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불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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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불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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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불안감
2022.10.12.
골똘한 생각에 빠진 비서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급하게 어딜 가신 거지?’
전무실로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보스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들어온 소문과 제가 직접 경험하고 내린 결론은 일치했다.
서진현 전무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그를 대표하는 두 단어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냉정’과 ‘고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대체 투자 본부 인턴사원과 대면하자마자 전무실을 달려 나갔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점점 늘어갔다.
‘인턴이 무슨 얘기를 한 걸까?’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건 깜빡거리고 있는 사내 메신저 대화창을 인식한 순간이었다.
상대는, 친하게 지내는 경영지원실 홍 대리였다.
<그 여자 누구야?>
난데없이 그 여자가 누구냐니.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 위해 양손을 키보드에 올린 것과 동시에 전무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행방이 궁금했던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 여자와 함께.
그것도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손깍지를 낀 채로.
홍 대리가 물은 ‘그 여자’가 이 여자구나, 대번에 감이 왔다.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린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도 들이지 말고, 전화 연결도 하지 말아요.”
“아, 네. 전무님…….”
비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난 데 없이 부드러운 인상에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한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은 아니지만, 은은하게 예쁜 타입이라고나 할까.
외모 평가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사원증이 눈에 들어왔다.
의문이 배가되었다.
‘누구지?’
집무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눈으로 좇던 그녀는 집무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미 모니터 화면에는 사내 메신저 대화창이 여러 개 떠 있었다.
모두 다 같은 내용이었다.
***
집무실로 들어온 진현은 선하를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히고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따뜻한 차 한 잔 가져오라고 할까?”
“괜찮아요.”
그는 더 권하지 않고 선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 잡아먹을 사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참담했을까.
제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 같아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김 실장이 한 말, 신경 쓰는 거 아니지?”
선하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진현 씨, 혹시 우리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통사고 난 적 있었어요?”
“그 사고가 이렇게 연결되나?”
찌푸린 미간에 김 실장을 향한 짜증이 묻어났다.
“맞구나…….”
선하가 들릴 듯 말 듯 가냘프게 중얼거렸다.
김 실장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진현의 입으로 확인 받고 나니 맥이 쭉 빠졌다.
“가벼운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겨우 갈비뼈 골절이었어.”
“어떻게 갈비뼈 골절이 겨우예요.”
“내가 너랑 결혼해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
선하는 차마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보같이 그런 헛소리를 믿어?”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정말 저랑 결혼한 후에 진현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으니까…….”
진현은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들어 올렸다.
“나 봐.”
굳건한 눈빛과 흔들리는 눈빛이 마주쳤다.
“그런 개소리 믿지 마. 사주, 궁합, 나 그딴 거 안 믿어.”
“저도 원래 안 믿었어요.”
2년 전 그와 제 궁합이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이 훨씬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니까.
“그 사고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너랑 결혼한 덕분에 갈비뼈 골절로 끝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
“생각하기 나름이야.”
진현은 선하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버린 불안감을 밀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 요즘 네가 있어서 잠도 잘 자고, 그래서 잘 먹고, 컨디션 최상이야. 네가 날 살게 하는 거라고.”
그는 죽을 때까지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꺼냈다.
“사실 우리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아니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너랑 같은 말을 들으셨어.”
“조금 전에 알았어요. 어머님하고 저하고 똑같은 사주라고…….”
“그런 거 믿지도 않지만, 만약 어머니와 네 사주가 정말 같다고 해도 난 절대 널 우리 어머니처럼 살게 하지는 않을 거야.”
“…….”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다 무시하고 내 말만 들어.”
선하는 간절한 그의 눈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부정적으로만 해석하려 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그럴 거예요.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약속해 놓고 너 이 사람 말, 저 사람 말, 다 듣잖아. 이 팔랑귀야.”
진현에게 볼을 꼬집힌 선하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불쌍한 척을 했다.
“다른 사람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유연한 성격이라고 해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선하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저 그만 갈래요.”
진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삐쳤어?”
선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삐치긴 왜 삐쳐요. 진현 씨 말이 다 맞는데. 회의 있어서 가 봐야 해요.”
“같이 가.”
선하는 몸을 일으키는 그를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딜요?”
“회의실.”
“같이 가서 뭐 하시게요?”
“글쎄? 뭘 하는 게 좋을까?”
“제 남편이라고 소개하실 거예요, 아니면 제 옆에 계실 거예요?”
“둘 다. 네 남편이라고 소개한 뒤에 네 옆에 있으면 되겠다.”
비꼰 말을 덥석 받을 줄이야.
