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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을-집착광공으로 키웠습니다 (148)화 (148/148)

#148

아버지 손을 잡고 (2)

낡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로브 아래로 얇은 가죽 갑옷이 보이고, 마광석이 박힌 각양각색의 마도구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그들은 곧 어떤 호숫가를 에워쌌다.

드넓은 호수는 기묘하리만치 잠잠했다.

따뜻한 날씨에도 꽁꽁 얼어붙어 있던 것이다.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호수 정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하얀 머리카락에,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소녀였다.

하늘을 올려다본 채 꼼짝도 않는 소녀는 마치 시체나 인형처럼 느껴졌다.

소녀의 주변으로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새까만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포박하겠습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즉시 품에서 마도구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기다리세요.”

그들 사이로 한 소년이 걸어갔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푸른색을 띤 머리카락이, 숲에서 불어온 밤바람에 살랑거렸다.

“마기를 정화하는 게 우선입니다.”

소년, 유안이 호수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얼어붙은 수면 위로 기어 다니던 마기가 쐐기처럼 유안에게 쏘아졌다.

그러나 마기는 유안에게 닿지 못하고 방향이 강제로 틀어져 애먼 바닥에 박혀 들었다.

“제게는 소용없습니다.”

유안이 손바닥을 펼치자 마기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 갔다.

마기가 완전히 사라진 호숫가 위를, 유안은 천천히 걸어갔다.

소녀의 지척까지 다가선 유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아이도… 자아가 없어.”

하얀 소녀는 눈을 뜨고 얕게 숨만 쉬고 있을 뿐,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마치 태엽이 멈춘 자동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곧 로브를 입은 자들이 다가왔다.

사나엘이 에트란 상단주를 통해 고용한 용병들은 소녀의 사지와 목에 마도구를 채웠다.

용병들의 리더가 유안에게 다가와 작게 묵례하며 말했다.

“이걸로 네 명째군요.”

“…….”

“저항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남은 것들도 위치만 알아내면 금방 마무리되겠군요.”

소녀는 힘없이 용병들에게 끌려갔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유안은, 아까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나엘, 부디 무사하시길.”

* * *

“할아버지.”

“뭐냐, 케이디아.”

“전하께서는 전쟁이라도 치르실 작정이신 겁니까.”

항구 도시 하를링은 바다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와 잔잔한 파도 소리로 시작한다.

오늘도 하를링에 평화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으나…….

고기를 잡으러 간 어선 대신 바다를 가득 메운 것은 대형 군선들이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은 어마어마한 수의 군선과 마도병들, 기사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데이하령부터 해서 인근 영주들의 병력까지 모두 싹싹 긁어모았잖아요. 설마 이대로 배리어를 부수려는 건 아니죠?”

“스카디 배리어가 물리력으로 부서지겠느냐. 뭐,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 생각이란 걸 모르겠어서 불안하다고요.”

“이제 곧 도착하실 시간이다. 무슨 의중이신지도 조만간 알게 되겠지. …음?”

랜돌프는 말을 하다 말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텅 빈 대로변에 마차 행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분은……?”

가장 선두에 선 마차는 홀로 모양이 달랐다.

하얀 몸체 위로 황금과 적색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 위에는 아르토리아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루시안 황자 전하 아니더냐? 왕성에 계속 머무르시는 줄로 알았건만.”

곧 그들의 앞에 마차들이 세워졌다.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려선 것은 역시나 루시안 황자였다.

“데이하 백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황자 전하. 국왕 전하와 함께 오셨습니까?”

“예. 바로 뒤에…….”

다시금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란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수백 명이 넘는 마도병과 마도기사들이다.

왕실 정예 병력 복장을 입은 그들은 오와 열을 맞춰 항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거대한 흑색 마차가 자리했다.

“…정말 전쟁이라도 치르실 작정이신가.”

케이디아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랜돌프는 부리나케 마차로 달려 나갔고, 때마침 마차의 문이 열렸다.

검은 바지 아래 반짝이는 구두코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하, 오셨습니까.”

화사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

국왕은 어디 가고, 웬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일면식 하나 없는 소년이 국왕의 마차에서 내리는가? 아니, 그 전에 어째 이 소년. 비록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은 평범한 갈색이라지만, 보면 볼수록 국왕 전하와 판박이였다.

당황한 랜돌프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같이 나가!”

“라, 라피엘 공주 저하?”

라피엘 공주님도 함께라니?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라피엘이 소년의 팔을 부여잡으며 함께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 모습이 퍽 친밀해 보여서, 랜돌프는 불현듯 떠오른 소문을 입에 담았다.

“아, 이분이 바로 라피엘 공주 저하의 연애 상대라던…….”

“아냐!”

“헛소리다.”

동시에 답한 것은 라피엘, 그리고 낮고 서늘한 음성이었다.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려선 것은 그란데일이었다.

“비켜라.”

“악!”

그란데일은 마나를 일으켜 라피엘을 옆으로 밀어 냈다.

그리고 소년의 곁에 서서는 이리 말했다.

