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집안 꼴 잘 돌아간다 (3)
다음 날 아침.
어제 저녁에 그 사달이 났음에도 나와 어머니는 아침 식사 자리에 나왔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나는 반숙 계란을 먹다가 턱받이를 적셨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실컷 미워해 봐라. 내가 쪼그라드나.’
저런 사람 따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나를 걱정하고 할머니의 눈치를 보는 건 바너드였다.
아이는 몰래 내 방에 찾아와선 내게 속삭였다.
“베로니카, 할머니 무섭지?”
“안 무서워.”
“진짜?”
“응.”
“눈치가 없진 않을 텐데…….”
“바보야.”
“뭐?”
“나, 혼자서도 잘해.”
“으응, 그래. 그런 것 같긴 하더라.”
나는 기죽지 않는단다.
바너드가 제게 쏟아지는 애정에 취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란다면 곤란하겠지만, 지금 내게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걸 봐선 애가 자라면서 삐뚤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잘 자라 줘서 고맙구나.
제대로 못 자라서 날 괴롭히면 좀 자란 다음에 추궁과혈(推宮過穴: 내공을 실어 때리는 것으로 막힌 기혈이나 내상을 치료할 때 사용함)을 빌미로 패 주려고 했는데.
“기분이 이상한데…….”
“뭐가?”
“할머니가 언제까지 있다 가실지 모르겠어. 왜 나는 예뻐하면서 너는 싫어하시는 걸까?”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할머니는 나만 싫어하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나는 바너드에게 달라붙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엄마도 싫어해.”
“응…… 그런 것 같아. 전보다 심해.”
“전?”
“아, 베로니카 너는 할머니를 이번에 처음 봤겠구나.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네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 알아!”
“그래, 그래.”
바너드는 내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자기도 아직 여덟 살인 주제에.
“나도 더 크면 할머니가 저러시는 이유를 알게 될까?”
“나 알아.”
“응, 그래. 베로니카는 다 알지.”
여기서는 어떻게 말해야 세 살 같을까?
솔직히 나는 지금도 세 살치곤 말을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디까지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아주 어린 아이다.
그런 어린애가 상식 밖의 행동과 말을 한다면 꺼림칙해하지 않을까?
할머니야 나를 꺼림칙하게 여기든 말든 상관없긴 하지만, 다른 가족들에게 내 흉을 보는 건 용납 못 한다.
고민 끝에 나는 어린애답게 대뜸 놀자고 졸랐다.
“밖에서 놀자!”
“그래! 뭘 하고 놀래? 숨바꼭질?”
“으으음- 저거!”
나는 예전에 바너드가 나랑 색칠 놀이를 하다가 선물로 준 ‘크레용’을 가리켰다.
서랍장 안이 아니라 밖에 보이게 놔둬서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가지고 있었어?”
“아껴 써야 좋아.”
“으으으음…… 나한테 많으니까 다 쓰면 또 달라고 해.”
“응!”
“내가 종이 가져올게. 밖에서 보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용은 손에 묻지 않지만, 최대한 장식이 적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유모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보다 행동이 빠른 바너드가 하인을 시켜서 정원에 탁자와 의자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탁자 위엔 흰 종이와, 혹시라도 종이가 날아갈까 봐 누름돌로 놓은 어린애 주먹만 한 장식품, 크레용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색이 열 가지밖에 없었는데 바너드가 새로 가져온 건 무려 색이 서른여섯 가지였다.
“와.”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무슨 색이 저렇게 많단 말인가?
“베로니카, 이게 금색이고 이게 은색이야.”
“금? 은?”
글쎄다, 내가 아는 금색이랑은 좀 다른데.
내 표정이 미묘해지자 바너드는 머쓱해져선 고개를 돌렸다.
“진짜 금보다 탁하단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금색이라고 이름 붙어 있는걸.”
“난 이거.”
나는 붉은색 크레용을 하나 잡았다.
맨 처음 크레용이란 걸 써 봤을 때와 달리, 지금은 선도 잘 긋고 동그란 원도 그릴 수 있었다.
물론 생각한 것처럼 손이 따라 주진 않았다.
나는 붓은 잡아 봤어도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도구는 이번 생에 처음 써 보니까.
붓보단 사용이 편리하긴 해도, 영 어색하다.
‘나중에 크면 붓을 잡을 수도 있겠구나.’
과연 이 세계의 붓도 중원에서 쓰던 것과 비슷할까?
간혹 가다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큰 새의 깃털에 검은 물감을 묻혀서 글씨를 쓰곤 하던데…….
“베로니카, 뭐 그려?”
“아빠.”
“어…… 그렇구나.”
빨간 크레용으로 대충 종이에 원을 하나 그렸다. 그 뒤에 갈색을 들고 죽죽 그었다. 아버지 머리다.
피부색과 비슷한 크레용을 집어서 막 그었다. 이게 얼굴이다. 그리는 김에 옆에 엄마 얼굴도 먼저 그렸다.
