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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사고 (76/100)


76화. 사고
2022.10.23.



 
선하는 주은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왔다.

무슨 정신으로 집을 나와 운전을 하고 병원까지 왔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새하얬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날보다 더 악몽 같은 날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이 훨씬 더 끔찍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주은과 형목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손이 제멋대로 벌벌 떨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언……니…….”

주은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선하의 파리한 얼굴을 보고 얼른 침통한 표정을 감췄다.


“왔어?”

“…….”

선하는 두 다리가 바닥에 붙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비로소 실감 난 탓이었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끌어올린 그녀는 어느새 제 앞에 다가와 있는 주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트럭이 역주행하면서 오빠 차를 덮쳤대.”

“…….”

정신이 아득해진 선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처참한 광경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사고가 날 당시, 진현과 형목이 통화 중이었다는 주은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간하고 비장이 파열돼서 복강 내 출혈이 있대. 지금 응급 수술 중이야.”

간과 비장 파열.

복강 내 출혈.

무시무시한 말들이 가슴을 후벼 팠다.


“진현 씨 괜찮겠죠? 별일 없겠죠?”

제발 괜찮을 거라고,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해 주세요.

주은의 손을 부여잡고 대답을 갈구하는 선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주은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제 걱정과 불안은 내색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 당연히 괜찮지. 우리 오빠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야.”

형목이 한마디 거들었다.


“별일 없습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두 사람은 일말의 의구심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말로 선하를 안심시켰다.


“오빠 금방 나올 거야. 앉아서 기다리자.”

주은은 선하를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의자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은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하며 기다렸다.

저마다 힘겨운 시간이었다.

서 회장이 나타난 건 수술이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김 실장과 오 여사도 함께였다.


“오시지 말라니까…….”

주은이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오빠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녀는 가장 먼저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와 이 병원의 이사장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서였다.

할아버지가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준 덕분에 각 과의 베테랑들이 달려와 수술방으로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행차하시는 건 바라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게냐.”

주은의 예상대로, 선하를 향한 서 회장의 눈에는 노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진현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데. 이혼 안 하고 버티더니 기어이 이런 꼴을 보게 하는구나.”

말없이 입술만 꾹 깨물고 있던 선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전 진현 씨 사고가 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편 잡아먹을 사주’라는 말을 곱씹고 있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일 리가 없어.

서 회장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선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결혼한 뒤 두 번째 사고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는데도 네 탓이 아니라고?”

그 순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주은이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사주는 어떻대요?”

서 회장이 주은에게 시선을 옮겼다.

찌푸린 미간은 왜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의미였다.


“할아버지가 신처럼 떠받드는 무당 영감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오빠까지 죽을 뻔한 거 아니냐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 맞다. 할머니도요.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도 할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신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다 죽나 봐요. 저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섭네요.”

주은은 서 회장의 서늘한 표정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화나시죠? 억울하시죠?”

작정한 듯 비아냥거리던 어조가 일순간 착 가라앉았다.


“지금 선하가 그럴 거예요. 우리 엄마가 그랬을 거고요.”

서 회장의 주름진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못된 것…….”

“돌팔이 무당 영감 말만 믿고 애꿎은 사람 잡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 할아버지보다 오빠 걱정 덜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

서 회장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돌아섰다.

주은은 세 사람이 시야를 벗어나고 나서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선하의 손을 잡아당겼다.


“앉아.”

선하는 저를 위해 할아버지에게 맞서준 주은이 고마워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감사해요, 언니.”

“오빠가 자기 없을 때 너 잘 지켜달라고 했어.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네…….”

세 사람에게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수술은 다섯 시간 만에 끝이 났고, 진현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선하와 주은, 형목도 중환자실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각은 새벽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여긴 제가 있을 테니까 두 분은 그만 들어가세요.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선하의 표정은 이제 제법 담담했다.


“넌 어쩌려고?”

“전 진현 씨 옆에 있어야죠. 조금 이따가 한 팀장님께 전화해서 사정 말씀드리려고요.”

“그래. 그럼 우리는 퇴근하고 올게.”

선하의 등을 토닥여 준 주은은 형목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선하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텅 빈 복도에 감도는 한기가 살갗에 스며들었다.

