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공녀님은 대단해 (4)
하지만 그게 아닌지, 바너드는 꼬맹이 주제에 온갖 시름을 다 짊어진 듯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난 후계자가 되어야 하잖아. 그래서 이것저것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휴우…….”
“그럼 나도 할래. 힘든 건 같이하면 나아진댔어.”
“바보야. 공부는 그런 거 아냐. 혼자 해도 힘들고 둘이 해도 힘든 거라구.”
그런가?
내가 여기서 뭐라 더 말하기도 이상하니, 나는 책이나 더 읽어 주라고 녀석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바너드는 못 이기는 척하며 다른 그림책을 하나 더 펼쳤다.
하지만 그 책을 읽어 주진 못했다.
“도련님? 아, 여기 계셨군요.”
모르는 사람이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였는데 그는 바너드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수업 시간인데 방으로 오지 않으셔서 찾으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셨겠죠. 자, 그럼 공부하러 갑시다.”
“네.”
“하하. 공녀님 앞이라서 그런가요? 의젓하게 바로 간다고 하시는군요. 평소엔 공부하기 싫다면서 떼쓰시던 분이.”
“떼써?”
“악! 아냐!”
그랬군.
바너드는 내 앞에서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야?”
“아.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너드 도련님의 가정 교사로 일하고 있는 루거트 실레인이라고 합니다.”
착하게 생긴 사람이구나.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 되긴 하지만, 되게 착하게 생겼구나.
상대방이 나를 아는 듯하니 내 소개는 생략했다. 그 뜻을 알아준 남자는 바너드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도련님. 공부방으로 가시죠.”
“네에…….”
“나도 갈래.”
나는 읽고 있던 식물 사전에 책갈피를 끼워 놓고 덮었다.
내가 덮은 두꺼운 책 제목을 확인한 가정 교사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아, 네 살배기에겐 어려운 책이라서 놀란 건가?
제 이름을 루거트라고 소개한 가정 교사는 바너드를 데리고 갔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같이 가도 돼요?”
“지루하면 중간에 가시지 않을까요?”
“쟤는 보통 아기가 아니에요.”
“하하하.”
“웃지만 말고요.”
그렇게 나는 바너드가 공부하는 걸 구경하게 되었다.
그래도 오빠 노릇 하겠다고 가정 교사 앞에서 내게 얌전히 있으라든가, 졸리면 자도 된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 건 꽤 재밌었다.
“오늘은 문학 수업이었죠. 책은 읽으셨나요?”
“네.”
“그럼 그 이야기를 해 봅시다.”
가정 교사는 내게 심심하면 읽어 보라며 바너드의 수업 시간표를 보여 주었다.
저 남자는 꽤 유능한 모양인지, 바너드에게 오늘 배우는 문학은 물론이고 음악, 역사, 사회, 예절 등을 모두 가르쳤다.
바너드도 아직 어린애인데 이걸 다 배우기엔 너무 어렵지 않나?
‘그래도 재미는 있군.’
바너드는 과제로 내어 준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가정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다음엔 시에 대해 배웠고, 그 시를 쓴 사람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나는 그 모든 걸 소파에 앉아서 흥미롭게 경청했다.
‘역시 나도 공부를 해야겠는데.’
아무리 아기라 해도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이지 않나.
중간중간 휴식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거의 한 시진가량 흐른 뒤에야 수업이 끝났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오늘의 수업을 마친 가정 교사가 돌아가자 바너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쉬는 거야?”
“아냐. 숙제해야 돼.”
“숙제?”
“응. 그러니까 이제 가. 이거 다 끝낼 때까진 못 놀아 주니까.”
진짜 피곤한 것 같아서 나는 얌전히 바너드의 공부방에서 나왔다.
내가 옆에 있음에도 바너드도 가정 교사도 오늘의 수업에만 몰두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자연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더욱 커졌다.
‘이 세계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
고작 책 몇 줄 읽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고 얻는 지식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나에게도 스승이 필요한 거다!
‘가정 교사라는 말은 집까지 와서 공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인 건가?’
혹시 가정 교사가 아직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복도를 달려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갔나 보군.
