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은 무림 적폐 (73)화 (74/121)

75화 : 열 살, 봄 (7)

“그럼 식물 사전만 읽고 있는 거니?”

“네. 다른 서적은 구하기 힘들어요.”

“하긴, 왕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만으론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겠지. 아, 나중에 나나 다른 분들이 책이나 논문을 쓰면 보내 줄까? 네가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단다.”

“정말요?”

“그럼. 관심 있는 분야가 따로 있니?”

“저는 약초랑 독초요! 적당히 쓰면 약이 되는데 많이 쓰면 오히려 몸에 안 좋다는 게 신기해요. 좋은 거면 많이 먹어야 좋은 게 아닌가요?”

“많이 먹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보통 적당히 먹어야 좋지. 맛있는 사탕도 많이 먹으면 이가 썩고 나중에 당뇨가 올 수 있으니까.”

“들었지, 베로니카? 단 걸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단다.”

“오늘은 케이크 두 개밖에 안 먹었어요.”

나는 항변했고 두 어른은 웃기만 했다. 반박하며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지만 오히려 어른들을 더 웃기기만 했다.

아차, 떠들다가 잊을 뻔했다.

“책에 사인해 주세요.”

“사인?”

“네. 좋아하는 책에는 저자의 사인을 받으면 더 좋다고 했어요.”

“펜은 가져왔니?”

“아!”

그걸 안 가져왔다!

사전만으로 가방이 꽉 차는 바람에 두고 온 것이다.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충격으로 굳어 버리자, 아버지는 근처를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펜과 잉크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시종이 비품을 가져다준 덕분에 나는 사전에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펜과 잉크를 가져다준 시종에게도, 사인을 해 준 라디반 후작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책은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라디반 후작과의 대화는 유익했다.

내가 어려운 책을 읽는 데다가, 책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게 맘에 든 건지 후작은 제국으로 돌아간 뒤에 내게 줄 만한 논문과 책이 나온다면 선물해 주겠다고 했다.

말로만 그럴까 봐 나는 손가락을 내밀고 약속하자고 했다.

“그래. 약속하마.”

“약속.”

“그런데 전부 제국어로 되어 있어도 괜찮니?”

“열심히 읽을게요.”

주는 게 어디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황자님도 같이 오셨다면 좋았을 텐데.”

“안 오셨어요?”

“많이 피곤하신지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셨단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아쉽다. 내가 황자란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면 유이사가 관심 가질 필요 없다고 막아 대서 더 궁금했는데.

아쉬운 대로 나는 라디반 후작과 이야기하며 내가 관심 있는 건 꽃이 아니라 약초와 독초라고 거듭 못을 박았다.

아버지는 옆에서 내가 의학과 약학 서적을 읽는 걸 봤다며 지원해 줬고, 후작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왕국의 여학교 소식은 제국에서도 화제입니다. 공녀님이시라면 분명히 학교에 다니실 테고…… 나중에 제국으로 유학을 와도 좋을 것 같네요.”

“제국 아카데미에 여학생을 받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여기사 학교도 설립했으니 조만간 아카데미에 여학생을 받는 것도 가능해질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꽉 막히신 분이 아니시니까요.”

“저기-.”

“응? 왜 그러니, 베로니카?”

“아카데미가 뭐예요?”

“아.”

내가 모르겠다고 말하자 아카데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듣자 하니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더 심도 있게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단체라는 모양이다.

공부 좋지.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공부하고 싶진 않다.

‘유학엔 관심이 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제국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요.”

“나중에 제국에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해 주렴. 아카데미에 관심이 있다면 편입도 도울 수 있단다.”

“네!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책 많이 보내 주세요.”

내 말이 맘에 드는지 그는 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적당한 책과 논문을 추려서 공작가로 보내 주겠노라 다시 한번 약속했다.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돈 한 푼 쓰지 않고 제국어 책과 논문을 획득했습니다.

슬쩍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도 웃고 계시긴 했다. 그런데 자기 딸이 자기보다 오늘 처음 만난 외국 귀족이랑 더 친해 보여서 묘하게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아이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아버지에게 쪼르르 다가가서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파티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아빠! 나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래서 오빠보다 더 대단해질 거야.”

“그래, 베로니카는 할 수 있을 거야.”

“아빠가 최고야!”

그제서야 아버지도 마음이 풀린 건지 나를 번쩍 들어선 꼭 안아 주었다.

……내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어서 오래 들고 있진 못했지만.

***

제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 열린 파티.

화려하게 꾸민 홀에선 불이 꺼지지 않았고, 그 바깥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밤에도 환히 불이 켜져 있어 마치 낮과 같았다.

하지만 파티장과 떨어져 있는 별궁까지 그 소란이 전해지진 않았다.

사절단에 포함된 대부분의 귀족이 파티에 참석했고, 별궁에 남은 건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에 남은 황자뿐이었다.

