니다. 문제는 물증이죠.”
쿠루드가 드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리를 까딱였다.
“당신이 대륙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벌레들이 구석구석 왕국 곳곳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복구까지 꽤 장기전이 될 것 같은데요?”
“다 알고 있는 걸 일일이 상기시키지 마라.”
그란데일이 짜증스레 답했으나 쿠루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품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내 들었다.
“적어도, 헌팅 시즌에 이게 나돌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겠어요.”
스크롤에는 마나 블로커를 나타내는 식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왕성에 도는 순간. 정말로 사망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
“아, 그러고 보니 이거에 영향을 받지 않는 후보가 딱 하나 있었죠.”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일한 퍼블리코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