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하얀 하늘, 검은 피 (6)
스카디 스태프를 노리다니?
사나엘은 당혹감을 삼키고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헛수고야. 스카디 스태프는 국왕 전하가 아니면 아무도 만질 수 없어.”
“그건 그렇죠. 스태프는 직접 인정한 인간, 국왕의 마나만을 감지하니까요.”
할라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스태프가 인정한 유일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스태프에 접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있지 않습니까.”
사나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할라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마도사의 마나가.”
사나엘은 반사적으로 마나티어가 채워진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 흔적만 있어도 접촉할 수 있습니다. 스태프를 손에 쥘 수 있어요.”
“…….”
“마음 같아서는 마나티어만 빼앗아 제가 사용하고 싶지만, 그 아티팩트는 당신에게만 반응하도록 제약이 걸려 있으니까요. 하는 수 없이 당신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안 해.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 하지?”
사나엘이 사납게 노려보고 있을 때, 유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사나엘.”
유안은 마물의 피로 엉망이 된 옷을 털며 사나엘의 곁에 다가왔다.
“저 악마 놈의 말을 따를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이렇게 빨리 처리할 줄은. 꽤 공들여 엄선한 마물들이었는데요.”
할라일의 그림자가 유안이 처리한 마물로 빠르게 뻗어 나갔다.
그림자가 마물들에게 닿기 직전, 사나엘이 서둘러 외쳤다.
“유안! 마물 사체를 다른 곳으로!”
사나엘의 뜻을 곧바로 알아챈 유안이 손을 뻗어 포탈을 만들어 냈다.
대형 포털은 쓰러진 마물들을 바로 집어삼켜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렸다. 단숨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그러자 할라일의 그림자가 길을 잃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사나엘이 할라일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쓰는 그 기술, 제물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거지?”
할라일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사나엘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까 소환했던 마물들의 크기는 분명 거대했지만, 이전보다 수가 줄어들어 있었어. 아마도 질량이 기준이었겠지.”
“…참 영특하십니다.”
할라일의 얼굴에는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다시 유들유들한 기색으로 돌아와 사나엘과 유안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친구들과 놀아 주시겠습니까?”
그의 곁에 검은 기둥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 두 명이 나타났다.
“때마침 승부가 다 난 것 같아서요.”
소년들의 얼굴을 본 사나엘의 몸이 얼어붙었다.
저들은 아까 전, 라피엘을 상대하던 마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럼, 라피엘은……!”
사나엘이 급히 고개를 돌리며 라피엘의 행방을 찾았다.
그때, 할라일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데리고 왔습니다.”
다시 검은 기둥이 솟아나고 그 틈으로 또 다른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발치에, 정신을 잃고서 쓰러진 한 소녀가 있었다.
“…….”
소년은 소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고 끌고 오더니, 위로 들어 보였다.
늘어진 소녀의 몸이 소년의 악력에 힘없이 일으켜 세워졌다.
밀색으로 돌아온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고, 입고 있던 검은 하녀복은 군데군데가 찢어져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닫힌 눈꺼풀을 타고 속눈썹에 맺혔다가 떨어져 내렸다.
“…라피, 엘?”
사나엘은 멍한 얼굴로, 소녀의 끔찍한 몰골을 눈에 담았다.
“라피엘이…….”
“생각했던 것보다 끈질기더군요. 역시 대마도사의 핏줄답습니다.”
“어떻게…….”
“완성된 마신을 셋이나 붙였는데도 비등하게 겨루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살짝 방해를 걸었더니 금방 기세가 꺾이더군요.”
“…너.”
사나엘은 주먹을 꽉 쥐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할라일에게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나엘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황금색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분노를 한 몸에 받아 낸 할라일은 가만히 웃음만 짓고 있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완성품들에게 미리 명령을 내려 두었지요.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환영 마법을 사용하라고 말입니다.”
“환영 마법……?”
“그래요. 당신이 죽는 환영 말이죠.”
“…뭐?”
할라일의 말을 들은 순간, 사나엘은 믿기지 않아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내가 죽는, 환영?”
“처음엔 꽤 침착하게 대처하더군요. 하지만 열 번, 수십 번. 다양하고 창의적인 환영을 보여 주니 점차 이성을 잃고 덤비다가, 이럴 수가. 이런 꼴이.”
할라일이 과장스러운 손짓으로 라피엘을 가리켰다.
사나엘은 다시 한번 라피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라피엘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평소에 꾸벅꾸벅 졸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떠서 ‘언니!’라고 부르며 제 팔에 달라붙어서 얼굴을 비벼 댈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라피엘은 눈을 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피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사나엘은 망부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기뻐하세요, 1공주. 저리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건 그만큼 당신을 사랑했다는 증거니까요.”
“…….”
“아, 그런데 국왕 쪽은 아직 건재하네요. 실은 당신을 총애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 더러운 입 닥쳐.”
굳어 버린 사나엘 대신 분노를 터뜨린 것은 유안이었다.
“지금 바로 라피엘 님을 내려놔. 그렇지 않으면.”
유안의 마나가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늘을 뒤덮을 만큼 방대한 마나가 수천 개의 얼음송곳이 되어 할라일과 마신들을 노렸다.
하지만 할라일은 여전히 이죽거리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피엘을 들고 있던 소년이 검은 마기 일부를 칼날로 만들어 소녀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자아, 제게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을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목을 베겠습니다.”
“…….”
