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건국제의 불청객 (2)
사나엘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사나엘은 마차 내부를 살펴보았다.
다 큰 성인이 뛰어다녀도 될 만큼 거대한 마차 좌석 중앙에는 거구의 금발 남자, 1황자 카디악과 브라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마도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왜 로한 황자가 황권을 쥐려고 필사적인지 알겠네.’
사나엘은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놈이 황제가 된다면 필시 암군이 될 테니까.’
덕분에 사나엘은 예정에도 없던 왕국 순방을 하게 생겼다.
지방에 홀로 남겨진 에트란은 울상을 지으며 사나엘을 배웅해 주었다. 제국과의 수교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업무량은 살인적이었으니 그녀 혼자서는 벅차리라.
‘힘내세요, 에트란.’
사나엘이 속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을 무렵,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재미없군.”
카디악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소문의 마도 왕국이라 기대하고 왔더니만, 제국에 복속된 왕국과 똑같은 수준이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괜히 기대했군.”
퉁명스러운 말에도 사나엘은 말없이 웃음만 지어 보였다.
분명 저 카디악 황자도 로한처럼 하를링에서부터 국격의 차이를 실감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 태도는 일부러 자신의 신경을 긁으려고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실망을 안겨 드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니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기 위해 사나엘은 최선을 다했다.
생글생글 웃는 사나엘을 보며 카디악이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군.”
그렇게 카디악은 사나엘에게서 흥미를 끊었다.
이제야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번엔 다른 자의 시선이 사나엘에게 날아들었다.
“공주 저하.”
녹색 머리의 청년. 카디악의 마도사 브라이스였다.
“정말로 그 대마도사님의 자녀분이 맞으십니까?”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제국의 마도사.”
“아뇨, 믿기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어딘가 음흉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조각냈다는 그분이 실존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말이죠. 아, 혹시 공주님의 마나를 조금 살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대마도사님의 피를 이어받으셨을 테니 잠시만 조사를…….”
“당신, 브라이스라고 하셨습니까.”
“예? 예, 맞습니다.”
“브라이스. 아무리 귀빈의 일행이라고 해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가 있는 법입니다.”
사나엘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한 자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날카롭게 쳐다보는 황금색 눈동자에 움찔 몸을 떤 브라이스는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침울하게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댄 것이 아무리 봐도 위엄 넘치는 황자의 최측근이라기엔 어딘가 많이 부족해 보였다.
‘…저런 음침한 마도사가 할라일일 리가 없지.’
악마가 대단한 연기력을 지닌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나엘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작은 마을에 화려한 대형 마차와 제국 기사 100여 명이 우르르 지나가니, 구경꾼들이 시내로 나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국민들이 겁을 먹진 않아서 다행이네.’
항구에서부터 전 병력을 전부 끌고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던 황자를 겨우 어르고 달래서 소수만 데리고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카디 왕국이 제국에 복속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형 병력을 동원한 것은 조약 위반을 넘어선 완전히 무례한 짓이었다.
‘나중에 로한 황자한테 단단히 책임을 물어야겠어.’
물론 그쪽에서도 카디악의 방문은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주고받은 서신에서는 ‘건국제가 기대됩니다.’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으니까.
“공주, 도착은 아직인가.”
“숲 하나만 가로지르면 금방 푸케령에 도착합니다. 푸케 백작저는 황자님께서 머무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니, 오늘은 우선 그곳에서 지내시지요.”
“지루하군.”
그는 턱을 쓸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루하단 말이지. 이럴 때 어느 정도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지면 적당한데 말이지.”
‘…재미있는 사건?’
“슬슬 때가 되었군.”
그 순간이었다.
콰앙!
마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나엘은 즉시 창문에서 떨어져 앉으며 황자부터 살폈다.
카디악과 마도사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공주 저하! 습격입니다!”
황자의 마차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던 다우드가 크게 외쳤다.
“마차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바깥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차 사그러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바깥은 다시 조용해졌다. 금방 사태가 진압된 모양이었다.
얼마 안 있어 제국 기사들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고, 그제야 카디악과 사나엘은 바깥으로 나와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마차가 달리던 가도 위에는 다섯 명의 인원이 포박되어 혼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마차를 습격한 괴한들이었다.
여기서 사나엘은 위화감을 느꼈다.
‘100명이 넘는 기사를 이끄는 행렬을 습격한 사람이… 고작 다섯 명이라고?’
아군 측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자가 둘뿐이었으니, 괴한은 실력이 있는 자들도 아니었다.
또 쓰러진 괴한들은 사지를 떨면서도 안색이 시퍼런 것이 도무지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사나엘이 생각에 잠긴 사이, 한 기사가 달려와 카디악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카디악 전하, 습격한 자들이 갖고 있던 물건입니다.”
검은 표지에 두꺼운 책.
사나엘에게는 익숙한 물건이었다.
“흐음, 책이라. 처음 보는군. 공주는 이게 무슨 책인지 아는가?”
“…하.”
너무 뻔한 연출에 기가 차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보여 주기식이로군.’
사나엘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카디악에게 다가가 책을 건네받았다.
“잘 알고 있다마다요. 저번에 로한 황자 전하를 덮친 자들과 한패로 보이는군요.”
“음, 입국 첫날부터 황가를 노리는 불한당의 습격이라니. 스카디의 치안도 말 다했군.”
사나엘은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책을 보관하라고 다우드에게 건네줄 참이었다.
“거기, 스카디의 1공주.”
그때 카디악이 사나엘을 불러 세웠다.
“로한이 무슨 바람을 불어넣었는지는 몰라도, 전부 다 헛된 망상일 뿐이니 잊어라.”
“…무슨 소리신지.”
