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내게 다 계획이 있다 (1)
“베로니카가 학교 가고 싶대요. 갑자기.”
“아.”
바너드의 보충 설명에 루거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라…… 으음, 어떻게 설명해야 쉬울까요?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잔뜩 모아 놓고 한꺼번에 수업을 하는 겁니다. 한 명당 한 명의 선생님이 붙는 건 비효율적이니까요. 몇십 명씩 반을 정해서 나눠 놓고 동시에 가르치는 거지요. 시간을 정해 놓고 공부하고 밥 먹고 쉬고, 그런 겁니다.”
“나도 학교 갈래!”
“어- 아가씨는 아직 어려서 안 돼요.”
“거짓말! 여학교는 없다던데.”
“아.”
내 말에 루거트는 바너드를 쳐다보았고, 바너드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구나.
결국 루거트가 해 준 설명도 바너드와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불만스런 얼굴로 그를 쳐다봤고 루거트는 머쓱해하며 웃었다.
“하하.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신 거죠?”
“응.”
“으음~ 그렇죠. 여학교는 없어요.”
“왜 없어?”
“글쎄요. 오래전부터 그랬거든요. 아, 역사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공녀님에겐 너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또래보다 영특하시니 이해하실 거예요.”
루거트는 칠판 앞에서 분필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짧은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단 고대로 넘어갑니다. 사람이 흙을 빚어서 도구를 만들고 수렵을 하던 시절이라고 하죠. 농사도 사냥도 보통 힘이 센 사람이 좀 더 잘하기 마련이니, 신체적 조건이 조금 더 나은 편인 남성이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물론 이것조차 완벽하지 않은 이론이니 언제 반박당해도 이상하지 않죠.”
루거트는 남성은 바깥에서 일하고, 여성은 내조를 한다는 건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념 같은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부계가 아닌 모계 혈통을 잇는 국가도 있었으며 모계로 이어지는 혈통이 더욱 정당성이 있다는 이론도 나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이해하긴 어렵다고 여겼는지 루거트는 그쪽은 간단한 설명만 해 주었다.
“고대까진 아니어도 먼 과거. 여성에겐 지성이 없기에 학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아예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모자라죠.”
“그래서 학교가 없어?”
“네. 아쉽게도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에바 세른스트 전하께서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여왕이라 하지 말고 왕이라 부르라 하셨죠. 당시 전쟁으로 형제들이 몽땅 죽어 버린 뒤라, 남은 적통은 그분뿐이셨기에 일부의 방해를 이겨 내고 왕위에 오르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법은 에바 전하께서 다스리던 시기에 바뀐 게 상당히 많아요.”
전쟁으로 죽은 이가 많기에.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여성의 바깥 활동이 늘었다.
그 전엔 부친이나 남자 형제, 혹은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경제 활동을 제한하는 법도 사라졌다고.
내가 듣고 싶은 건 왜 여학교가 없는지인데.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루거트는 먼 역사까지 끌어와야 했다.
“그래서 여학교가 없는 거야?”
“아하하. 좀 어렵죠? 그 시절을 겪었다고 해도, 여성은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 있거든요. 귀족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런 생각이 점점 지워지긴 했으나 아직 모자랍니다. 여성은, 특히 귀족이나 돈이 많은 평민일 때나 가정 교사에게 지식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이 한계점이고요.”
루거트도 그래서 내 가정 교사를 하고 있는 거다.
물론 내가 아직 많이 어려서 바너드와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거지만.
“하지만 그마저도 스승 된 위치에서 제자가 되는 어린 소녀를 희롱하는 몰상식한 자들이 나오는 바람에, 당장이라도 이 가정 교사 법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쁜 놈들을 없애면 되잖아요.”
“그게 가장 쉬운 방법 같지만…… 가정 교사로 일할 수 있는 건 신원이 확실한 귀족들뿐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처음부터 몸을 사리는 게 낫다면서 아예 교육받을 권한을 빼앗으려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그도 이름뿐인 귀족이라며 루거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먹고살 길이 없어 가정 교사를 한다던가.
루거트가 어쩌다가 가정 교사가 된 건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전에 여자들은 어떻게 공부했어?”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은 교양으로 배웠으며, 어른이 아이에게 자신이 살면서 겪은 일을 전달하는 것 정도였습니다. 경험은 훌륭한 지식이 되어 전해질 수 있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라죠.”
루거트는 분필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았다.
“이웃 나라인 아가트 신국의 경우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여성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건 사제를 배출하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여태껏 안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학교를 안 만들어 준다는 거죠?”