몸도 마음도 공허하고 외로운 날이었다.

***

진현은 수술한 지 나흘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선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애틋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동안 부쩍 야윈 그녀가 가슴이 저릿할 만큼 안쓰러웠다.

비록 아직은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중환자실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고작 10분뿐인 중환자실 면회를 경험하고 나니 미치게 그리웠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왜 이렇게 말랐어.”

진현이 팔을 들어 올리자, 선하는 얼른 허리를 숙여 그의 손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가뜩이나 힘든 그녀에게 제 몫까지 더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진현 씨 잘못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선하는 오늘에서야 그간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런 걱정을 왜 해. 나 너 두고 안 죽어.”

“그럼 다치지도 마셨어야죠.”

“그러게. 다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진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선하야.”

“네.”

“할아버지 다녀가셨어?”

“네…….”

“내 사고, 너 때문이라고 하셨고?”

“…….”

선하는 말없이 그의 눈을 피했다.

진현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난 너 때문에 다친 게 아니라 네 덕분에 살아 있는 거야.”

“…….”

정말 나 때문인 거면 어쩌지?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선하는 비관적인 생각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떨쳐 버리려고 할수록 점점 더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 안아 보자.”

선하는 진현이 무리해서 움직일까 봐 허리를 더 숙여 그에게 안겼다.

그토록 기다려 온 순간이건만, 그녀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

선하는 주은과 형목에게 진현을 맡기고 병실을 나왔다.

집에 가서 옷가지 등을 챙겨오기 위해서였다.

진현이 퇴원할 때까지 병실에서 함께 지낼 작정이었다.

터덜터덜 복도를 걷는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두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속이 비어서인지 연신 메슥거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일을 연달아 겪은 탓일까.

마치 모든 것이 고갈되고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손에 들고 있던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선하는 화면에 떠 있는 아빠라는 두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그녀의 목소리는 바스러져 공기 중에 흩날릴 것처럼 퍼석했다.


[월요일에 최종 부도 처리가 될 거다.]

“네.”

[아직 늦지 않았다. 네가 서 회장한테…….]

“아빠, 진현 씨가 다쳤어요.”

[다쳐?]

“여러 날 중환자실에 있다가 오늘 일반 병실로 옮겼어요. 그래서 저 지금 많이 힘들어요.”

[…….]

“끊을게요…….”

선하는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탄 순간,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오빠’였다.

망설이던 것도 잠시, 앙상한 손가락이 통화 버튼으로 향했다.


“응, 오빠.”

[난데…….]

“오빠인 거 알아. 말해.”

[그게…….]

“혹시 아빠가 나한테 전화해 보래?”

[어.]

“오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라.”

[…….]

“부탁이야.”

어색한 정적이 지나간 뒤, 후회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끊는다.]

휴대 전화를 귀에서 뗀 선하는 지친 표정으로 핸들에 머리를 묻었다.

***

김 실장은 서 회장이 잠자리에 든 것을 확인하고 오 여사의 방으로 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 여사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선하, 떨어져 나갈 기미가 안 보여?”

김 실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독해.”

선하의 사주뿐만 아니라 진현의 교통사고도 김 실장과 오 여사가 합심해서 꾸민 짓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 진현에 대한 김 실장의 적의는 최고조에 달했다.

팔이 안으로 굽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서 회장이 이렇게까지 단칼에 자신을 쳐 낼 줄은 미처 알지 못했기에 배신감이 더 컸다.

공들여 온 세월이 아까워서 더럽고 치사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김 실장이 원하는 건 경영지원실장 자리가 아니었다. 부사장 자리도 아니었다.

그는 서 회장의 모든 것을 원했다.

언젠가부터 회사도, 재산도, 다 제 것으로 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진현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놈만 없으면 내가 회사를 차지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그래서 조손 사이를 갈라놓기로 마음먹었다.

하늘이 도운 건지 기회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다.

백선하가 혼외자일 줄이야.

혹시라도 서 회장의 마음이 약해질까 봐 선하에게 남편 잡아먹을 사주라는 꼬리표까지 붙였다.

오 여사가 30년도 더 전에 써먹었던 방법으로 서 회장이 죽어도 백선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건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답답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오 여사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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