“나도 아버지 그릴까…… 아니다.”
무엇을 떠올린 건지 짐작이 간다. 우리는 어머니가 다르니까,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면 바너드는 아버지와 제 어머니를 그릴 테니.
녀석은 한참 고민하다가 내가 놓은 피부색 크레용을 잡았다. 그 뒤에 든 건 검은색이었다.
“나야?”
“응. 난 베로니카 그릴래.”
“잘 그려.”
“…….”
왜 대답 안 하냐.
나는 손을 뻗어서 바너드의 팔을 붙잡았다.
“나.”
“어? 어어…… 잘 그릴게.”
날씨가 서늘하긴 했지만 옷을 따뜻하게 입은 덕분에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엔 적당했다.
나는 아예 탁자 위에 올라가서 그림을 그렸고, 그런 내가 떨어질까 봐 걱정됐는지 유모가 바짝 다가왔다.
바너드는 내가 제자리에 놓지 않은 크레용을 하나씩 집어 제자리에 넣었다.
“많이 닳았네.”
“응?”
“이따가 내 거 하나 더 줄게.”
“와!”
“아가씨, 이럴 땐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해요.”
“감사합니다아-.”
“큽.”
테이블에 올라간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으니 마치 절을 하는 것처럼 보일 거다. 바너드가 웃음을 꾹 참았다.
내 꼴이 웃기긴 하겠지.
하지만 뭐 어떠냐. 아직 세 살 아기인데.
내가 이 상태에서 앞 구르기를 해도 볼만하겠지만 바너드가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수도 있으므로 더 웃기진 않겠다.
우리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깔깔대며 놀았다.
바너드는 여덟 살이었지만 그림엔 그리 소질이 없었다.
‘저게 나라고?’
베로니카가 보통 아기였다면 아마 저걸 보고 울었을 거다.
그러니까 나도 울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열심히 슬픈 생각을 떠올리며 감정을 잡고 있을 때였다. 잘 놀던 바너드가 내게 말했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유모랑 같이 있어.”
“……응.”
쳇.
살짝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다 틀렸다.
바너드가 없어도 나는 마저 그림을 그렸다.
내가 그린 그림도 썩 훌륭하진 않았다. 아니지, 세 살치곤 훌륭할지도 모른다.
비록 낙서하는 게 즐거워서 피부색을 칠한 아버지 얼굴 위에 파란 칠을 해 버렸고, 눈을 칠한다는 게 빗나가서 덧칠하고 다시 그리는 바람에 눈이 세 개가 돼 버리긴 했지만.
‘이걸 어머니 아버지라고 말하면 충격받는 거 아닐까.’
인정하자. 세 살 아기의 그림 실력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아기에게 그리 큰 걸 바라진 않을 거다.
내가 그린 부모님 그림과 바너드가 그린 내 초상화를 함께 걸어 두면 참으로 볼만할 것 같았다.
나는 새 종이를 펼쳤다.
짤막해진 내 크레용보단 새것과 다를 게 없는 바너드 것이 더 쥐기 좋아서 무슨 색을 집을까 고민하다가 녹색을 들었다.
화장실 간 녀석이 빨리 돌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참다 참다 못 참겠어서 간다고 말하고 간 거니까 큰 볼일이겠지.
‘흠?’
다음엔 또 뭘 그릴지 고민하는 내 귀에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허.’
익숙지 않은 소리인 걸 봐선, 아마 할머니인 모양이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오는 걸까?
고작 세 살밖에 안 된 아기에게 진심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니. 믿고 싶지 않지만 이 세상엔 의외로 이런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놀고 있는 게냐? 누가 그쪽 집안 핏줄 아니랄까 봐…….”
“할머니!”
“그런데 그것, 내가 바너드에게 선물로 줬던 물건 같은데 왜 네가 가지고 있지?”
“할머니!”
“설마 그 애 것을 빼앗은 거냐? 그게 아니라면, 내 선물을 가로챈 게냐? 이리나 그것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색이 열 가지인 건 바너드가 나한테 선물로 준 거고 색이 서른여섯 가지인 건 바너드 것이 맞는데.
탁자 위에 흐트러진 종이들과 두 개의 크레용 함을 보고도 노인은 내가 이복 오빠와 함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의자 하나는 유모의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괘씸한 것. 내 진작에 이혼을…… 아무리 사정이 어려웠어도 그것들 도움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뭐라는 거야.’
“거기 너. 그걸 들고 따라오거라. 내가 이리나한테 가서 따져 봐야겠으니.”
“대부인, 고정하세요. 이건 아가씨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저게 내가 내 손주에게 준 선물을 갖고 있는 거냐?”
“그건-.”
눈빛이 부리부리한 걸 보니 노인은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어린아이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대놓고 화를 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탁자 위에 앉은 채 노인을 바라보았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고, 찡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울지도 않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마치 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내 반응에 노인의 표정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순간.
“할머니!!”
화장실 갔던 녀석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