“오느라 지치지 않았나.”

…잠깐만. 저 사람이 정녕 국왕 전하가 맞는가?

랜돌프가 아는 국왕은 저리 부드럽고 따뜻한 어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었다.

“아, 아뇨. 자주 와 본 곳이라서 괜찮았습니다.”

“그런가. …그렇겠군.”

난생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에 랜돌프는 자리에서 펄쩍 뛸 만큼 놀랐으나, 이어진 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랜돌프, 이게 동부 귀족의 전 병력이 맞겠지.”

“예, 예? 그, 그렇습니다.”

그란데일은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 왕실 정예군을 비롯한 전 병력의 통솔권은 이 아이에게 일임한다.”

“예?”

“이 아이의 지시에 불복종하는 자들은 전원 왕실에 대한 반역으로 여길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

“…예에에에?!”

랜돌프의 비명 섞인 고성이 하를링에 울려 퍼졌다.

* * *

하를링에 도착하기 하루 전.

그란데일의 앞에 보물 관리인이 무릎을 꿇었다.

“저, 정말로 보물고에 물건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떨며 텅 빈 상자를 들어 보였다.

영험한 기운이 풍겨져 나오는 푸른 상자 안에는 검은 벨벳 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천 위로는 둥글게 홈이 파여 있다.

원래라면 팔찌가 자리했을 위치였다.

“제 불찰입니다. 지난 수백 년간 누구도 손대지 않은 보물이 어떻게……. 죽여 주시옵소서!”

“꺼져라.”

“예?”

“아무래도 좋으니 꺼지라 했다.”

“예, 예엡!”

보물 관리인은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사라졌다.

그란데일의 뒤편에서 사나엘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전하, 이제 믿어 주시겠습니까.”

사나엘이 소매를 들어 올렸다.

열 개의 보석이 달린 팔찌가 조명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나티어를 주신 건 다름 아닌 전하셨습니다.”

“…….”

“스카디 왕성의 보물고는 보물 관리인과 전하 외에는 아무도 진입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란데일은 사나엘이 차고 있던 팔찌를 노려보다가 미간을 짚었다.

“…국보를 넘겨주다니. 예상 이상으로, 한심한 놈이었나 보군.”

한숨이 섞인 목소리에는 자조가 어려 있었다.

“믿어 주시는 건가요?”

“말하지 않았나.”

그란데일이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무엇이든 듣겠다고 말한 건 나였다.”

그는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상황은 이해했다. 내가 이제껏 보아 온 이상한 기억들. 그리고 네 존재에 대한 기시감. 네놈의 이야기를 전부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란데일이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는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 셰이드가 서 있었다.

“어둠의 정령왕이라 했나?”

“예. 셰이드라 합니다.”

“정령에게 이토록 뚜렷한 자아가 있다니. 웃기는 일이군.”

그란데일이 코웃음을 치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적어도 이놈이 네 아비가 아니란 건 확실하지 않은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명백히 비웃는 억양이었다.

이를 사나엘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왜 그 부분에서 의기양양해지는데?’

그때,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비록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셰이드의 목소리였다.

“전, 사나엘을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으니까요.”

셰이드는 여전히 나긋나긋하게 웃어 보였으나, 묘하게 입매가 굳어 있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셰이드라니.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 정령이 인간을 상대로 가족 놀음이라.”

이에 그란데일이 코웃음을 친 뒤 셰이드를 노려보았다.

“저 아이의 말대로라면 나 역시 이 아이를 오랫동안 지켜 왔던 것 같다만.”

“저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지요. 당신이 이 아이를 방치하고 모른 체하고 있을 때부터.”

파지직.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허공에 스파크가 터졌다.

“저, 잠시만요. 갑자기 왜들 그래요?”

사나엘이 급히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고 있을 때였다.

콰앙!

그들이 있던 방문이 폭발하더니 산산조각 났다.

“야! 너 내가 감시한다 그랬지!”

바로 오늘, 심문실 문짝을 뜯어 낸 그란데일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사나엘은 갑자기 방 안으로 들이닥친 소녀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멋대로 달리아 궁에서 도망가 봤자 내 손바닥 안……. 뭐야.”

라피엘이 고개를 홱홱 돌려 보더니 말했다.

“네가 왜 저 남자랑 같이 있는데?”

“…아직 이놈에게는 말하지 않은 건가.”

그란데일의 말에 라피엘이 가늘게 눈을 뜨며 스산하게 읊조렸다.

“무슨 소린데요?”

“이런 소리지.”

그란데일이 검지로 허공을 긋자 사나엘의 머리가 위로 당겨졌다.

“으앗!”

사나엘이 손으로 머리를 잡기도 전에 쏘옥, 하고 고동색 가발이 벗겨지더니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

라피엘의 턱이 쩍 벌어졌다.

“…너, 너, 너!”

라피엘이 사나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 저 남자랑 똑같이 생겼어어!”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요, 사나엘?”

셰이드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조심스레 말하자 사나엘은 하하, 공허하게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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