‘내가 스승을 얻으려면 아버지의 동의가 필수겠지.’
저번에도 날 지원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동의가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다.
내가 뭘 하는 데에 누군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런 세상에 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물론 지금 당장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내게도 스승님을 붙여 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일단 평소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보면 내게 뭘 못 줘서 안달 난 아버지가 먼저 갖고 싶은 게 있느냐며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
공부하는 바너드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만, 내가 맨날 따라가면 녀석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 뒤론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매일매일 서고에서 책을 읽었다.
아직 내가 읽어야 할 식물 사전이 너무 많았다.
‘정말 종류가 많구나.’
게다가 내가 모르는 단어가 한가득이었다.
자생지 옆에 적혀 있는 단어는 아마 나라의 이름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 나라의 이름은 뭘까?’
전생의 내가 살던 중원…… 그곳에는 황제가 다스리는 거대한 하나의 나라가 있었고 그 바깥은 새외라고 불렸다.
자주 듣고, 가 본 적도 있는 곳은 북해빙궁, 남만야수궁. 그 외에도 두 군데는 더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가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다.
중원에 대해 떠올리다 보니 과거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대체 자혁과 은설혜는 그 먼 남만에서 짐승을…… 무슨 수로 안 죽이고 데려온 거지……?’
십만대산과 남만 사이가 꽤 먼데, 거기서 어떻게 짐승을 사냥…… 아니지, 노략…… 아니 아니, 납치해 온 거야?
자기들이야 경공 쓰고 달린다고 해도, 말도 안 통하는 짐승을 그런 식으로 운송했다간 난리가 났을 텐데.
‘그때 자세하게 물어볼걸.’
기겁해서 제자리에 돌려 놓고 오라고만 했지.
아차, 너무 오랫동안 딴생각을 해 버렸구나. 이 책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만.
‘아무튼,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약초가 중원의 것과 같다는 보장은 없어.’
어떤 땅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게 당연하니.
독약이든 보약이든 일단 만들어 보고, 진짜 효능이 있는지 실험해 보는 게 우선이다. 물론 실험은 내 몸에다 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나는 사전 안에 있는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한 번 읽는 걸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사전을 정독하여 모조리 내 것으로 만들겠다.
“아가씨, 이 책이 재밌으세요?”
“재미없어.”
“그런데 왜 읽으세요?”
“읽어야 하니까.”
서고를 담당하는 하인은 인적 뜸한 서고를 지키는 일이 심심했는지 종종 내게 말을 걸었다.
하긴, 나 같아도 정수리가 제 무릎에나 겨우 닿을 법한 꼬맹이가 어려운 책을 읽고 있으면 신기하긴 하겠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책을 읽는 게 재밌는 모양이다.
“아가씨는 식물 박사가 되고 싶으신가요?”
“박사?”
“네. 엄청 똑똑한 사람이에요.”
“흐음.”
박사라.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몰라.”
“아가씨는 뭐든지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좋은 녀석이구나.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매일 집무실로 출근하시는 것처럼, 아가씨도 서고로 출근하시네요.”
“출근?”
“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거예요.”
“난 출근해.”
“큽…….”
내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자 녀석은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출근. 출근이라.
그 말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다음 날 서고에 오면서 담당 하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 출근해.”
“크흡…… 어,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녀석은 꽤나 입이 싼 모양인지 이틀이 지나자 온 집안에 소문이 다 났다!
다 나만 보면 ‘아가씨, 출근하세요?’라고 물어봤다.
어쩐지 놀리는 것 같았지만 어린애가 뭘 알겠는가. 나는 진지한 얼굴로 출근한다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다들 아닌 척하면서도 즐거워했다.
그래, 너네라도 즐겁다면 그걸로 됐다.
그리고 내가 서고로 ‘출근’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도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래, 베로니카. 매일 서고에 간다면서?”
“응.”
“책이 좋니?”
“응!”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나도, 오빠처럼 공부.”
“공부?”
“응!”
“그렇구나.”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흔쾌히 말했다.
“베로니카도 내년부터 다섯 살이 되니 공부를 시켜 주마.”
“와아!”
부디 가정 교사가 제대로 된 놈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