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헌팅 시즌 (후편) (3)
“크읏!”
사나엘이 재빨리 검집째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앙!
검으로 뱀의 이빨은 무사히 막았지만, 워낙 덩치가 컸던지라 사나엘이 바닥에 깔려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사나엘은 일부러 한 손에 힘을 풀어 검을 왼편으로 확 휘둘렀다.
그러자 정면으로 돌진해 오던 뱀의 얼굴이 옆으로 비껴갔다.
사나엘은 다시 일어서서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뱀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스르륵!
“으읏!”
뱀이 사나엘의 몸을 꽁꽁 싸맸다. 사나엘이 발버둥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꼬맹이치고는 힘썼지만 거기까지야.]
뱀은 사나엘의 머리를 삼키려는 듯 주둥이를 쩌억 벌리며 다가왔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아.]
“자, 잠깐! 죽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다급한 소녀의 말에 뱀이 주둥이를 다물고 사나엘을 바라보았다.
[뭔데.]
“…왜 내가 사라져야 하는데?”
[왜냐고?]
그러자 뱀이 눈꼬리를 접으며 말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세계, 평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발언에 사나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라피엘 님이 이 세계에 강림하셔야만 해.]
…라피엘 님? 강림?
[거기에 너 같은 이물질은 방해야! 너만 아니었어도 그때 라피엘 님께서 몸을 빼앗고 강림하셨을 텐데……!]
사나엘은 뱀이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때라 하면, 뱀이 라피엘을 납치했던 때를 말하는 것인가.
“라피엘은 하나뿐이잖아. 네가 말하는 라피엘이라는 게 대체 누구야?”
[그야 진짜 라피엘 님이시지! 지금의 가짜가 아닌!]
뱀이 당당하게 외쳤다.
[제10대 스카디 국왕에 즉위하여, 인류를 수호한 영웅!]
이어진 말에 사나엘의 동공이 커졌다.
[진짜, 라피엘 드 스카디 님!]
진짜 라피엘, 10대 국왕, 인류를 수호한 영웅……?
“설마, 진짜 라피엘이란 게…….”
사나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나 말고도, 소설 속 내용을 아는 자가 있었어?!’
상상도 못 한 일에 사나엘이 충격에 휩싸인 사이, 뱀이 강하게 똬리를 틀며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진짜 라피엘 님을 위해, 이물질과 가짜는 사라져 줘야겠어!]
그렇게 사나엘을 한 입에 삼키려던 순간이었다.
빠악!
[끄에엑!]
소녀가 내지른 주먹이 뱀의 코를 강타했다.
뱀이 똬리를 풀고선 눈물을 찔끔 흘렸다.
[비, 비겁하게 예민한 급소를 때리다니!]
“먼저 비겁하게 기습한 게 누군데.”
사나엘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우며 말했다.
“내 동생보고 가짜라느니, 몸을 빼앗겠다느니…….”
사나엘이 한 손으로 검집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았다.
스릉.
하얀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알던 ‘진짜’ 라피엘 님이 누구든 간.”
사나엘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손목에 채워진 마나티어가 강한 빛을 발했다.
“이대로 영문도 모르고, 그냥 당할 순 없어!”
파아아앗!
사나엘의 검에서 새까만 실이 뿜어져 나왔다.
얇은 철사 같은 실은 덩굴처럼 뱀의 몸을 휘감아 올랐다.
[뭐, 뭐야 이건!]
뱀이 당황하며 몸을 마구 꿈틀거렸다.
검은 실은 어찌나 견고한지, 거대한 몸집이 난동 부리며 오두막을 부수고 있는데도 끊어질 기미가 전혀 없었다.
잠든 척 라피엘의 팔찌로 변해 상황을 지켜봐 왔던 뱀이 크게 당황했다.
[너어! 이제야 마법을 시작한 초보자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그 순간, 사나엘을 바라보던 뱀의 적분홍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저 소녀를 감싼, 하얀빛 무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정령왕의, 가호?’
저건 필시 어둠의 정령왕의 것이 분명했다.
