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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은 무림 적폐 (8)화 (9/121)

8화 : 중원에서 온 공녀님 (8)

눈이 내리는 날, 제법 잘 걷고 뛰는 나는 유모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하얗게 변한 세상은 아름다웠다.

‘눈…….’

십만대산에도 눈은 내렸다.

나는 눈이 내릴 때마다 ‘빙혈수라’라는 별호를 가진 은설혜와 그 위를 걸었다. 우리는 일부러 발자국을 잔뜩 남기면서 걸어 다녔다.

무공 수련을 한답시고 겨울만 되면 얇은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눈사람이 될 때까지 파묻혀 있기도 했다.

보통은 은설혜 혼자 했지만 지나가던 자혁이 잘못 걸린 날에는 같이 묻혀 있곤 했다.

‘나도 같이 있었지.’

빙공 수련을 하자는 말에 마침 할 일도 없었겠다, 같이 눈이 두껍게 쌓인 곳에 누워서 내리는 눈을 맞곤 했다.

그렇게 서서히 눈에 파묻히고 있는데, 날 찾아다니던 환 공자가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나만 꺼내 갔다.

은설혜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 내버려 둔 거고, 자혁은 버림받은 거다.

그렇게 한참을 덜덜 떨다가 돌아오는 자혁에겐 따끈한 차를 한 잔 내어 주곤 했다. 은설혜와 놀아 주는 사람은 나와 자혁밖에 없었으므로.

뽀득-.

작은 아기의 몸무게에 짓밟힌 눈도 단말마를 내는구나.

뽀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앞으로 가는 나를 유모가 천천히 따라왔다.

나는 그대로 눈이 많은 곳을 골라 일단 바닥에 앉은 다음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가씨!”

“추어.”

이 몸은 추위를 느끼는구나.

더위도 추위도 약한 육신을 괴롭게 했다.

익숙하지 않다.

이런 건, 역시 익숙하지 않다.

‘너무 긴 시간을 강자로 살았어.’

그리하여 처음 갓난아기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불안했다.

누군가가 목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아니……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잘못 대기만 해도 질식해서 죽을 정도로 나약한 몸.

대놓고 다가오는 악의조차 피하지 못하는 아기의 몸이 너무나 불안했다.

약자는 강자를 두려워하여 힘을 기르려고 하고, 강자는 약자가 되고 싶지 않아 더욱 강해지려고 한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렸던 나는, 이곳이 중원이 아니고 나에 대해 아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따금 불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나약했던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어서.

“아가씨, 이렇게 누워 계시면 감기 걸려요.”

“시러.”

조금만 더 찬 공기를 쐬고 싶다.

나는 고집을 부렸고 유모는 잠시 후 다시 내게 말했다.

“감기에 걸리면 많이 아파요.”

“킁.”

“벌써 콧물이 나잖아요.”

나는 눈을 툭툭 털고 일어나 유모에게 팔을 뻗었다. 유모는 도톰한 겨울옷을 입은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아가씨?”

“크흥.”

어째서일까. 눈물이 났다.

저 눈을 닮은 희디흰 머리카락을 가진 이를, 나는 두 명 알고 있었다.

하나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자고 맹세했던 사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첫 친우라고 말하며 웃던 여인이었다.

이제는 자는 시간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진 나는, 내리는 눈 때문에 하얗게 변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결국 울고 말았다.

비로소 내가 다른 세상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으며, 다시는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몸이 약해져서 마음마저 약해진 건지.

유모는 펑펑 우는 나를 즉시 방으로 데려가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운 이들을 꿈에서라도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진서련’이 꿈을 꾸지 않는 것처럼, ‘베로니카’ 또한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

그날 눈밭을 바라보며 울었기 때문일까.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 살이 조금 넘은 나는 창가에 놓인 의자 위로 올라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눈은 더 내리지 않았고, 내린 눈도 녹고 있었다.

‘겨울이 짧구나.’

따뜻한 나라였던 건가.

아기로 태어나고 맞이한 첫 번째 겨울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추억은 겨울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눈물이 났던 걸까.

잃은 지 오래인 이들이 새삼스럽게도 가슴을 찔렀던 것인가.

의자 위에 올라선 나를 유모와 하녀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가 떨어질까 봐 염려하는 것 같다.

손을 짚은 창틀은 바깥의 냉기를 미세하게 품고 있어 손끝이 시려 왔다.

“베로니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오다가 만난 건지 뒤에는 바너드도 있었다.

내 이복 오라비인 그는 품에 뭔가를 잔뜩 안고 있었다.

“베로니카! 이거 가지고 같이 놀자.”

딸랑이나 나무 조각, 인형 말고 다른 놀잇감을 가져온 모양이다.

나는 창틀에서 손을 떼고 조심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혼자 의자 위로 올라갔다 내려올 줄도 알고, 대단하네.”

어머니의 말에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런 나를 어머니가 안아 들고 넓은 탁자 위로 올려 주었다.

바너드는 의자에 앉더니 탁자 위에 들고 온 것을 내려놓았다.

“이건 크레용이라고 하는 거야. 손에 안 묻으니까 너도 쓸 수 있어.”

