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안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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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안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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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안 할 거니까
2022.11.20.

세혁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두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그가 선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차 돌려서 어디 가게?”

“진현 씨한테 가야겠어.”

“가서 뭘 어쩔 건데? 이혼,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게?”

“그러려고.”
선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빨리 진현에게 달려가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사라지기라도 했어? 달라진 게 있기는 해?”

“내 마음이 달라졌어.”
진현이 정말 제 사주 때문에 두 번이나 다쳤을 수도 있고, 순수한 사고였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지 몰랐다.
다만, 이제 더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졌을 뿐이었다.
사주팔자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두 번 다시 그런 것에 얽매여 제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 아이 때문에 이러는 거야?”

“…….”
선하는 속으로 그의 질문을 곱씹었다.
아이 때문에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게는 아이에게서 아빠를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답이 나왔다.
그 답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세혁이 선수를 쳤다.

“만약 그런 거라면 네 아이의 아빠, 내가 할게. 내가 하게 해 주라.”

“세혁아.”

“나 너 좋아해.”

“나는.”

“잠깐만.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마.”
다급하게 선하의 말을 막은 그는 휴대 전화를 꺼내어 뭔가를 찾은 다음,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너희 회사에 찾아갔던 날 했던 인터뷰 기사야.”
선하는 세혁이 건네준 휴대 전화를 받아서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부분을 읽었다.
부상 여부와 관계없이 메이저 리그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에 돌아왔냐는 기자의 질문이었다.
세혁의 대답은 ‘사랑하는 여자의 곁에 있고 싶어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선하가 그에게 휴대 전화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난 너 친구 이상으로 생각 안 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선하도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도 세혁이 꽃바구니를 가지고 회사에 찾아왔던 날부터였을 거였다.
“이혼을 하든 안 하든, 내 아이의 아빠는 진현 씨 한 사람뿐이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
“나한테도 기회를 주면 안 돼?”
선하는 안전벨트를 풀면서 말을 돌렸다.
“나 택시 타고 갈게. 오늘 고마웠어.”
세혁이 오른쪽으로 몸을 트는 그녀의 왼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고작 기회 한번 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난 너희 부모님한테까지 잘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아파. 놔.”
선하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그것도 운동선수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내가 너 때문에 쓴 돈이 자그마치 2억이야. 알기나 해?”
어이없게도, 세혁은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쓴 돈까지 선하를 위해 쓴 돈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혹시 아빠가 너한테 돈 얘기 하셨어?”
“그래.”
선하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난 모르는 일이야. 나한테 생색내지 말고 아빠랑 얘기해.”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내린 선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
같은 시각.
시끄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소파에 누워 있던 진현을 일으켜 세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인터폰 앞으로 걸어가 보니, 화면에 예경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예경이 찾아온 게 반가울 리 없었다.
[문부터 열어.]
“무슨 일이냐고.”
[주은이 부탁 받고 온 거니까 문 열어, 얼른.]
진현은 주은의 이름을 듣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짜증을 내며 나가더니 집이 아니라 예경의 병원으로 간 모양이었다. 물론 예경을 찾아간 이유도 짐작이 갔다.
제가 원한 건 아니어도 동생이 한 짓이니 예경을 문전박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지치고 힘든 날, 반갑지도 않은 사람까지 만나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 준 진현은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 놓은 채로 벽에 기대어 예경을 기다렸다.
잠시 후, 예경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잠을 통 못 잔다며.”
“어.”
“약 가져왔어. 네 상태 봐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온 거고.”
예경이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20년 넘게 봐 왔지만, 이렇게 상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주은이는?”
“같이 안 왔어. 시키지도 않는 짓 했다고 네가 욕할 거라면서 같이 못 온대.”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진현이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거야?”
“약 가져왔으면 약만 주고 가.”
“서진현, 걱정돼서 달려온 사람한테 정말 이럴 거야?”
잠시 고민하던 그가 몸을 돌렸다.
“들어와.”
그는 지금 간절하게 자고 싶었다.
