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천재인가 바보인가 (3)
“……어.”
“공녀님은 일단 글부터 배웁시다.”
“나 글 알아. 잘 읽어.”
“쓰는 것도 잘 쓰시나요?”
그건…… 모르겠다.
읽기만 하고 쓰질 않아서. 나는 조막만 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런 내게 루거트가 선물이라고 길쭉한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열어 보세요.”
그 안에 든 건 희한하게 생긴 나무 막대였다.
막대 사이에 까만 걸 끼워 놨는데 한쪽 끝이 뾰족하고 시커먼…….
결국 나는 다시 한번 묻고 말았다.
“이게 뭐야?”
“연필이라는 겁니다. 제국에서 넘어온 물건인데, 상단에서 광고용으로 나눠 주던 걸 받아 왔어요.”
그러니까, 받아 온 걸 내게 선물이라고 준 거냐?
내 표정을 무어라 해석한 건지 가정 교사가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은 아직 어리시니 깃펜보단 연필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아직 시제품이지만요. 깃펜보다는 쓰기 쉽고 잉크가 묻지 않을 겁니다. 검은 게 묻어도 물로 씻으면 금방 씻기고요.”
“오.”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좋아 보이긴 한다.
내가 어리다고 참 좋은 선물을 줬구나.
내 표정을 본 가정 교사는 책을 펼쳐 주었다.
책에는 그가 직접 만든 건지 잉크를 사용해 네모반듯하게 그려 둔 칸이 있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왕국어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공녀님은 이걸 그대로 따라 그리시면 됩니다.”
“다?”
“네. 한 글자당 열 번씩 쓰고 다음 글자로 넘어가세요.”
이런 걸 만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가정 교사도 참,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무지게 작은 손으로 연필을 쥐고 맨 첫 번째 글자부터 따라 적었다.
확실히, 중원에서 쓰는 한자보다 백배 천배 쉬웠다.
‘한자는 너무 어렵단 말이지.’
게다가 나는 정말 가난한 집 출신이어서 글을 배울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나중에 약초꾼 일을 할 때에도, 마을에 거주하던 약방 사람들이 내가 사기당할까 봐 걱정된다며 글자와 약초 이름 쓰는 법을 알려 줬다.
돈 떼먹히지 말라고.
하지만 한자는 너무 어렵고 죄다 비슷비슷한 것투성이였다.
그러니까 스승님을 만났을 때도 내 이름자 하나 제대로 못 적었지.
‘새로운 걸 익히는 건 재밌구나.’
한자보다 쉬워서 그러겠지?
나는 열심히 글자를 따라 썼다. 내가 잘 쓰고 있자 루거트는 바너드에게 갔다.
“어? 아직 덜 읽었어요.”
“공녀님의 집중력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좋으시네요.”
“베로니카가 좀 특이해요.”
내 욕 하지 마라.
내가 손 움직이는 걸 멈추고 바너드를 빤히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녀석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 경고를 날렸으니 나도 내 할 일을 했다.
두꺼운 사전도 읽어 대는 내게 글자 따라 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당연하게도 내 수업보다는 바너드의 수업이 훨씬 길었다.
글자를 쓰다가 팔이 아파서 손을 놨다가, 다시 연필을 잡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다시 루거트가 왔다.
“와, 벌써 이만큼이나 쓰셨네요?”
“응.”
“대단하십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칭찬하기는.
“더 써?”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다섯 살을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 일단 기초 자료만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공녀님의 학업 성취도에 따라 더 어려운 걸 가르쳐도 될 것 같아요.”
“난 잘해.”
“베로니카는 자기가 뭐든지 잘한다고 해요. 믿지 마세요.”
저 녀석이?
초를 치는 녀석을 흘겨보니 바너드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대체 왜 저런담?
그 의문은 내 글자 쓰기 수업과 바너드의 역사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풀 수 있었다.
“베로니카. 못하는 척해야지.”
“왜?”
“잘하면 좀 더 어려운 걸 가르쳐 줄 거 아냐.”
“그래?”
“그래 놓고서 못하면 실망하고. 사람들은 다 그래.”
녀석은 시무룩해졌다.
이런. 본인의 경험담이었나 보구나.
“새 가정 교사는 안 그러지만 옛날 가정 교사는 그랬거든…… 루거트는 안 그럴 것 같긴 한데 사람은 겉모습으로 파악할 수 없으니까.”
“오빠.”
“응?”
“애늙은이.”
“야!”
나는 꼭꼭 숨겨 놨던 진심을 털어놓았고, 바너드는 소리를 빽 질렀다.
***
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애늙은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써도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바너드는 잔뜩 토라졌는지 다음 날까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같은 공부방에서 공부하면서도.
그걸 눈치챈 가정 교사 루거트가 내게 소곤거렸다.
“싸우셨어요?”
“오빠 혼자 화났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오빠는.”
“네.”
“애늙은이.”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꽤 놀란 눈치다.
다섯 살이 쓰기엔 어려운 단어였구나!
내가 입을 다물자 루거트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누가 공녀님 앞에서 그런 말을 쓰던가요?”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알게 되셨나요?”
상냥한 목소리로 그가 건넨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자질 한 번 했다가 내가 더 곤란해지고 말았다.
나는 끙끙대다가 어리숙한 아이인 척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말 중에 나쁜 말은, 다 할머니가 한 거야.”