제법 어른스럽게 가져온 물건을 설명했다.

내 앞에 흰 종이를 내려놓은 뒤 아이가 말했다.

“맘에 드는 걸 잡고 이렇게 하면 돼.”

제 앞에 놓인 종이에 빨간 꽃을 하나 그리며 바너드는 내게도 화구를 내밀었다.

낯선 이름의 화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과연, 정말 손에 묻지 않았다.

‘신기하네.’

나는 작은 손을 오므렸다 펴곤 무슨 색을 골라야 하나 잠시 탐색했다.

그림이라.

무엇을 그려야 할까?

흰 종이에 흰 칠을 해 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나는 바너드가 내려놓은 붉은 화구를 집었다.

흰 종이에 선을 그리려고 했는데 삐뚤빼뚤, 마구 헝클어졌다.

‘글도 그림도 못 하겠구나.’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손에 잡은 것이 종이에 닿아 선을 그려 내는 그 느낌이 좋아서 몇 번이고 다른 색의 화구를 집어서 종이에 칠했다.

“베로니카, 뭐 그려?”

“아?”

“이거 뭐야?”

“모라.”

나도 몰라. 손 가는 대로 선 그은 거야.

나는 선만 죽죽 그었고, 그런 내게 바너드가 꽃을 가득 그린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 칠하고 놀자.”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는 여동생을 챙긴다. 어른스럽긴.

내 손은 그 빈칸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해 마구 선 밖으로 삐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어머니가 보기엔 예뻐 보였는지 액자를 구해 방에 걸어 놓겠다고 했다.

내가 마구잡이로 선을 그은 종이조차.

‘흠…….’

갑자기 그리고 싶은 게 떠올라서 나는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눈치 빠르게도 바너드가 새 종이를 냉큼 밀어 주었다.

나는 새로 받은 흰 종이에 회색 화구를 대고 문질렀다.

그 뒤엔 흑갈색을 골라 삐죽삐죽한 원 두 개를 그렸다.

내 그림을 보고 바너드가 중얼거렸다.

“이게 뭐지…… 이게 눈인가? 귀신?”

……환 공자는 어찌하여 머리 색이 흰색이라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걸까.

내 이 손으로는 아직 그를 그리는 데에 무리가 있기에, 나는 그 옆에 대충 화구를 대고 끄적였다.

그리운 이는 많았다.

얼굴을 잊어버릴까 두려워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이들도 많았다.

내가 그들을 잊는 게 빠를까, 아니면 그들을 기억한 채 온전히 성장하는 게 빠를까?

이제 고작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한 이들도 있었고,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헤어진 이들도 있었다.

나의 과거는, 나의 이전 생은 후회뿐이었다.

“베로니카가 재미없나 봐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한 어머니가 나를 안아 의자에 앉혔다. 유모가 더운 물수건을 가져와 내 손을 닦아 주었다.

“베로니카, 아가. 우리 아가가 오늘 왜 이럴까.”

“아냐.”

“밖에 못 나가서 그러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살아생전, 아무 힘 없이 무기력한 순간은 그때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기라서 그런 걸까?

아기라서, 즐겁다가도 갑자기 슬프고 울고 싶고 울다가도 갑자기 웃는, 그런 일이 당연해진 걸까?

나는 ‘진서련’이 맞긴 한 건가?

“베로니카가 많이 졸린가 봐. 낮잠 준비를.”

“전 내일 다시 올게요. 이건 베로니카 줄게요.”

“괜찮겠니?”

“네. 저는 많이 있어요.”

나는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고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바너드와 이야기했다.

나는 애써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찌하여 갑자기 조급함을 느끼고 불안해진 걸까.

“베로니카는 자야 돼요?”

“아기는 졸리면 짜증을 내거든.”

“그렇구나. 베로니카, 나 갈게. 안녕~.”

“오빠한테 ‘안녕’ 할까?”

“……빠빠-.”

바너드는 내가 손을 흔들어 주는 것까지 보고 난 뒤 돌아갔다.

탁자에는 그 아이가 가져온 흰 종이와 화구만이 남아 있었다.

바너드가 가고 나선 아버지가 와서 나를 안아 보려고 했는데, 나는 아버지의 손을 거부했다.

“아빠. 수염. 싫어.”

“베로니카……!”

내 짧은 말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도로 나갔다.

드디어 저 수염이 싫다고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

……괜히 아버지한테 화풀이했다. 내일 미안하다고 해야지.

어머니가 나를 혼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혼내지 않고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장난스레 말했다.

“아빠 수염이 싫었구나. 후후.”

재밌어하는 것 같다. 어머니라도 즐거웠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이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아직도 다 크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진서련’이 강호초출을 했을 때가…….

그때가 몇 살이었더라?

‘비슷한 시기가 되면 집을 떠나 유람을 해야겠군.’

그럼 이 불안도 가시지 않을까.

돌아가지 못할 과거를 그리워하는 대신, 앞으로 겪게 될 미래를 떠올리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분명 우울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을 텐데, 잠에서 깨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역시 아기의 몸이 내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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