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저주받은 공주님 (4)
사나엘은 슬쩍 눈길을 피하고서 중얼거렸다.
“아니 뭐……. 애들끼리 잘 놀고 있는데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는 ‘저녁 먹으러 귀가해라.’ 하고 분위기 초 치는 게 나름 아버지스럽다면 아버지스럽다 말할 수 있겠는데요.”
“흠, 아버지라.”
사나엘이 작은 목소리로 퉁명스레 행동을 지적했으나 그란데일은 되레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에 사나엘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말을 툭 내뱉었다.
“…내기로 만들어진 가족 놀이에,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요?”
순식간에 마차 안의 공기가 냉랭해졌다.
그란데일은 입꼬리를 내리고서 사나엘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또 그 소리인가. 너는.”
“그냥 저 말고, 라피엘이나 좀 챙겨 주세요.”
“됐다. 시끄럽군.”
꼭 자기 불리할 때만 시끄럽다는 남자였다.
‘애도 아니고.’
사나엘이 부리부리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자, 남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놈에게는 스카디 스태프를 두고 왔다. 다시 빌려 달라며 하도 성화라.”
“네? 그 중요한 걸 막 빌려줘도 되는 건가요?”
“상관없다. 어차피 나 이외에는 접촉할 수조차 없으니.”
그란데일이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스태프가 다른 이를 선택하지 않는 한.”
* * *
드높은 성벽 근처, 울창한 숲속.
헌팅 시즌이 벌어졌던 루나툼 숲의 경계다.
라피엘은 거기서 한 명의 여성을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이 무척이나 익숙한, 키가 훌쩍 커진 아름다운 여성.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나엘 언니다!’
라피엘은 어른이 된 언니를 보자 무척 설렜지만, 그와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사나엘이 흙과 먼지로 엉망이 되어 울고 있던 것이다.
어딘가 아파서 우는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도…….
콰앙!
마른하늘에 번개가 내려치고, 새로운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란 밀색 머리카락에 피처럼 진한 붉은 눈동자.
“…….”
자신과 닮은 여자가, 사나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냉정하고, 차갑고, 무서운 시선이었다.
마치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이라도 보는 것 같은 사나운 눈동자.
여자가 손을 들어 어른이 된 사나엘을 향해 내려치기 시작했다.
살의가 담긴 마법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마!’
라피엘이 이를 막아 보려 했지만, 두 발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고 꾼 꿈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대로라면, 언니가 내 손에……!’
라피엘이 울부짖으려던 찰나.
[일어나!]
“허억!”
누군가의 목소리에 라피엘이 눈을 떴다.
어두운 숲의 풍경은 사라지고, 드넓은 회랑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앙증맞은 크기의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너 괜찮아?]
“…요르.”
라피엘은 황급히 목 부분을 손으로 더듬었다.
제 언니가 선물해 주었던 팬던트가 손에 걸리자, 라피엘은 그제야 현실감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위 눌렸더라. 또.]
소녀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세우고,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공간 중앙에 스카디 스태프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마나 순환 연습하다가, 깜빡 졸았구나.’
요르는 라피엘의 손등을 타고 오르며 말했다.
[으휴. 땀에 눈물에 콧물에, 더러워져서는. 눈 밑 거뭇한 거 봐라. 평소에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 거야?]
“신경 꺼.”
라피엘이 사납게 중얼거렸지만 요르는 기죽지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앞으로 악몽 꾼다 싶으면 마음속으로 강하게 날 불러. 그러면 깨워 줄 테니까.]
“깨워 줘……?”
[귀찮지만, 그 눈물범벅인 드러운 얼굴을 맨날 보느니 조금 수고하는 게 낫지.]
요르는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으나, 라피엘에게는 반가운 이야기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 의외로 좋은 뱀이구나.”
[의외는 뭐야! 몇 년이고 네 뒤치다꺼리를 해 왔는데. 나처럼 상냥하고 자비로운 뱀이 어디 있어.]
라피엘이 요르와 지내온 지도 벌써 6년 가까이 되었다.
거칠었던 첫 만남 이후로는, 요르가 ‘라피엘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공격을 해 온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오해하지 마! 어디까지나 상황을 지켜보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요르는 라피엘이 부탁을 하거나, 곤경에 처하는 일이 있으면 몸소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
라피엘은 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 깨워 줘서 고마워.”
[오해 말라니까.]
“요르.”
그때, 라피엘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정말로, 내 몸에 장난친 거. 너 아니지?”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요르가 몸을 떨며 즉시 답했다.
[며, 몇 번이고 말해 줬잖아! 네가 자라지 않는 건, 제전 때 걸린 저주 탓이라고!]
“…저주.”
