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물 만난 물고기 (2)
‘진서련’은 검보다는 암기를 주로 썼다.
검을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개소리하는 놈들은 주둥이를 더 열기 전에 암기를 던져 제압하는 게 더 편했다. 무엇보다 독만 훅 불어도 죄다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지곤 했으니 정말 필요할 때 말곤 검을 쓸 일이 없었다.
“누나, 안 무거워?”
“괜찮은데.”
“와아.”
루이드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얘는 왕자인데 나한테도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렀다.
이건 전부 유이사 때문이었는데, 내가 유이사를 언니라고 부르니까 유이사가 제 동생인 루이드에게도 나를 누나라고 부르라고 시켰다.
멋모르는 꼬맹이는 제 누나가 그러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면서 따라 하는 거다.
목검을 몇 번 더 휘둘러 보다가 기사에게 돌려줬다.
어쩐지 나를 굉장히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대견해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차.’
엘렌은 양손으로 목검을 잡고 휘둘렀는데 나는 한 손으로 사용했구나!
이제 와서 무거운 척을 하기도 늦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베로니카, 너도 검술 배우고 싶어?”
“할 수 있으면?”
“그럼 알려 달라고 할까? 하지만 여자애들은 그런 거 배우면 손에 상처가 늘어난다고 안 된다고 하던데.”
고작 손의 상처가 두려워서 검을 배우지 못한다니,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편견은 굉장히 두껍고 단단해서, 어른에게서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나도 유이사가 검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면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
아이는 으레 가까운 사람이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다 같이 검을 배운다고 하면 보통 아이들이 그러하듯 금방 질릴 거라고 생각하고 허락해 줄지도.
“나도, 나도 할래!”
“루이드 넌 나중에 하기 싫어도 하게 될걸?”
“누나들이랑 같이 할래.”
“형이랑은?”
“으으음…….”
유이사의 물음에 꼬맹이는 슬쩍 제 형의 눈치를 보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형이랑은 놀기 싫고 누나들과 놀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엘렌은 제 할 일이나 하는 게 이롭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옆에서 동생들이 무어라 떠들든 그는 오늘의 과제를 끝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기사가 그 횟수를 세어 주었다.
몸풀기와 목검 휘두르기는 구경만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가벼운 달리기는 넷이서 함께했다.
엘렌이 앞서 달려가면 우리 셋이 뜀박질을 하며 따라가는 식이었다.
오늘은 용케 루이드가 넘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꼬맹이가 돌부리 하나 없는 맨땅에서 미끄러지더니 꽈당 넘어졌다.
“으흐어엉-!”
“아이고.”
“또 넘어졌네.”
가장 어린애가 넘어지니 앞서가던 나도 유이사도 달리는 걸 멈추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릎의 흙먼지를 털어 주고 일으켜 세우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니 아이는 울면서 웃었다. 아프긴 하지만 누나들의 관심이 기쁜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뭐가 웃겨? 너 피 난다.”
“으앙!”
“언니…….”
유이사의 핀잔에 루이드가 더 크게 울어버렸지만 뭐…… 평화로웠다.
***
“여름이 되면 별장에 가자꾸나. 공사가 거의 다 끝났다더구나.”
그 말을 흘려들은 게 잘못이었을까?
예전부터 드문드문 나오던 별장 이야기.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여섯 살 여름.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별장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누구를 빼놓고 간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나랑 부모님, 바너드랑 파필로나 부인도 다 함께 가는 가족 여행이었다.
“베로니카, 별장 근처에 계곡이 있다더구나.”
“계곡?”
“응. 물놀이를 할 수 있어. 하지만 위험하니까 가급적 가장자리에서만 놀아야 한단다.”
“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휴가 날이 되자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널찍한 마차에 탔다.
내 어머니와 파필로나 부인이 같이 있으면 뭔가 굉장히, 분위기가 무거울 것 같았는데 평소와 같았다.
어차피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편이고, 파필로나 부인도 그리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닌지 조용했다.
반면 나와 바너드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바깥 사람들을 구경하며 신이 나서 떠들었다.
원래 내 자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였는데 내가 창밖을 구경하겠다고 아버지를 몰아내고 창가 자리를 획득했다.
“오빠 저기 사람들!”
“엥? 저기 싸우는 사람들?”
“응.”
“베로니카 넌 안 무서워?”
“안 무서워. 어차피 밖에 있고 멀리 있잖아.”
“하긴.”
지난번에도 외출할 때 싸우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내공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호전성만큼은 중원인에 필적하는구나.
중원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게 싸움판이었다.
한 지역에서 어깨 힘 좀 주고 다닌다는 흑도 놈들이 상점가에서 수금을 한다든가,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장사하냐며 가판대를 뒤집어엎는 식으로 소란을 피우면 근처에 있던 사람이 나서서 한판 싸운다거나.
이때 주로 흑도 놈들에게 맞서 싸우는 건 지나가는 무림인이었다.
그 외엔 객잔에서 밥 먹으면서 술을 곁들인 이들이 말다툼을 하다가 몸싸움으로 번진다거나.
이땐 무공도 못 쓰는 일반인들끼리도 싸움이 자주 나고 무림인들끼리도 자주 나지.