“둘 다 거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선하가 딱 잘라 말했다.
“너 혼자 어떻게 보내라고.”
“제가 무슨 애예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어요. 그게 오늘일 뿐이고요.”
“괜찮겠어?”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왜 일을 크게 벌이셨어요.”
진현은 샐쭉거리는 입을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네가 김 실장한테 불려갔다는 얘기 듣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아, 맞다.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네 동기가 날 찾아왔었어.”
“승욱 씨가요?”
“어.”
선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승욱의 목적을 알 것 같아서였다.
“내가 걱정돼서 온 게 아니라 진현 씨한테 예쁨 받으러 온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이제 예뻐해 줄까 해.”
승욱이 아니었다면 김 실장이 선하에게 어떤 망언을 지껄였는지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테니.
선하가 제게 말도 못 하고 속을 끙끙 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승욱에게 더 고마웠다.
“싫어요. 다른 사람 예뻐하지 마세요.”
진현은 질투하는 아내의 턱을 잡고 눈을 맞췄다.
“너만 예뻐해 달라고?”
“네.”
“그냥 해 본 말이었어. 내가 너 말고 누굴 예뻐해.”
뾰로통했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저 정말 가요.”
“회의실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안 돼?”
“안 돼요.”
두 사람은 오늘 서로 안 된다고 하기 바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다들 저만 쳐다봤잖아요.”
“네가 예뻐서 쳐다본 거지.”
곱게 눈을 흘긴 선하는 여전히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진현의 손을 떼어내고 손끝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따라 나오지 마세요.”
“알았어. 걱정되니까 내려가서 연락해.”
진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버티는 선하가 대견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제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걸까 봐.
그러다 단번에 무너져 내릴까 봐.
선하와는 다른 의미로, 그 역시도 불안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
김 실장 방에서 벌어진 일은 삽시간에 회사 전체를 뒤덮었다.
직원들은 서진현 전무와 백선하 인턴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둘이 부부일 거라는 주장과 바람이 난 거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 준 건 승욱이었다.
“두 분, 부부 맞아요.”
마치 두 사람과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처럼 아주 의기양양하게.
선하가 대체 투자 본부에 도착한 건 모두의 의문이 해소되고 난 뒤였다.
조심스럽게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인 그녀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모였다.
승욱이 잽싸게 다가와 속삭였다.
“별일 없으셨어요?”
선하도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회의실에 아무도 없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회의 시간이 다 되어서 회의실로 곧장 갔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회의 취소됐어요.”
선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때문에요?”
“아니요. 본부장님이 개인적인 일로 일찍 퇴근하셔서 다음 주로 미뤘어요.”
“아…….”
그 순간, 한 팀장이 다가왔다.
“선하 씨, 나 잠깐 봐.”
선하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먼저 사무실을 나가는 한 팀장을 전전긍긍하며 뒤따랐다.
두 사람은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한 팀장의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선하가 얼른 선수를 쳤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팀장님.”
“왜 사람 차별해?”
“차별……이요……?”
“모두에게 숨긴 거라면 몰라도, 승욱 씨한테만 말해 주고 나한테는 말 안 해 주고. 나 좀 섭섭해.”
“승욱 씨한테도 제가 자발적으로 밝힌 거 아니에요. 들킨 거예요, 들킨 거.”
선하는 승욱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한 팀장이 커진 눈을 깜빡거렸다.
“결론은 나 때문이라는 거네? 내가 선하 씨 데리러 온 전무님 못 가시게 잡아서?”
“네, 팀장님 때문에 들킨 거예요.”
“내가 섭섭해하면 안 되는 거구나?”
“네, 절대 안 돼요.”
“알았어. 섭섭해하지 않을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선하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내가 선하 씨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대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지? 특혜 바라지 마.”
“그런 거 바랐으면 SEO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팀장님.”
“그럼 됐어.”
한 팀장은 의례적인 다짐을 받아 두고 곧바로 본심을 드러냈다.
“와…… 투자업계에 몸담고 있다는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오늘에서야 비로소 주은의 이상 행동도 이해가 갔다.
“같은 곳을 보고, 같은 일을 하고 싶은 상대를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부럽다.”
“…….”
선하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아련했던 한 팀장의 표정이 이내 떨떠름해졌다.
“난 집에서도 보는 남편, 회사에서까지 보라고 하면 당장 퇴사할 거야. 오, 절대 싫어.”
한 팀장은 난데없이 어제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시작했고, 선하는 한참을 그녀의 푸념 상대가 되어 줘야 했다.
***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대체 투자 본부에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바로 진현이었다.
“퇴근들 하시죠.”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모두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