누구보다도 익숙한 저 기운을, 자신이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퍼엉!
[으아앗!]
뱀이 잠시 방심한 순간, 검은 실의 압박에 못 이기고 뱀의 몸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다시 손바닥만 해진 뱀을 사나엘이 손가락으로 냅다 낚아챘다.
시골에서 구렁이를 잡을 때처럼 양 볼을 꾸욱 누르듯 잡자 뱀이 마구 날뛰었다.
[소, 손 치워! 이 자세는 굴욕적이라구!]
팔딱거리는 작은 뱀을 향해 사나엘이 말했다.
“알고 있는 거, 모두 뱉어.”
[뭘!]
“네가 말하는 라피엘. 그리고 강림이라는 것에 대해서.”
[흥. 인간 따위에게 알려 줄 정보 따위…….]
“이대로 담금주로 만들어 버린다?”
[다, 담금주?]
사나엘이 씨익 위협적으로 웃었다.
“어느 먼 나라에선, 뱀도 술에 담가 먹거든.”
사나엘의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결국 뱀이 꼬리를 말았다.
[기, 기다려! 설명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직접 보여 준다니?”
[적어도 내 기억을 보면, 너도 라피엘 님의 강림에 찬성하게 될걸?!]
그러자 작은 뱀의 몸에서 하얀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나엘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하얀빛이 부서진 오두막을 휘감았다.
[보고 후회하지나 마!]
파아아앗!
그렇게, 시야가 뒤집혔다.
* * *
감았던 눈을 떴을 땐, 그들은 더 이상 오두막 안에 있지 않았다.
“…여긴.”
[내 기억 속이야.]
주변엔 검붉은 토지와 바위밖에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엔 도시가 자리 잡았던 터만 남았을 뿐,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사나엘이 즉시 뱀의 목을 꽉 틀어쥐었다.
“당장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케, 켁! 무슨 자매가 나란히 폭력적이야! 안심해, 그냥 환상이니까!]
조르는 힘이 조금 풀리자 뱀이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태어났을 땐.]
뱀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이미 세계는 멸망한 뒤였어.]
“…뭐? 멸망……?”
[그래. 멸망한 지 900년이나 흐른 시점이었지.]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책의 내용에 의하면 세계는 라피엘에게 구원받았고, 거기서 끝이었을 텐데……!
때마침 뱀은 사나엘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세계는 한때 구원받았‘었’어. 젊었던 라피엘 님의 활약으로.]
『얼음 왕국의 외톨이 공주님』
이 소설의 결말은 이러했다.
스물이 된 라피엘은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고. 정식으로 스카디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렇게 국왕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다고…….
[하지만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앙이 남기고 간 저주로 인해 토지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고 해.]
먼지 섞인 바람이 불어와 사나엘의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그로써 세계는 연약한 인간들과 동식물은 살아남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되었지.]
뱀의 말대로 사방에 펼쳐진 황량한 풍경 안에는 생명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라피엘 님은 왕위를 내려와 정령왕들과 여행을 떠났어. 세계를 정화하기 위한 여행을.]
“…….”
[그러다 500년째에 물의 정령왕, 운디네 님이 힘을 다하고 사라지셨어. 차례대로 티에라 님, 실피드 님, 이프리트 님이 사라지셨지. 그리고 남은 건…….]
뱀이 흐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셰이드 님뿐이었어.]
다시 한번, 시야가 뒤집혔다.
* * *
뱀이 처음으로 눈에 담은 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었다.
“귀여운 아이구나.”
[……!]
새가 지저귀는 듯이 아름답고, 강물이 흐르듯 깊고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작은 뱀의 눈가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이 정령에게 이름을 붙여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자신을 만든 창조주. 은은한 빛을 뿜는 하얀 머리카락의 신비로운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저 내 혼을 나눠 담을 그릇으로 만든 정령 아니냐.”
[그렇다고 이름을 붙이지 말란 법은 없지요.]
그러자 여인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요르문간드.”
[…요르문간드!]
“네 이름은, 앞으로 요르다.”
뱀이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눈을 맑게 빛냈다.
