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우리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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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우리 아이
2022.11.27.

이번에는 진현이 조금은 민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위해 운을 뗐다.

“나도 쪼잔한 질문 하나 해도 돼?”
선하는 빙긋 웃으면서 조금 전 그의 말을 살짝 변형했다.

“웅장한 질문도 괜찮아요.”
진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줄도 모르고.

“강세혁이랑 산부인과 같이 갔던 거야? 강세혁이 아이 아빠인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쳤나 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둘이 병원에 같이 있었잖아.”
선하는 그제야 진현이 오해하기 충분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병원에서 임신 사실을 들켰고, 하필이면 세혁과 함께 있었으니 그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산부인과는 다른 병원이에요. 혼자 갔어요. 진현 씨랑 만난 병원은 응급실 때문에 간 거고요.”
“응급실?”
“쓰러져서 그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쓰러졌어?”
선하는 걱정으로 안색이 어두워진 진현에게 세혁을 어디에서 만났으며 응급실에 어떻게 가게 됐는지 소상히 털어놓았다.
“하루에 우연이 두 번씩이나 생기고, 신기하죠?”
“나랑은 우연 아니야. 난 네가 그 병원에 있다는 거 알고 달려갔으니까.”
선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고요?”
“카드 결제 문자에 찍힌 병원 이름 보고.”
“카드 결제 문자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선하가 갑자기 멈칫했다.
“아!”
진현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탄성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챘다.
“네가 쓴 게 아닌가 본데?”
“진현 씨 신용 카드를 안 두고 갔다는 게 지금 생각났어요. 세혁이가 그 카드로 결제했나 봐요.”
“강세혁이?”
“병원에서 수납하라는데 지갑이 없더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제 카드로 결제했다고 하더라고요.”
“휴대폰까지 끄고 숨어 버린 네가 내 카드를 쓸 리가 없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제 지갑에 들어 있으니까 당연히 제 카드인 줄 알았겠죠. 카드에 새겨져 있는 이름까지 확인해 볼 생각은 못 했을 거예요.”
우연인 줄 알았던 상황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선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세혁이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우릴 만나게 해 준 일등 공신이네요.”
“일등 공신은 무슨. 내가 미친 듯이 달려갔으니까 만난 거지, 조금만 늦었어도 엇갈렸어.”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세혁 덕분에 선하와 재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진현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깃장을 놓았다.
“맞아요. 진현 씨 공이 제일 커요.”
선하도 그냥 해 본 말이었을 뿐 정말 세혁에게 고마운 건 아니었다.
2억 운운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빠에게 또 한 번 실망한 건 덤이었다.
“아 참, 그동안 어디 있었어?”
일주일 만에 만난 만큼 진현은 궁금한 게 많았다.
“서울 외곽에 있는 호텔에요.”
“병원에서 강세혁이랑 같이 있는 거 보고 그동안 강세혁 집에서 지낸 줄 알았어.”
“세혁이한테 그런 신세를 왜 져요.”
딱 잘라 말한 선하에게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강세혁이 너 좋아하는 거 알아?”
선하는 그제야 진현이 세혁을 ‘강세혁 선수’가 아닌 ‘강세혁’으로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네, 알아요.”
담담한 대답 뒤, 선하의 입에서 같은 질문이 나왔다.
“나예경 씨가 진현 씨 좋아하는 건 아세요?”
“어, 알아. 언젠가부터 알게 됐어.”
“그 언젠가가 언젠데요?”
“예경이가 너한테 지나치게 날 세운다는 걸 느꼈을 때.”
진현도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강세혁이 너 좋아하는 건 언제 알았어?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잖아.”
“세혁이가 진현 씨를 적대시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요. 근데 저도 몰랐던 걸 진현 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같은 남자가 보면 알지. 처음 만난 날 바로 알았어.”
“처음 만난 날이면…… JFK 공항이요?”
“어.”
“왜 난 몰랐지?”
“너 상당히 둔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선하의 콧등에 주름이 잡힌 건 그에게 듣기 억울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진현 씨도 나예경 씨가 자기 좋아하는 거 몰랐으면서.”
사돈 남 말 하시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예경이는 티 낸 적 없어.”
“티 냈는데 못 알아차린 건 아니고요?”
“관심이 없으면 못 알아차릴 수도 있지.”
“같은 상황인데 왜 전 둔한 거고, 진현 씨는 무관심한 거예요?”
진현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 슬며시 화제를 바꿨다.
“응급실까지 갔던 사람을 붙잡고 이럴 때가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선하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들어가서 눕자.”
선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그런데 맞잡은 손이 곧바로 떨어졌다.
“아, 깜빡했다.”
“뭘요?”
“침대 시트 갈 동안 여기 좀 있어.”
“갑자기 침대 시트는 왜요?”
선하의 눈에 의문이 점점 더 짙어졌다.
“예경이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면서.”
“네.”
“침대에 앉았다는 거잖아. 다른 사람이 우리 침대에 앉았던 거 찝찝해.”
“전 괜찮아요.”
“난 안 괜찮아. 잠깐 기다려.”
“…….”
선하는 침실로 걸어가는 진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음 편한 시간이 얼마 만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할 만큼 행복했다.
눈물을 글썽이던 것도 잠시, 할 일을 떠올린 그녀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