“그 말도 맞습니다. 학교를 지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사람도 많이 고용해야 하니까요.”
바너드의 말에 루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린 소녀들을 모아 놓으면 괜히 기웃거리는 놈들이 있을 거다.
여성 무림인으로만 이루어진 아미파 주변에도 아름답다고 소문난 제자들을 보려고 난리인 놈들이 많았으니.
그치만 여학교가 있다면 좋을 텐데.
전생에, 내가 약초꾼의 자식으로서 캐낸 약초를 팔러 다닐 때.
남루한 행색의 아이가 내미는 약초의 값을 후려치지 않고, 글을 모르는 내게 글자를 가르쳐 주며 편의를 봐줬던 이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지금, 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꽤 높은 위치의 귀족이다.
그러니 나도 본격적으로 지식을 배우면서, 남들도 같이 배우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지금은 마땅한 가정 교사가 없어서 오빠를 가르쳐 주는 가정 교사가 덤으로 공부를 봐주고 있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학교. 가지고 싶은데.
***
왕실 학자들이 기록적인 폭우와 태풍을 예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작가 또한 단단히 대비를 했다.
아직은 날이 쨍쨍하고 맑고 더우니 태풍이 올 것 같진 않은데.
이곳은 원래 더운 날씨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비가 내린다나.
나는 밖에 오래 서 있으면 고운 피부가 다 탄다는 하녀들의 말에 얼른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유이사 왕녀를 만나러 간 이후, 나는 자주 왕성에 들락거리게 되었다.
덕분에 아버지도 바빠졌다.
아무리 호위를 붙인다고 해도, 아직 어린 나를 혼자 마차에 태워서 보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유모나 다른 하녀를 붙여 줘도 걱정된다나 뭐라나.
“베로니카!”
내가 갈 때마다 유이사는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가만 보면 친동생보다 나를 더 아끼고 귀여워해 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왕녀인 유이사 말고 그녀의 형제들을 만나지 못했다!
분명 왕세자라는 존재가 있고 남동생도 있을 텐데!
“오늘도 그림 그리자.”
“응.”
우리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인형 놀이를 하기도 하고, 귀부인들을 따라 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기도 했다.
같이 왕실 도서관에 가기도 했는데, 공작저에 있는 도서관보다 훨씬 크고 넓어서 아이의 짧은 다리로는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구경을 다 못 할 것 같았다.
도서관 구경을 한 뒤엔 날이 더워서 가벼운 드레스를 입고 차게 식힌 간식을 먹기도 했다.
산책은 피부가 타니까 안 된다고 금지당했다. 열사병 문제도 있고.
“베로니카. 곧 태풍이 온대. 그땐 왕성에 놀러 오지 못하겠지?”
그럼 쓸쓸할 거라며 어린 왕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생겼다.
나 말고도 놀아 줄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 건진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유이사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내 손을 붙잡고 외쳤다.
“네가 왕성에 오고 난 다음 태풍이 오면! 그럼 하룻밤을 자고 갈 수 있을 텐데. 그럼 좋겠다!”
어린아이다운 생각이었다.
맨날 내가 놀러 올 때마다 자고 가라면서 떼를 쓰더니,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저은 뒤 속상해하는 아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토닥 해 줬다.
“나중에 또 놀면 되지.”
“맨날 나중이래! 어른들도 똑같아.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나중에 놀라고 하면서, 어른들은 더 바쁘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나는 일찍 놀이를 마치고 유이사와 헤어졌다.
학자들이 태풍을 예고하긴 했지만 정확히 언제 올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나는 날은 아무래도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일 거다.
이틀 뒤.
날씨가 점점 흐려지며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종일 비가 내렸다.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면서도 날이 개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태풍이 오긴 왔나 보다 싶다.
사방에서 눅눅한 비 냄새가 났다.
‘이 비가 그치면 버섯이나 이끼가 자라 있으려나?’
그럼 정원사가 없애기 전에 얼른 주워 먹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독버섯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르르-.
쾅!
천둥 번개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진짜 어린아이였다면 무서워했겠지만 나는 무섭지 않았다.
천둥소리야…… 익숙하기도 하고.
‘애초에 무공을 쓰면서 불도 내고 번개도 쓰는 놈들이 가득했던 곳이니.’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천둥소리를 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결국 내가 정말로 두려워할 만한 건, 천벌이라고 불리는, 정말 자연적으로 내리치는 눈먼 벼락에 맞는 것이려나.
우르르-.
요란한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닫힌 창문 너머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저절로 딴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과거 천화교에 있었을 적에, 천둥 번개의 요란한 소리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녀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