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제가 선택한 여자, 제가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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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제가 선택한 여자, 제가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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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제가 선택한 여자, 제가 지킬 겁니다
2022.07.13.
진현은 장례식장에서 할아버지가 김 실장과 오 여사를 대동하고 집을 나섰다는 보고를 받았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보고를 한 사람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그가 매수해 놓은 할아버지의 운전기사였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어제 형목을 통해 할아버지가 병원과 회사 이외의 장소에 가시는 경우 바로 연락하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오늘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장 장례식장을 나온 진현은 집으로 출발하면서 선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가실 테니 집에 없는 척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선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하가 마침 샤워 중이었고, 파우더 룸을 나와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느라 제 부재중 전화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고, 할아버지의 기습 전화와 방문에 당황해서 휴대 전화를 인터폰 아래 콘솔에 올려 두었다는 건 당연히 알지 못했다.
진동으로 해 놓은 탓에 전화가 온 줄 모르고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차의 속도를 올렸다.
잘하면 할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아쉽게도 한발 늦고 말았다.
선하가 어깨를 둥글게 말고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진현의 관자놀이와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너무 많이 봐서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음식에 간이 안 맞는다고, 할아버지가 아끼는 난이 죽었다고, 어머니가 무릎 꿇어야 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사소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실 한복판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때마다 오 여사가 조롱하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오늘처럼.
아버지는 마음 아파하면서 방관했다.
언제나.
소파에 왕처럼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그 곁에 서서 선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김 실장과 오 여사가 그의 분노를 배가시켰다.
“일어나.”
진현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선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선하 곁에 앉았다.
“그대로 둬라.”
그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방에 들어가 있어.”
“…….”
그를 올려다보는 선하의 눈빛에는 ‘전 괜찮으니까 할아버님께 맞서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다른 이유로 할아버지와 맞서는 거라면 몰라도, 그 이유가 자신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내 말 들어.”
선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뗐다.
한 걸음 내딛던 발이 멈칫했다.
딱딱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느라 뻣뻣해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은 탓이었다.
다시 한번 걸어보려는데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진현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들어가자.”
혼자 걸을 수 있다고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제 두 다리를 원망했을 뿐이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로 걸어가던 도중, 선하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 방에 있을 테니까 할아버님께 가 보세요.”
“그래.”
진현은 선하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뒤돌아 거실로 향했다.
이미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분노 대신 차가운 혐오가 담겨 있었다.
“저한테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뭡니까.”
“네가 선하 부르지 말라고 해서 직접 만나러 왔다.”
“굳이 제가 집에 없을 때를 골라서요?”
“네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최 회장님 별세 소식은 당연히 들으셨을 테고, 정호가 제 친한 친구인 것도 아시는 분께서 제가 조문 간다는 걸 모르셨을 리가요.”
서 회장은 구태여 입 아프게 부인하지 않았다.
진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아주 정확했다.
진현이 옆에 있으면 제대로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방해할 게 분명해서 선하가 혼자 있을 만한 때를 골라 찾아온 것이었다.
집에 없는 척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부터 하고 초인종을 눌렀고.
계산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넌 어떻게 온 거냐. 적어도 자정 넘어까지 빈소에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 있을 선하가 걱정돼서 빨리 왔습니다.”
진현은 정보원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제가 벌인 일이라고 충분히 말씀드렸고 이미 알고 계시면서 선하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잘못했다는 말을 들으려고 했을 뿐이다.”
“잘못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저한테 못 한 화풀이를 하고 싶으신 게 더 컸겠죠.”
진현은 서 회장의 저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진현이 말했던 대로, 서 회장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이 많이 빠진 게 사실이었다.
날이 갈수록 손자를 상대하는 게 버거워졌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진현 대신 비난의 대상을 선하로 바꾼 것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비는 모습이라도 보지 않으면 화병으로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선하는 만만하니까. 모욕을 줘도 대들지 못할 테니까.”
“…….”
“어머니처럼.”
진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전 아버지와 다릅니다. 제가 선택한 여자, 제가 지킬 겁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제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시면 저 할아버지 다시는 안 봅니다.”