“어느 길에 서야 네놈에게 득이 될지 잘 생각해 보라는 소리다.”
카디악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마도사들은 똑똑하니 금방 판단이 서겠지. 그래서 대답은?”
“…….”
“빨리 답하라, 공주.”
새빨간 눈동자가 살벌한 빛을 띠었다.
이와 마주한 사나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수교의 책임자라지만, 저 사내의 비위를 맞춰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기를 거스르면 겨우 체계가 성립된 관계에 악영향이 갈지도 모른다.
골치가 아파 왔다. 아릿한 두통에 미간을 좁히고서, 대답을 골라내고 있던 그때였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카디악도, 사나엘의 것도 아닌 미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여기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였고.
또, 사나엘이 잘 알고 있는 목소리기도 했다.
“네놈은 누구냐.”
카디악이 불쾌한 듯 잔뜩 표정을 구기자 재차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화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냥 듣고 있기엔 다소 과격한 언사가 있는 듯하여.”
사나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낯익은 소년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도 신장이 자라서, 이제는 고개를 조금 들어야 할 정도였다.
소년티를 벗기 시작한 사내는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생소했다.
“유안……?”
“네, 사나엘.”
유안의 푸른색 눈동자가 사나엘의 모습을 담아냈다.
“오랜만에 뵈어요.”
흐리게 미소를 짓는 유안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사나엘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 * *
요르는 눈을 떴다.
사방이 흙과 먼지뿐이었다.
광활한 사막 위로 기다란 몸을 이끌고 스멀스멀 기어갔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았다.
자신에게는 저를 이끌어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요르.”
기다란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제게 손을 내밀었다.
요르가 반짝이는 눈망울을 하고 바로 손 위로 몸을 올리려던 순간, 세계는 변했다.
사막이 초원이 되고, 여인은 나무가 되었다.
그 앞에서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던 요르는 이내 그에게 한 사내가 다가온 것을 눈치챘다.
[요르.]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요르의 앞에 서 있었다.
[…셰이드 님?]
[오랜만입니다.]
[…흥, 뭐가 오랜만이라는 거예요.]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는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어 마치 인간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셰이드 님, 당신은 그 여자애의 몸 속에서 아주 잠드신 것 아니었나요? 평생,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다고요.]
요르는 반가움보다도 분노로 몸을 바들거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제 꿈속으로 들어오신 거예요? 전 아주 까먹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작은 뱀의 쌀쌀맞은 반응에도 셰이드는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에게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몇십 년이고 모른 체하셨으면서. 지금 와서요?]
요르는 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크게 외쳤다.
[그랬다면! 문은 열어 두지 마셨어야죠! 왜 그때 포탈을 열어 두신 거예요! 따라오라는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는 뱀을 내려다보며, 셰이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많이 외로우셨겠습니다. 미안해요, 요르문간드.]
그는 무릎을 굽히고는 요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진 않으셨을 거예요. 그동안 당신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전, 전 늘 혼자였어요! 그 세계의 일을 기억하는 건, 그때 남겨진 건 오직 저 혼자……!]
[요르.]
셰이드는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간은 제가 힘이 닿질 않아서 당신께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요르가 들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어요.]
[…흥! 할 얘기라면 사나엘 그 애한테 말하면 되잖아요. 그보다 왜 그런 퍼블리코 아이 따위한테 깃드신 건가요? 라피엘 님도 아니고.]
[그건…….]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세계의 운명을 비틀기 위한 가장 완벽한 조건이, 바로 그 소녀였으니까요.]
알쏭달쏭한 말에 요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작은 이빨을 드러냈다.
[셰이드 님, 저희에겐 라피엘 님이 가장 소중하잖아요! 당신이 없으면 라피엘 님의 힘은 이전보다 더 약해질 텐데……!]
[요르. 당신이 쫓고 있는 것은 라피엘 님입니까, 아니면 과거의 편린입니까.]
셰이드의 검은 눈동자가 요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라는 라피엘 님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아냐.]
[당신에게 남겨진 라피엘 님의 마나는 그저 모방된 기억의 조각일 뿐. 진짜 라피엘 님이 아니라는 것쯤은 요르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아녜요! 셰이드 님!]
[진정으로 그분을 위한다면.]
흥분한 요르의 몸체를 쓸어 주던 셰이드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이 세계에서 숨을 내쉬며 살아가고 있는 라피엘 님을 지켜 주세요.]
[…….]
[그리고 라피엘 님의 자매이신 사나엘을,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요르가 기세를 가라앉히고 불안한 듯 묻자 셰이드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저조차, 지금의 대마도사라 불리는 인간 사내조차 막을 수 없는 큰 위험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가 온다면…….]
셰이드가 요르의 머리에서 손가락을 떼어 내며 말했다.
[요르가 사나엘을 지켜 주었으면 합니다.]
요르는 다시금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소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밀색 머리카락을 한, 요르의 주인과 같은 얼굴을 한 소녀.
그러나 주인과는 분명 다른 소녀가 요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괜찮아?”
요르는 끝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야. 구경났어? 왜 쳐다봐.]
“식은땀을 흘리고 있길래. 근데 뱀도 땀을 흘려?”
[흥. 난 보통 뱀이 아니니까.]
요르는 시큰둥하게 답하고는 도로 라피엘의 손목을 감쌌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포근하고도 익숙한 마나를 느끼자 다시금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 아이랑 지낸 지 얼마나 되었더라.’
요르는 아까 전처럼 편히 잠에 들 수 없었다.
과거의 라피엘 님을 다시 만나고 싶은 욕심, 이 세계에 닥칠 위협, 셰이드의 부탁.
그리고 이 세계의 라피엘 사이에서, 요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셰이드 님이 막지 못할 만큼, 큰 위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