씻고 나와 드레스 룸으로 간 선하는 샤워 가운을 벗고 진현의 티셔츠로 갈아입은 다음 침실로 향했다.
진현은 침실에 없었다.
‘어디 간 거지?’
그 순간, 조용한 가운데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안심한 그녀는 침실 한가운데에 서서 방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다시는 올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고작 일주일 만인데도 한 달은 훌쩍 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개무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혼란스럽고 어수선했던 마음이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했다.
어떤 위기가 찾아온다고 해도 이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자신이 생겼다.
선하가 익숙한 공간에서 충만한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던 그때, 진현이 욕실에서 나왔다.
“시트 다 갈고 나가 보니까 너 씻으러 들어갔더라고. 그래서 나도 씻었어.”
선하의 얼굴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진현 씨 옷 좀 빌렸어요.”
제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있는 그녀를 보니 새삼 선하와 제 체격 차이가 실감이 났다.
진현은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짐짓 언짢은 척했다.
“내 옷 입으라고 허락해 준 적 없는데? 빨리 벗어.”
그의 음흉한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선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내일 짐 가지러 호텔에 다녀와야겠어요. 입을 옷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게 누가 하나도 안 남기고 싹 챙겨 가래?”
진현은 투덜거리면서도 선하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손깍지까지 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중이었다.
“당연히 싹 챙겨 가야죠. 집 나가는 사람이 뭘 두고 가요.”
“그럼 차 키, 결혼반지, 목걸이랑 귀걸이도 가져갔어야지.”
그는 아직도 쪽지와 함께 놓여 있던 그것들을 본 순간의 허탈함을 잊지 못했다.
“진현 씨 거잖아요. 신용 카드는 깜빡한 거고.”
“그게 왜 내 거야. 너 줬으니까 네 거지.”
“알았어요. 이제 도망갈 때 꼭 챙겨 갈게요.”
헤드 보드에 등을 기대고 있던 진현이 눈을 부릅뜨며 허리를 세웠다.
“또 도망가겠다고?”
“농담이에요.”
선하가 주름진 미간을 살살 쓸어주자, 그는 금세 순한 양이 되었다.
“결혼반지는 두고 가면서 커플 반지는 왜 안 두고 갔어? 신용 카드처럼 깜빡한 거야?”
“아니요. 그건 알고 가져간 거예요.”
“왜?”
“그냥 평생 간직하고 싶었어요. 그거 말고는 진현 씨를 추억할 만한 게 없어서요. 아이가 크면 아빠가 사 준 거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고…….”
“겨우 그깟 것밖에 안 사 줬다고 우리 아이가 아빠 쩨쩨하다고 했겠네.”
선하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면서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반지, 가방에 있는데 가져올게요.”
“됐어. 내일.”
진현은 침대를 내려가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도로 앉혔다. 그러고는 조금 전 선하가 두고 간 것들을 언급하던 도중에 떠올랐던 쪽지의 내용을 화두에 올렸다.
“나 사실 네가 연락 올 거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고, 변호사 연락을 기다렸어.”
“소송 제기를 기다린 건 아닐 테고…… 왜요?”
“너한테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인데요?”
“협의 이혼 해 줄 테니까 법원에서 보자고.”
“정말 협의 이혼 해 주려고 하셨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당연히 거짓말이지.”
“…….”
거짓말을 뭐 이리 당당하게 한단 말인가.
선하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사이, 진현은 심지어 한술 더 떴다.
“만나자마자 집에 데려와서 감금하려고 했어.”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당당하지 않을 게 뭐야. 내 여자, 내가 데려오겠다는데.”
선하는 그의 의기양양한 태도가 귀여워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는 선임했어?”
“아니요. 원래는 며칠 쉬고 이혼 소송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경황이 없었어요. ”
“그 와중에 나한테는 임신한 걸 말하지 말아야겠구나, 그런 생각은 할 경황이 있었고?”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린 선하가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지, 그럼.”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진현의 입꼬리가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내일 같이 병원 가 보자.”
“오늘 갔다 왔다니까요?”
“내일 또 가면 안 돼?”
“2주 후에 정기 검진 있으니까 그때 같이 가요.”
“아직 멀었네…….”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대신, 선하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여기 우리 아이가 있다는 거지?”
“오늘 심장 소리를 들었어요. 아직 1cm도 안 되는 존재한테 심장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한 사람 몸에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도 신기해.”
“정말 그러네.”
몸을 살짝 돌린 진현이 두 눈을 빛내고 있는 선하를 마주 보았다. 그의 두 손이 선하의 두 손을 감쌌다.
“아이 안 좋아한다고 했던 거 미안해.”
“괜한 트집이었어요. 진현 씨 말대로 그 말을 하던 때는 우리 사이가 지금 같지 않았는데.”
“아니야. 내 잘못이야.”
“…….”
“내가 아무리 아이를 안 좋아해도 우리 아이는 달라. 널 닮으면 얼마나 예쁠까, 벌써 기대 돼.”
“진현 씨 닮으면요?”
“잘생겼겠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선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부인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네.”
“이미 내 부인인데 뭘 또 부인하고 싶대.”
“…….”
선하는 어이없는 말장난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고, 진현은 그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