서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싹싹 빌어도 용서해 줄까 말깐데 어디서 협박질이야!”
“협박이 아니라 예고죠. 경고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내 재산을 네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해도 과연 그런 말이 나올지 모르겠구나.”
진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뜻에 따라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고, 아직도 그 협박이 먹힌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유산이 간절해서가 아니라 그땐 제게 결혼이라는 게 그만큼 대수롭지 않았을 뿐입니다.”
“…….”
“그깟 돈 필요 없으니까 사회에 환원하시든 돌아가실 때 싸 가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진현은 서한수 회장의 손주 자리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서한수 회장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아버지와는 달랐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유산 중 SEO 자산운용 주식은 임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증여하고, 나머지 재산은 할아버지의 협박대로 사회에 환원할 계획이었다.
할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오 여사와 김 실장까지 가장 끔찍해할 만한 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한 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 사람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선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한 가지는 알고 계시기를 바랐다.
“마음대로 하시되, 저랑 주은이 말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제삿날 챙길 사람이 누가 있을지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
서 회장의 눈빛이 티 나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그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지금이야 김 실장이나 오 여사가 손주들보다 더 살뜰하지만, 그게 과연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이어질는지는 의문이었다.
한몫 거하게 떼어 준다 한들 피붙이보다 나을까 싶었다.
손자와 손녀 모두 곰살맞지는 않아도 제 사후에 나 몰라라 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었다.
서 회장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 실장과 오 여사가 동시에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든 서 회장을 구워삶아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 애쓰고 있던 두 사람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현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건조한 시선이 김 실장에게 향했다.
“할아버지 모시고 그만 가세요.”
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 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현에게 묵례한 김 실장과 오 여사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서 회장을 따랐다.
진현은 제자리에서 서서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그제야 침실로 갔다.
침실 문을 열자마자,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선하가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님은 가셨어요?”
“어.”
진현은 선하를 도로 침대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손을 올리거나 뭘 집어던지거나 하시지는 않았어?”
무릎 꿇는 것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선하의 얼굴에 긴장감이 배어났다.
“아, 아니요…….”
“무릎 꿇으라고 시킨 거 오은향 그 여자지?”
고개를 끄덕인 선하가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어머니한테도 그랬거든.”
“…….”
선하는 오 여사가 그의 어머니를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건 주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비로소 그가 왜 오 여사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지 완벽히 이해했다.
그가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감싸고도는 이유가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도 짐작이 갔다.
“난 내 아내가 내게 아무것도 아닌 그 여자한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게 싫어.”
“알았어요. 앞으로는 진현 씨가 걱정하시는 일 없게 할게요.”
진현은 선하를 품에 안고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정말 미안해. 주은이에, 할아버지까지…….”
“주은 언니도, 할아버님도, 저한테 실망하신 게 당연해요.”
“왜 다들 나보다 너한테 더 뭐라고 하는 건데.”
“애정이 컸던 만큼 실망도 큰 게 아닐까요?”
“나한테는 애정도 기대도 없어서 실망할 것도 없다?”
진현의 품을 빠져나온 선하가 눈초리가 가늘어진 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죠.”
“반박할 수가 없네…….”
선하는 짐짓 탄식하는 척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위로했다.
“전 진현 씨한테 애정도 있고, 기대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난 다른 사람 애정은 필요 없어. 너 하나로 충분해.”
“…….”
분위기 환기를 위해 장난스럽게 시작한 말에 진현이 진지하게 화답하자, 선하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피곤하지?”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너무너무 피곤해요.”
남편 때문에 육체적으로 피곤했고, 시누이와 시조부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여러모로 무척이나 피곤한 하루였다.
“오늘은 안 괴롭힐 테니까 빨리 자.”
“네, 저 먼저 누울게요.”
“그래. 씻고 올게.”
진현은 선하가 눕는 것을 보고서 침실을 나왔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침실로 가던 그의 귀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인터폰 아래에 선하의 휴대 전화가 놓여 있었다.
“여기 뒀으니 내 전화를 못 받았지.”
휴대 전화로 다가간 진현이 미간을 좁혔다.
화면에 ‘최고의 투수 세혁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