유안은 마나를 더 뿜어내지도 거두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고, 사나엘은 몸을 떨며 라피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에 할라일이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고 보니 인질의 위치가 뒤바뀌었네요. 본래 계획은 1공주를 인질로 써서 국왕과 2공주를 처리하고 난 뒤 스태프를 빼앗는 거였는데 말이죠. 뭐 좋은 게 좋은 거지요.”
유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전투태세를 갖췄으나.
“…유안, 움직이지 마.”
사나엘의 제지에 곧장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안의 작은 움직임에 라피엘의 목에 대어진 칼끝이 약간 파고든 것이다.
“그러면, 라피엘이…….”
“…예.”
유안은 혀를 차며 완전히 마나를 거두었다.
그 모습에 할라일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렌 공작가의 도련님께선 거기서 꼼짝 말고 서 계시면 됩니다. 그게 당신의 역할이에요.”
“…….”
“그럼 이제 함께 가시죠. 사나엘 공주.”
그는 어느새 사나엘의 곁으로 다가와 소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비석으로 가서, 스카디 스태프를 제게 건네주기만 하면 된답니다.”
할라일이 인도하는 대로 사나엘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를 돌아서 유안과 라피엘을 보려 했지만, 할라일의 손아귀에 잡혀 억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가 당신의 손에 들어오면, 지금의 형태가 무너지고 본연의 진짜 모습으로 돌아올 겁니다.”
걸음을 옮길수록 할라일의 목소리에 흥분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태곳적 모습. 루나툼 드 스카디가 처음으로 스태프를 잡았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가 바로 제가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비석을 향해 손을 뻗어 쥐는 시늉을 했다.
“저는 비로소, 그녀와 마주할 수 있게 되겠지요.”
“…….”
사나엘은 얌전히 그가 이끄는 대로 비석으로 걸어갔다.
지금 사나엘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쓰러진 라피엘, 큰 상처를 입었던 제 동생의 모습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느새 사나엘은 비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자, 비석 안에 손을 넣어 스태프를 쥐십시오.”
거대하고 투명한 크리스털 기둥이 어두운 새벽하늘 아래 홀로 반짝이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안에는 검고 기다란 장검, 스카디 스태프가 호박 속에 갇힌 부유물처럼 떠 있었다.
사나엘은 그 앞에서 망설였다.
“서두르세요. 당신 동생에게서 피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라피엘의 얼굴이 떠오르자 사나엘은 저도 모르게 비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 손가락의 끝이 비석에 닿았다.
그러자 수면이 일렁이듯, 비석의 표면이 흔들렸다.
손가락 한 마디가 투명한 비석 안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스태프를 꺼내게 된다면…….’
라피엘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왕국은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어 버린다.
마물 떼의 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가 생기고 말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사나엘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세계가 그저, 소설 속 내용에 불과하기만 했더라면…….’
글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유안. 그리고, 유고와 유피아.
원래대로라면 이미 세상을 떠났을 이들을 구하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세계는 그저 주인공들과 조연들의 이야기를 담은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작은 개개인 하나하나가 숨을 쉬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이 사실을, 사나엘은 16년간의 두 번째 삶을 살아오며 절감했다.
“…나는.”
결국 사나엘은.
“할 수 없어.”
비석에서 손을 빼내었다.
“이런, 동생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겠다? 훌륭한 공주 저하 납시었네요.”
할라일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빈정거렸다.
“여성의 몸으로 갈아타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하는 수 없군요.”
할라일이 손에 무언가를 소환해 냈다.
짧은 도신을 가진 검은 단도였다.
“당신의 몸을 가로채서, 제가 직접 손에 스태프를 쥐도록 하겠습니다.”
단도가 사나엘의 뺨을 긋고 지나갔다.
아릿한 고통이 느껴지며 핏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시었다.
“당신은 늘 한 발 앞서서 제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지요. 오랜 세월, 이토록 흥미로웠던 사람은 그녀 이후로 오랜만이었습니다.”
할라일이 사나엘의 머리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도를 거꾸로 쥐었다.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습니다. 잘 가십시오.”
할라일이 단도로 사나엘의 가슴을 내리찍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할라일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터졌다.
“…음?”
할라일이 움직임을 멈추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게 반짝이던 불빛은 곧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새파랗게 빛나는, 아름다운 불꽃이다.
“파란, 불꽃?”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
불꽃이 순식간에 팔과 몸통으로 번져 나갔다.
줄곧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던 할라일이 미간을 좁히곤 무릎을 꿇었다.
사지가 검게 타들어 가고 나서야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에 신음했다.
곧 불꽃이 전신을 완전히 삼키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크아악……!”
강렬히 타오르던 화염은 주변으로 퍼져 나가 사나엘마저 집어삼켰다.
하지만, 사나엘은 불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번진 불길이었으나,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타들어 가는 화염은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았다.
단 하나의 존재, 악마만을 제외하고서.
‘…뜨겁지 않아.’
불은 뜨겁기보다는, 오히려 서늘하고.
조금 차갑다 싶더니, 다시 따뜻해졌다.
맹렬한 화염 속이었지만, 봄볕 아래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을 맞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 따스함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어딘가 익숙했다.
저벅, 저벅.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불꽃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홀로 유유히 걸어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많이 지체되었군.”
남자는 찢어진 망토를 풀어 바닥에 버려두고는, 사나엘의 앞에 섰다.
“몸은.”
“…….”
“괜찮지 않군.”
그가 피가 흐르는 소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따끔한 상처 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아이의 몸을 상하게 했으니. 응당 그 대가를 받아야겠지.”
남자가 뺨에서 손을 떼었을 땐, 이미 상처가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그는 비석을 지나쳐 화염 속에서 검게 타들어 가고 있는 인형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부터 저놈을.”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 버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