[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창조주 셰이드 님, 그리고 대마도사 라피엘 드 스카디 님!]
그렇게 요르는 라피엘과 셰이드와 함께 여정을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도 생명체는 없었고,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르는 외롭지 않았다.
늘 곁에는 라피엘과 셰이드가 함께 있었으니까.
그들의 입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이야기보따리는, 요르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갑작스럽게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내 업은…….”
라피엘이 바닥에 누운 채 작게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죽어서도 끝이 없구나.”
[라, 라피엘 님…….]
요르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찬가지로 이를 보던 셰이드의 표정도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라피엘이 말했다.
“마신의 손길이 닿은 토지를 정화하는 데는, 그만한 희생이 필요한 법.”
[라피엘 님… 라피엘 님!]
“…스카디 스태프의 진정한 힘을 끌어내지 못한, 내 업이다.”
라피엘이 바싹 마른 손을 들어 작은 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지난 백 년…….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감았다.
더는 숨을 쉬지 않는 육신 위로, 꽃이 피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내 그 꽃은 두터운 줄기가 되고, 거대한 나무가 되어 이파리를 틔었다.
그렇게 라피엘은 이 세계의 정화를 관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세계수가 되었다.
요르는 세계수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1년이 지나자, 세계수의 주변에 새싹이 하나 땅 위로 움텄고.
2년이 지나자, 샛노란 들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올랐고.
10년이 지나자, 일대는 완전히 아름다운 꽃밭으로 자라났다.
꽃이 자라지 않은 곳은, 요르가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자리 한 곳뿐이었다.
요르는 나비 한 마리가 세계수 위에 안착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라피엘 님…….]
그때, 요르의 뒤로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이걸로 세계는 다시 구원받았습니다. 무얼 그리 슬퍼하십니까.]
[스, 슬픈 게 당연하잖아요!]
이에 요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락 외쳤다.
[이걸로, 이걸로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겠지요! 하지만 라피엘 님은……! 라피엘 님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죠.]
셰이드가 단칼에 답하자 요르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래서, 저는 움직이려고 합니다.]
[…네?]
[당신은 이제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하세요.]
그렇게 셰이드가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히 계십시오, 요르.]
점점 멀어져 가는 사내를 향해, 요르가 몸을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셰, 셰이드 님! 어디 가세요!]
10여 년 만에 움직이는 몸뚱이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굴러 넘어지면서도 작은 뱀은 열심히 앞으로 기어 나갔다.
[저를 멋대로 만들어 놓고……! 멋대로 버리고 가시는 거예요?!]
뱀의 목소리에도 셰이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곧 거대한 빛줄기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저,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요르의 간절한 외침이, 푸른 꽃밭 위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에 혼자… 나만 두고 가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작은 뱀이 훌쩍이는 소리만이 남았다.
[흐윽, 흐으…….]
꽃향기를 실은 산들바람이 요르의 코끝을 스쳤다.
생명으로 가득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요르는 셰이드가 사라졌던 장소로 조금씩 다가갔다.
[셰이드 님께서, 만드신 포탈…….]
그곳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기묘한 포탈이, 아직까지도 열려 있었다.
마치 저를 계속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점점 좁아져 가는 입구를 보며 요르가 이를 꽉 깨물었다.
[호, 혼자 남겨질 바엔……!]
창조주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라고 명한 것도 창조주 본인.
그렇게 요르는 포탈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힌 빛줄기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끝없이 펼쳐진 아공간에 흐릿하게 남은 셰이드의 흔적을 찾아, 요르는 열심히 유영했다.
그렇게 도착한 그 끝엔.
“…맛있니, 라피엘?”
고대에 멸망했던 인류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점심은 네가 좋아하는 크림을 듬뿍 넣은 피아르트로 준비해 봤는데.”
“네, 백작님! 너무너무 맛있어요!”
제가 알고 있던 모습보다, 한참이나 어려진 라피엘 님과.
“언니, 언니도 먹어 봐. 완전 맛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발의 소녀.
“정말? 맛있네.”
사나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