“네?”
“할머니는 나 싫어해.”
뭐, 반쯤은 맞는 말이다.
내 말에 루거트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좀 떨어진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던 바너드도 깜짝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이참에 쐐기를 박기로 했다.
“할머니는 나랑 엄마를 싫어해.”
“……그러셨군요. 아, 글자는 이제 잘 쓰시니 오늘은 다른 걸 해 볼까요? 오늘은 숫자에 대해 배워 볼 거예요.”
루거트는 말문이 막혔는지 냉큼 화제를 돌렸다.
그 노력이 가상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다음엔 차근차근 설명을 들으며 숫자 쓰는 법, 읽는 법, 사탕을 세는 법을 배웠다.
다 맞추면 사탕을 모두 준다고 해서 나는 열심히 하나하나 세어 가며 숫자를 외웠다. 사실 다 아는 거지만 외우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탕!”
“진짜 한 통 받았네.”
나는 사탕이 가득 찬 유리병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바너드는 사탕 병을 껴안은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제 화는 다 풀린 것 같았다.
“베로니카.”
“응?”
“할머니가, 나 안 보는 데에서도 너 많이 괴롭혔어?”
“응.”
즉시 대답했다. 원래 이런 건 빨리 대답해야 좋은 거다.
그러자 바너드가 시무룩해졌다. 난처해진 나는 사탕을 하나 주려고 했지만, 통이 열리지 않았다.
“끄으응-.”
“뭐 해?”
“사탕.”
“줘 봐.”
하지만 바너드도 열지를 못해서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열어 달라고 해야 했다.
하인에게 고맙다고 사탕 하나를 준 다음, 바너드에게도 사탕을 하나 줬다.
“그런데 사탕은 왜?”
“슬퍼 보여서.”
“……베로니카.”
“응.”
“넌 가끔 천재 같은데 그것보다 더 많이 바보 같아.”
나는 사탕을 줬는데 바너드는 내게 욕을 줬다.
참 불공평한 거래라서 나는 하나뿐인 오라비의 발을 콱 밟고 도망쳤다.
하지만 무공도 제대로 못 익힌 몸이라 달리다가 넘어졌고, 급히 일어나 다시 달려갔다.
방에 돌아와서야 나는 사탕 통을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내 사탕!’
열 손가락으로도 다 못 세는 산수 문제까지 풀고 나서 받은 건데!
너무 슬퍼서 나는 침대 위에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이게 다 어린애가 되어서 입맛마저 어린애가 되어 버린 탓이다.
사탕 하나에 울고 웃는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당과보다 독을 더 많이 삼키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젠 독보다 당과가 더 좋아!’
미칠 노릇이다. 이 상태에선 독을 먹으려고 했다가도 맛없다고 뱉는 게 아닐까?
독공 수련을 하는 사천당가 직계는 갓난아기일 적부터 독을 조금씩 먹여 면역을 기른다는데, 난 이미 다 틀린 걸지도 모른다.
걔네는 아기일 적부터 독을 먹여서 입맛을 길들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외딴 동굴에 쿵 하고 추락. 거기서 벗어날 때까지 동굴의 이끼며 벌레며 박쥐를 잡아먹지 않는 이상, 독을 못 삼키게 될지도 모른다.
***
심통이 난 베로니카가 그의 발을 콱 밟고 도망쳤다.
그런데 도망치다가 넘어졌다.
용케 울지 않고 다시 달려갔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은 사탕 통을 두고 가 버렸다.
바너드는 아픈 발을 문지르다가 그걸 보고 얼이 빠졌다.
“뭐야…….”
저러니까 그가 바보 같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도 잘하고 글자도 빨리 익히고 심지어 어려운 식물 사전도 매일같이 찾아가서 읽는 아이인데.
그것만 봐선 천재인데 저런 걸 봐선 바보 아닌가?
‘아니지…… 바보라기보단…… 원래 애니까 애다운 행동인 건가?’
혹시라도 유리병이 깨졌을까 급히 달려가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사탕 통은 무사했다.
바너드는 하녀들에게 시켜서 베로니카에게 유리병을 돌려줄까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내일도 루거트에게 공부를 배울 테니 그때 줘도 될 거다.
루거트가 보면 왜 그가 사탕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 루거트 또한 알아줄 것이다.
왜 그가 베로니카를 보고 가끔 천재 같은데 그것보다 더 자주 바보 같다고 한 건지.
한편, 가정 교사인 루거트는 베로니카와 함께한 수업 자료를 확인하며 고민에 빠졌다.
공녀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셈도 빠르고 글자도 잘 쓰고, 심지어 글도 잘 읽었다.
그가 도서관에서 봤던 식물 사전을 떠올리니 저절로 머리가 아파 왔다.
‘진짜 읽고 있었던 건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난감하고.
그는 아직 공녀의 수업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좀 더 지켜보자.’
정말로 공녀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능을 가졌다면 좀 더 어려운 공부를 해도 될 것이다.
문제를 다 맞히면 사탕을 준다고 하니 손가락으로 셈할 수 없는 숫자까지 알아맞히다니. 공녀는 과연 대단했다.
그는 ‘십’ 이후의 숫자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 공녀는 어떻게 ‘십일’과 ‘십이’를 센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