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헌팅 시즌 (후편) (5)
“뭐… 뭐야. 뭔가 했더니.”
나무 뒤편에 숨어 있던 건, 팔뚝만 한 들쥐 형태를 한 하급 마물, 무즈였다.
소년들은 긴장을 탁 풀고는 중얼거렸다.
“그냥 9급 마물이었잖아.”
“저런 쥐새끼 두 마리는 신경 쓸 것도 없어. 가자.”
그 순간, 소년들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
무즈는 두 마리뿐이 아니었다.
찌익, 찍……!
찌익……!
어둡고 깊숙한 수풀 안쪽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무즈가 포진해 있던 것이다.
그들은 곧 선두에 있던 무즈를 향해 일제히 우르르 달려들었다.
무즈들이 뭉치고 뭉쳐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뭐야, 저거?!”
“히익……!”
9급부터 8급 마물은 100위권 후보들에겐 잡것이라 불릴 정도로 약하고 무른 최하급 마물이었다.
그러나 그 위 등급인 7급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소년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10여 미터의 덩치를 가진 거대한 괴물.
“카, 카무즈!”
무즈들이 뭉쳐져 태어난 6급 마물, 카무즈였다.
7급조차 성인 후보가 여럿이 달라붙어도 토벌이 어려운데, 거기에 6급이라니.
온갖 공작으로 위원회를 속여 30위권에 입성한 소년들로서는 도무지 당해 낼 수 없는 존재였다.
“도, 도망쳐……!”
경악한 소년들이 허둥지둥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사냥감이 눈앞에서 도망가면 마물은 그 뒤를 쫓는 게 본능이었다. 그러나 카무즈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마물이 노리는 것은, 바닥을 기고 있는 작은 소녀.
라피엘이 품은 어마어마한 마력이었다.
“하아, 하아…….”
라피엘이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소 사용하는 마나량이 큰 만큼 마나 증발의 여파가 상당히 컸던 것이다.
크르르르륵……!
카무즈가 라피엘에게 다가오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카무즈가 드디어 몸을 크게 움직였다.
마물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대로 라피엘의 위로 꽂히려던 찰나.
타아앙!
무언가에 가로막혀 공격이 빗나갔다.
“……?”
라피엘은 제 위로 나타난 투명한 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눈꽃 같은 서리가 흩날리는 저 빙벽.
빙벽에서 풍겨 오는, 이 차갑고 기분 나쁜 냄새는 분명…….
“…생각해 봤어요.”
라피엘의 뒤에서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을 구할지. 아니면…….”
은색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 잡은 공허한 푸른색 눈동자가, 라피엘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내버려 둘지.”
* * *
“이것이 예의 그 물건입니다.”
한 왕실 기사가 절도 있는 자세로 상자를 올려놓았다.
“어젯밤, 검은 새 모습을 한 사역마가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신하 중 한 명이 그 상자를 열자 안에서 스크롤이 툭 하고 떨어졌다.
“…마, 마나 블로커!”
“게다가 이 소재는…….”
“예, 마력 측정에 걸리지 않는 특수한 생명체. 흰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가 맞습니다.”
기사의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이건 분명 78위 후보. 개럿가의 영애가 신고했다죠.”
“이외에도 신고가 들어온 것은 124위. 그리고 52위, 88위입니다.”
“…별 공통점도 특출 난 점도 없는 자들이군요. 그런 불특정한 다수에게 이 물건이 전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루나툼의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안에… 스크롤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모두가 침음하고 있을 때, 한 신하가 입을 열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마나 블로커 스크롤이 후보들에게까지 퍼져 나간 이상 무언가 조치를 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됩니다.”
신하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화려한 외모의 흑발 남성, 국왕 그란데일이 턱을 괸 채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하가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대, 대회를 중단하는 방향도 고려해 봐야…….”
“중단이라.”
답변이 없던 국왕 대신 입을 연 것은, 은발의 사내였다.
“그러하면, 지금 당장 루나툼의 결계를 뜯어내서 왕성에 마물을 풀라는 말씀입니까.”
“……그, 그런 말이 아니오라.”
“무엇이 다릅니까.”
단호한 목소리에 신하들 전원이 주춤거렸다.
“그대는 지금, 국왕 전하께 스카디 왕성의 중앙 귀족들과, 심지어는 전하의 안전까지 맞바꿔 후보 200명을 구하라 말하고 있는 겁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칼리온 다렌.
스카디 왕국에서 마광석 유통권의 6할을 쥐고 있는 경제의 주축이었다.
“5대 국왕이신 발렉 선왕 때는, 마흔 명의 후보가 전원 사망하는 일이 있었을 때조차 결계를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칼리온은 국왕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초대 국왕이신 루나툼 선왕께서 직접 펼치신 결계는 복구하는 데도 최소 수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도 않고 전하께 그런 망발을 하다니.”
“…….”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칼리온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의견을 냈던 이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를 무심히 지켜보던 그란데일은 시선을 떼고서 결론을 내렸다.
“대회는 계속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는 결계가 펼쳐진 숲을,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드넓은 풍경 위로 흐릿한 형상의 무언가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란데일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 *
“너, 너어……! 누가 구해 달랬어!”
라피엘이 씩씩대며 은발의 소년을 노려보았다.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짜증 난다!
당장에 일어서서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여전히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신을, 구한 게 아니에요.”
유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소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때문에 슬퍼할… 사나엘을 구한 거예요.”
“너 또, 언니 이름을 막……!”
크르르륵!
유안을 향해 마물이 발톱을 다시 휘둘렀다.