화려한 파티장과는 정반대로, 별궁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하기엔 묘하게 체온이 낮은 그를 걱정하여 제국에서 따라온 의사가 약을 지어 줬다. 왕궁에 있는 의사에게도 진찰을 받았지만 상태가 나아지진 않았다.

그저 기운이 없다는 말에 영양제만 처방받았을 뿐.

황자는 소란스러운 게 싫다며 시종에 호위 기사까지 전부 물리고 홀로 방에 남아 있었다.

아직 봄이지만 밤공기가 차다면서, 시종은 따뜻한 물주머니를 몇 개나 가져와 침대를 데워 준 뒤에야 방에서 나갔다.

‘하필 외국에 나와서 아프다니.’

그래도 세른스트로 오는 길에 앓아누운 게 아니라 다행이라면서,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오는 길에 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격이니 뭐니 입방아를 찧어 대는 놈들이 많았을 거다.

장남인 그가 열두 살, 그 밑의 동생들도 연년생 혹은 세 살 아래.

다 크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주변인들이 난리였다.

불 꺼진 방 안의 침묵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 소년은 조금 이르게나마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수면제라도 처방받았어야 했을까. 고민하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들썩였다.

분명 시종이 잠금장치를 걸고 나갔을 텐데.

활짝 열린 창문으로 새어 든 바람이 거칠게 커튼을 흔들었다.

태풍이 오는 것도 아닌데, 거센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커튼에 제 몸을 부딪치며 들이닥쳤다.

그리고.

“……아, 데려갈 수 없는 고귀한 분에게 이능이 임했네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암살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어조.

알타이르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제 몸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을 입은 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타박타박 가벼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자신을 노려보는 침대 위의 소년을 보고 침입자는 미소를 지었다.

“한낱 어린아이였다면 그대로 데려갔을 텐데, 어떠신가요? 그 힘이 눈을 뜨면 분명 주변에 피해를 입힐 텐데.”

“넌 누구지?”

“상아탑에 대한 괴소문은 세른스트보단 위그노스 제국에서 더 유명하죠.”

“……아이를 데려가는 마법사.”

그 말에 침입자는 미소를 지었다.

얼굴조차 가리지 않은 불청객, 흰옷의 괴도가 태연하게 말했다.

“상아탑에 머리 좋은 사람이 있긴 하지만 황자를 데려가면 제 멱살을 잡고 흔들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약속을 하는 게 어떨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사람을 부르기 전에 돌아가라.”

“그렇게 말하면 선량한 마법사는 마음이 아파요. 지금은 사람들이 마법을 인정하지 않지만, 곧 그 힘의 유용성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약속해 줘요. 그 힘이 폭주하지 않게 도울 테니 추후 상아탑이 감추었던 모습을 드러낸다면 지지해 주기로.”

“내가 황실의 핏줄을 잇긴 했지만 그런 약속을 할 힘은 없다.”

“고작 구두로 하는 약속일 뿐인 걸요? 하지만 장차 당신이 이 약속을 넘어서 우리와 계약을 할 정도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돕겠습니다.”

흰 모자를 쓴 백금빛 머리카락의 남성은 알타이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아탑의 괴담.

세른스트보다 땅이 배는 넓은 제국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이상한 일이 생긴다.

한 마을이 화마에 휩싸였다.

생존자인 어린아이를 구출해 고아원에 데려갔다.

고아원에 화재가 일어났다.

다시 찾아갔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런 괴사건에 휩쓸려 사라진 사람의 소문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가십거리로 떠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든 평범한 어린아이의 실종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 아이가 고위 귀족이 아니라면 다들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이니까.

그러던 중 상아탑이란 존재가 알려졌다.

특이한 힘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를 ‘마법사’라고 부르며,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진 이들을 데려간다는 장소였다.

어디서부터 퍼진 소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저 괴담에 불과했던 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알타이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다. 서늘할 뿐이다. 그러니 환상을 보는 게 아니다.

괴이한 마법사는 날 선 반응에도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추후 제국을 거머쥘 수 있게 돕겠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상아탑에게도 그 은혜를 베풀기를.”

흰옷의 남자는 알타이르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치곤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소년의 몸에 퍼져 있던 냉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서늘함이 사라지고, 미지근해진 몸에 다시 온기가 차올랐다. 눈이 휘둥그레진 소년과 시선이 마주치자 흰옷의 마법사는 웃었다.

“힘을 다스리는 법을 안다면 약점 또한 감출 수 있죠. 지금 당신이 마법사란 게 밝혀지면 큰 흠이 되겠지만 무사히 성인이 되고 나선 오히려 힘이 될 겁니다.”

“너는 대체 누구지? 어떻게 날 찾아와서 이런 걸-.”

“이름은 좀 더 친해지면 알려 줄게요. 그럼 이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 이는 그대로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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