거의 24시간을 깨어 있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은 선하의 연락이나 선하를 찾았다는 연락을 기다리느라 안 자고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계였다.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진현이 지난 일주일 동안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이유는 언제든 달려 나가기 위해서였다.
술을 마시면 운전을 할 수 없으니까.
이제 기다릴 연락이 없어졌다. 달려 나가야 할 일도 없었다.
술의 힘을 빌리면 수면제 없이도 잘 수 있을 것 같지만, 술을 마실 마음은 없었다.
취해서 선하에게 전화를 걸까 봐. 전화를 걸어서 질척거릴까 봐.
더는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진현이 수면제를 필요로 하는 이유였고, 예경을 들어오라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처방해 준 약, 어땠어? 효과 있었어?”
예경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
“먹어 본 적 없어서 몰라. 버렸어.”
“왜? 두 번 다시 수면제가 필요할 일이 없을 줄 알았어?”
“어.”
“나한테 오기는 싫고, 다른 병원 뚫는 것도 싫어서 그냥 버틴 거야?”
“어.”
진현은 빈정거리는 듯한 예경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부엌으로 갔다.
그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오는 동안, 예경은 가방 안에서 약을 꺼냈다.
“네가 버렸다는 약이랑 같은 거야. 일단 이거 먹어 봐.”
진현은 말없이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맙다. 가라.”
“너 잠드는 거 보고 갈게.”
“그럴 필요 없어.”
“만약 효과 없으면 주려고 다른 약도 가져왔어.”
“두고 가. 효과 없으면 먹을 테니까.”
예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부엌을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백선하 씨랑 헤어졌어? 이혼하기로 한 거야?”
“…….”
그는 잠시 멈칫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아니면 아니라고 했겠지.
예경은 침실로 추정되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를 뒤에서 지켜보았다.
10분쯤 있다가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거실을 한 바퀴 훑어본 그녀는 집 안 여기저기를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드레스 룸에도 들어가 보았다. 예상대로, 여자 옷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진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는 그녀로서는 두 사람이 왜 갑자기 파경을 맞았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무척이나 통쾌했다.
진현이 이제 다시 자신을 찾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성격에 다른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리 없을 테니.
예경은 처음 와 본 진현의 집을 꼼꼼히 구경하고 침실로 갔다.
굳게 닫힌 문을 살짝 열어 보니 진현이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덕분에 그의 얼굴이 잘 보였다.
‘잠들었나 보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둔 가방을 챙겨서 현관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가방 안에 들어 있던 휴대 전화를 꺼내어 보니 부재중 전화 두 통과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모두 주은이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손이 멈칫한 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둘 다 전화를 안 받네. 오빠 아직 약 안 먹었으면 먹이지 마. 선하 지금 집으로 가고 있대.>
예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조금 열렸던 문을 도로 닫았다.
***
선하는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섰다.
마음이 급해서 현관에 놓인 낯선 여자 구두는 보지 못했다.
텅 빈 거실을 지나쳐 침실로 간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침대에 누워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진현과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예경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것도 잠시, 선하는 뒷걸음질로 침실을 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창백해진 얼굴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늦었다는 생각뿐이었다.
진현이 홧김에 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예경을 받아들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여자를 부부 침실에 들이고 저와 수많은 밤을 보낸 침대에 앉힐 리 없을 테니까.
현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선하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제가 아는 서진현은 그렇게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간절하게 자신을 붙잡던 남자가 벌써 다른 여자를 곁에 뒀을 리 없었다.
그의 입으로 듣기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은 선하는 뒤돌아 다시 침실로 갔다.
예경이 침실을 나오면서 문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두 여자가 침실 문 앞에서 마주 섰다.
선하가 먼저 말문을 뗐다.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예경의 대답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왔어요.”
거짓말은 아니지만,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처방해주는 수면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주려고 직접’ 왔어요, 라고 말했어야 했다.
수면제가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 진현이 아니라 주은이었다는 것도.
“백선하 씨야말로 여기서 뭐 해요? 두 사람, 이혼하기로 한 거 아닌가?”
“…….”
예경은 마치 진현에게 들은 것처럼 제 짐작을 떠보았고, 선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진현이 간신히 재웠어요. 깨기 전에 그만 가요.”
짧은 침묵이 지나고, 선하의 입술이 열렸다.
“그만 가야 할 사람은 나예경 씨 아닌가요?”
예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굴 보고 가라 마라야. 백선하 씨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있죠.”
선하가 나직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 이혼 안 했으니까.”
“…….”
“안 할 거니까.”
“…….”
“그만 이 집에서 나가 주세요.”
말문이 막힌 예경을 직시하는 선하의 눈빛은 고요하면서도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