위급한 상황에도 소년은 느릿하게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호흡을 정돈하세요. 마나 블로커로 잃은 마력은…….”
터어어엉!
새로이 생성된 얼음 빙벽이 공격을 가볍게 막아 냈다.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소년은 뒤를 돌아보며 마물을 바라보았다.
공허한 푸른색 눈동자가, 카무즈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크륵, 크르르르…….
마물이 크게 동요하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유안은 손을 가볍게 휘저어 거대한 고드름 형태의 얼음을 만들어 날렸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투사체가 마물의 몸에 직격했다.
키에에에엑!
카무즈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검은 혈액이 바닥에 조금 튀었을 뿐, 카무즈는 상처 하나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몸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무즈들이 꿈틀거리며 빠르게 육신을 수복한 것이다.
“…….”
유안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의 가슴을 무언가 무거운 게 짓누르고 답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다시 얼음송곳을 만들어 카무즈를 공격했지만, 여전히 마물은 빠르게 상처를 회복해 냈다.
그르르륵!
동요하고 있던 마물도 연이은 공격에 분노하여 다시 유안에게 이를 드러내고는 높이 점프하여 달려들었다.
“…어디.”
제 위를 덮는 마물의 그림자에, 유안의 푸른색 눈동자가 어둡게 변했다.
“하찮은 게…….”
일순, 하늘색이었던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었다.
소년이 자신의 깊고 어두운 곳에 깔려 있던 마력까지 끌어 올려, 더욱 강력한 마법을 만들어 내려던 순간.
콰아아앙!
“……?”
갑자기 거대한 뱀이 나타나 카무즈의 몸통을 꽉 깨물고는 나무에 처박았다.
키에에엑!
카무즈가 비명을 지르며 뱀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유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거대 뱀을 살피다, 이내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뱀 마물의 등 위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라피엘! 괜찮……!”
“…….”
“…유안? 네가 왜.”
사나엘은 뱀 위에 올라탄 채로 어색하게 소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침묵이 내려앉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러다 소녀는 곧 정신을 차리곤 동생을 향해 훌쩍 뛰어 내려왔다.
“라피엘!”
“하아… 하아…….”
사나엘이 라피엘의 몸을 일으켜 세워 살폈다. 별 상처는 없었지만 흙탕물로 온몸이 엉망이었다.
라피엘은 여전히 숨을 쉬는 게 괴로운지 밭은 숨을 내쉬며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라피엘, 어쩌다 이렇게…….”
“마나 블로커.”
사나엘의 물음에 대신 답해 준 것은, 소년이었다.
“마나 블로커에… 당했어요.”
사나엘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마나 블로커라니. 마법 스크롤은 대회 직전에 검사해서 압수하잖아.”
“그건… 스크롤의, 소재가…….”
유안은 답을 하려다 입을 도로 꾹 다물었다.
마나 블로커 스크롤에 대한 정보를 이 이상 누설하면 공작님의 명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나엘에게도 공연한 의심을 사게 된다.
유안은 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소년을 사나엘이 의아하게 바라볼 때였다.
쿠우우웅!
[너네! 놀고만 있지 말고 얘 잡든가, 도망치든가 해! 6급은 나한테도 버겁다고!]
요르는 낑낑대며 카무즈의 몸을 둘둘 싸매고 있었다.
카무즈가 거세게 저항할수록 점점 똬리가 풀려 갔다.
사나엘은 라피엘을 나무에 기댈 수 있게끔 자세를 잡아 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마물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저 모습은, 카무즈구나. 한번 적을 인식했으면 죽는 그 순간까지 끈질기게 쫓아오는 마물이었지.’
원작의 내용을 떠올린 사나엘이 검을 꽈악 쥐었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여기서 처리해야 해.’
그러곤 손목에 채워진 마나티어를 살펴보았다.
앞으로 남은 마력은 단 다섯 개. 아까 요르를 상대하는 데 무려 반이나 소모해 버렸다.
그래도 충분했다.
고개를 끄덕인 사나엘이 앞으로 걸어 나가자.
“…사나엘.”
유안이 붙잡아 세웠다.
“당신은 무리예요. 아무리 공격해도… 빠르게 상처를 회복하는 마물인데…….”
“아니, 할 수 있어.”
카무즈라면 원작 속 라피엘이 어렸을 적 꽤 고생하며 잡았던 마물이었다.
라피엘은 카무즈를 상대하고 나서 이런 말을 했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요!’
약점만 알면 잡는 건 쉬웠다.
사나엘은 검을 들어 카무즈를 향해 겨누었다.
겨누기보다는 ‘조준’에 가까운 자세였다.
검을 쥐었음에도 마치 낚싯대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에 유안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한 마리. 딱 한 마리만 찾으면 돼.’
마나티어에 남은 푸른 보석이 강한 빛을 발했다.
동시에 사나엘의 검 끝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파아아앗……!
검에서부터 거미줄처럼 아주 얇은, 검은색 실이 만들어졌고.
그 실은 끝도 없이 늘어나 카무즈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검은 실의 끝이, 카무즈의 미간에 박혀 들어간 순간.
“낚였다!”
사나엘이 검을 양손으로 잡고 화악 잡아당겼다.
그러자 카무즈로부터 털 색깔이 어두운 무즈 한 마리가 뽁 하고 분리되어 하늘을 날았다.
“유안!”
사나엘이 이름을 부르자 유안은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얼음송곳이 그대로 허공을 나는 색깔이 어두운 무즈에게 직격했다.
키에에엑!
얼음송곳을 맞은 무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카무즈의 육중한 몸이 모래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