라피엘은 몇 년 전 저를 습격해 왔던 여성 악마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네게, 저주를 걸어 주마! 반드시, 최악의 파멸을 맞이하는 저주를!’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리라!’
불행한 결말.
라피엘에게 있어 그것은 단 하나였다.
‘언니를, 잃는 것.’
처음에 꾼 꿈에는 그저 어른이 된 언니만 흐릿하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땐 단순한 악몽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저 두루뭉술했던 꿈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뚜렷해지고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자신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어른이 된 언니를 공격하는 장면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혹시, 그게 악마가 말한 파멸이라면.’
…자신은 더욱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런 저주 따위에, 세뇌 마법 따위에 지지 않을 만큼 강인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국왕이 되겠어.’
라피엘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
‘스태프를 손에 넣어, 국왕을 뛰어넘는 힘을 갖고 말 거야.’
스카디 스태프는 소지자의 마력을 한없이 증폭시키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라피엘은 다시 스태프를 향해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를 퍼부으며 깊이 되뇌었다.
‘반드시 스태프에게 인정을 받고 말겠어.’
그때,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피엘, 여기 있었구나.”
“…언니?”
사나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지하고 어두웠던 라피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언니이이이!”
라피엘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날아 사나엘에게 살포시 안겨 들었다. 사나엘은 제 허리까지만 오는 라피엘을 꼬옥 안으며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두 소녀는 한날한시에 태어났어도, 영락없이 나이 차이가 있는 자매처럼 보였다.
사나엘의 가슴팍에 얼굴을 두어 번 부비부비 비벼 댄 라피엘이 퍼뜩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언니, 자선 파티에 간다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빨리 와?”
“아, 그게.”
“내가 데리고 왔다.”
냉담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피엘은 사나엘의 어깨 너머로 나타난 남자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야. 댁이 왜요.”
반말과 존대가 섞인 무례한 어조에 사나엘이 진땀을 흘렸다.
“라피엘, 그래도 국왕 전하의 면전인데 말조심…….”
“칫.”
“혀도 차지 마.”
이를 가볍게 무시한 그란데일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 놓여 있던 검은색 장검이 공중에 떠올라 그에게 날아들었다.
검의 손잡이를 낚아채자 검이 공기 중에 녹아들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왜 댁이 언니를 데리고 온 건데요.”
라피엘이 다시 쏘아붙이자, 남자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서 느긋하게 말했다.
“오늘은 송어 요리가 나오니까.”
“송어? 갑자기 웬 송어? 그거 맛대가리도 없는 거, 우엑.”
라피엘이 일부러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과장스레 혀를 내밀며 질색하자, 그란데일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후, 가소롭군.”
“뭐가요.”
“이 아이가 최근 송어 요리에 빠진 것도 모르나.”
“……!”
연분홍색 눈동자가 왕방울만 해지더니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네놈이 졌군. 지난번 케이크 때와 달리 말이지.”
…생크림 케이크 사건.
사나엘이 초콜릿을 좋아하냐, 생크림을 좋아하냐로 그란데일과 라피엘이 박 터지게 싸우다 결국 유혈 마법 대전으로까지 번졌던 유치한 사건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짓는 국왕을 보고 사나엘이 바람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직도 삐져 계셨어요? 그거 1년은 더 된 일을 가지고…….”
“삐졌다고? 누가.”
그란데일이 험악한 얼굴로 사나엘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얄팍한 정보를 과신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던 거뿐이다.”
“아, 네. 그러십니까…….”
“언니! 소, 송어 나도 좋아해! 나 랍스터 좋아하잖아! 생선 뼈 바르는 게 좀 힘들지만……!”
“라피엘, 굳이 네 식성을 부정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상황도 벌써 5년을 넘어 곧 6년째.
사나엘은 이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송어나 먹자.”
* * *
하늘에서 마나로 만들어진 검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려왔다.
나비는 제 몸보다도 훨씬 거대한 편지 봉투를 달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10대 후반의 남성이 서신을 받아들어 겉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이젠 소년티를 벗기 시작한 미청년은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사나엘의 필체인가.”
매년 이맘때쯤 받아 온 생일 연회의 초대장이었다.
케이디아는 활짝 열린 창밖에서 마법과 체력 단련을 하고 있는 열 살가량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무슨 탁아소도 아니고.”
“거 무슨 소리냐. 아이들 듣게.”
케이디아의 뒤로 소년보다도 더욱 거대한 몸집의 붉은 머리 중년이 나타났다.
“맞잖아요. 그 쌍둥이부터 해서, 저 애들 하며.”
케이디아는 랜돌프에게 투정하듯 말하다, 연무장 멀리에 있는 은발 소년의 모습을 보고는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 저 녀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