어떻게 저런 느린 주먹에 맞냐며 혀를 차는 나와 달리, 바너드는 싸움 구경에서 눈을 떼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해요?”
“으음, 이틀 밤 정도?”
“잠은 어디서 자요?”
“다 정해져 있으니 염려 말거라.”
이렇게 놀러 가는 것은 처음이라 바너드도 들떴는지 아버지에게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파필로나 부인도 아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부자간의 대화를 바라보는 눈은 부드러웠다.
공작 일가가 함께 별장으로 휴가를 보내러 가는 거다. 말을 탄 기사단이 마차의 호위를 맡았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있어도 내가 싸우는 일은 없겠지.
과연, 중간중간 마차를 멈추고 쉴 때마다 다른 마차를 타고 함께 온 하녀들이 차를 가져다주고 과자도 주었다. 별장에서도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는 한 잔 다 줬으면서 과자는 두 개밖에 주지 않았다.
“곧 점심 식사를 하실 거예요.”
“잉.”
그래도 그렇지, 고작 과자 두 개를 주느냔 말이다.
대놓고 불만스러워했지만 아무도 내게 과자를 더 주지 않았다.
바너드도 자기 몫을 홀랑 먹어 버리고 내게 빈손을 보여 주었다.
“과자 많이 먹으면 밥을 못 먹잖아.”
“난 과자를 많이 먹어도 밥 많이 먹을 수 있어.”
“그러면 건강에 좋지 않아.”
“난 많이 먹고도 건강할 수 있어.”
네가 무공을 써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물론 무림인 중에서도 뚱뚱한 놈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놈이 무공을 써도 지방이 줄지 않는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다. 나는 그렇지 않다.
고집부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착하지, 베로니카. 이따가 오후 간식을 또 줄게.”
“……엄마 하나 먹어.”
“두 개밖에 없는데 엄마 줘도 돼?”
“응. 줄게요. 특별히.”
“너 먹으렴.”
내가 몇 번을 권해도 어머니가 거절하시니 결국 과자 두 개는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마차를 타고 좀 더 움직인 뒤, 미리 수배해 놓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선 다시 마차를 타고 갔다.
저녁 무렵이 되니 하룻밤 묵어갈 곳에 도착했는데.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집주인이 문 바로 앞까지 나와 있다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렇구나.
내 아버지쯤 되는 높으신 인물이라면, 굳이 객잔에서 하루 묵을 필요 없이 그보다 아래 계급인 관리의 집에서 하루 묵고 가면 되는 거였어.
내 아버지보다 나이를 좀 더 먹은 것 같은 남성은 살가운 목소리와 웃는 얼굴로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그날 저녁 식사는 그 집 가족들과 함께한 뒤, 잠을 자러 손님방으로 가게 되었다.
바너드는 제 어머니와 따로 자겠다고 했지만 나는 어머니와 같이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낯선 곳에 오니 혼자 자기 무섭니?”
“음, 같이 온 기사들이랑 하인이랑 하녀들 방까지 하면 무지무지 많잖아요.”
“그렇지.”
“방이 모자랄까 봐?”
고개를 기울이며 말끝을 높이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방이 모자라진 않는단다.”
“그래도.”
참고로 집주인이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님을 위해 준비했다는 방은 내 담당 하녀들 보고 쓰라고 했다.
바로 옆이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기도 쉽고.
처음엔 안 된다고 화들짝 놀라던 이들도 내가 엄격한 얼굴로 그 방을 쓰라고 말하자 고집을 꺾었다.
***
평온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식사도 이 집의 가족들과 함께했다.
바너드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애와 여자애가 있었는데 인사만 나눴을 뿐 별다른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집주인은 은근슬쩍 자식 자랑을 하면서 귀여운 딸의 칭찬을 늘어놓았고, 아버지는 눈치 없는 척 내 자랑을 하며 맞받아쳤다.
창과 방패의 대결 같았다.
음, 그렇군.
자식들의 눈도장을 찍는 거였군.
슬쩍 바너드의 옆구리를 찌르며 소곤거렸다.
“저 애 예뻐?”
“몰라.”
“괜찮아. 나한테만 말해 봐.”
“너한테 말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다 소문나지 않을까?”
“쳇.”
눈치는 빠르구나.
별장까지 가는 내내 오랫동안 마차를 타서 지루하긴 했지만, 밤이 되면 천장 있고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어서 좋았다.
강호행을 할 때엔 노숙은 기본이요, 돈이 없으면 식사도 길거리 국수나 만두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정말 돈 한 푼 없으면 그냥 숲에서 나무 열매를 따서 먹거나 들짐승을 사냥했지.
나야 독이 있는 과일이나 나무뿌리를 먹어도 멀쩡하지만 내 일행은 그러지 못했기에 내가 먼저 먹어 보고 판단해야 했다.
그럴듯한 별호를 가진 흑도를 만나면 좋다고 달려들어서 그놈을 때려눕히고 관아로 가서 현상금을 챙기기도 했고.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천화교를 손에 넣은 환 공자와 혼인하고 나선 나 역시 빼도 박도 못하고 마두가 되어 버렸다.
선한 일로 이름을 알리긴 어려운데 마두로 찍히는 건 너무나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