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친구 동생이나 동생 친구나 (4)
‘좋아하는 곰돌이 인형’을 ‘조아하는 곰도리 인형’이라고 쓴 것 같았는데, 이젠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나랑만 놀아 준대!’
유이사가 있으니까 그가 앞으로도 쭉 베로니카를 독차지할 수는 없겠지만, 딱 하루만이라도 베로니카랑 놀 수 있게 되는 거다!
뭘 하고 놀아야 할까? 베로니카 누나는 뭘 좋아할까?
까만 고양이랑 개구리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데 개구리 인형이랑 개구리 모양 빵을 준비해야 할까?
루이드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는 아몬드를 안은 곰돌이 쿠키였다.
‘곰돌이 쿠키랑 개구리 쿠키를 준비해 주라고 해야겠다!’
분명 베로니카도 좋아할 것이다.
언제 만나서 놀자고 해야 할까? 날짜를 정해야 하니 그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베로니카가 예쁜 편지를 써 줬으니 루이드 역시 예쁘게 꾸민 편지지에 답장을 적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예쁘게 꾸밀 수 있을지 몰라서 루이드는 한참을 우왕좌왕했다. 이것저것 해 봤지만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유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자기 몰래 베로니카와 연락했다고 꿀밤을 먹을 게 분명했다.
괜히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루이드는 큰맘 먹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게 나라고?”
“응!”
막내 동생의 반짝거리는 눈을 본 엘렌은 황당해하며 하늘을 한 번, 바닥을 한 번 쳐다보곤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나한테 도와 달라고? 편지지 꾸미는 걸?”
“응!”
“시녀들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다가 누나가 알게 되면 어떻게 해!”
“아, 하긴. 그런가?”
엘렌은 빠르게 수긍했다.
보통 남자애들은 나이 많은 여자 형제보다 나이 많은 남자 형제를 더 무서워한다는데 어째, 루이드는 유이사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왕세자로서 공부하느라 바빠 애들한테 신경을 못 써 주니 그런 건가? 하긴 유이사의 주먹질이 무시무시하긴 하다. 엘렌은 그 꿀밤 맛을 가장 많이 봤을 막내를 살짝 동정하며 말했다.
“자, 그럼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 참고로 이 형님은 무지막지하게 바쁘단다. 그러니까 오래는 못 도와줘.”
“나도 편지지를 꾸미고 싶어.”
“생화는 상하고 압화는 따라 하는 것 같고, 그림이라도 그리든가.”
“난 그림 못 그리는데…….”
“내가 그려 줄게. 자, 뭐 그려 줄까?”
“개구리!”
“개구리? 아~ 하긴, 베로니카는 개구리를 좋아하지.”
베로니카가 알면 깜짝 놀라겠지만, 이미 그녀가 개구리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왕국에 퍼질 대로 퍼진 뒤였다.
개구리에서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누나 생일에 개구리를 선물로 줘야 할까?”
“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개구리 육포는 어때?”
“무서워. 싫어. 형아 바보야!”
“너 계속 그러면 개구리 안 그려 준다?”
“싫어. 그려 줘. 형아아-.”
“네가 내 팔을 잡으면 개구리를 못 그리잖아.”
떼를 쓰는 루이드를 적당히 상대해 주면서, 엘렌은 편지지에 색색의 크레용으로 개구리를 그렸다.
녹색 개구리, 파란 개구리, 빨간 개구리, 노란 개구리 등등. 수많은 개구리의 등장에 루이드가 감탄했다.
“와아, 형 잘 그린다!”
“이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왜 개구리 색이 알록달록해?”
“다양해야 예쁜 거야.”
“그렇구나.”
엘렌의 도움으로 루이드는 색색의 개구리가 그려진 편지지를 획득했다.
기뻐하는 막내 동생에게 엘렌이 당부했다.
“루이드, 편지는 바로 편지지에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종이에 적은 뒤에 그 내용이 맘에 들면 이 편지지에 옮겨 적는 거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틀리지 않게. 알겠지?”
“응!”
“다시 그려 달라고 하지만 마라.”
과연 괜찮을까?
솔직히 개구리 그리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다. 그런데 그 횟수가 세 번 네 번 다섯 번…… 더 늘어날지도 몰라 엘렌은 지레 겁을 먹었다.
아무튼 그는 해 줄 만큼 해 줬으므로 발을 빼기로 했다.
쪼끄만 남동생이 제 누나 친구가 좋다고 헤실거리고 있으니, 이걸 응원해야 하나 가만히 있어야 하나 아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장난으로라도 잘 어울린다고 했다간 유이사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찰 거다. 망할 여동생은 동물 사전에서 본 고릴라만큼이나 힘이 셌다.
***
루이드에게서 온 답장은 굉장히 재밌었다.
누구의 솜씨인지 모를 개구리가 잔뜩 그려진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쓴 편지.
얼마나 힘줘서 썼는지 깃펜이 편지지를 뚫어서 생긴 구멍이 여러 개 있었다.
햇빛에 편지지를 비춰 보니 과연, 그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하하.”
참 재밌구나.
루이드가 같이 놀자고 정해 준 날이 있으니, 그날 외출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허락부터 받기로 했다.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쪼르르 달려가 문을 두드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두 분 다 노크를 못 들었는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얌전히 근처의 소파에 앉아서 두 분 중 한 명이라도 내게 관심을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이 엄청 많이 돌았는데.
분침도 스무 번이나 움직였는데 어째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구나.
이대로 가다간 지루해 잠이 들 것만 같아서 아버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아빠!”
“헉!”
“왜 그래? 졸았어?”
“베로니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거니?”
“나 아까 문 두드렸는데. 아빠도 엄마도 나 못 본 거야.”
“그, 그랬구나. 미안하다.”
“나도 미안하구나, 베로니카. 사탕 먹을래?”
“응!”
어머니의 말에 얼른 어머니에게 달려가 사탕 하나를 받았다.
입에 쏙 들어간 사탕은 딸기 맛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박하 향도 나는데…….
“박하- 딸기야?”
“박하사탕이랑 같은 통에 들어 있었거든.”
“아하.”
그래서 살짝 묻은 건가?
나는 입에 들어온 사탕을 오물거리며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갔다.
“아바- 나-.”
“베로니카, 사탕이 많이 큰가 보구나. 삼키지 않게 조심하렴.”
“나 다음에 루이드랑 놀 건데 괜찮아요?”
“막내 왕자님?”
“응.”
말이 어눌해지니 사탕을 볼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한쪽 뺨이 터질 듯 볼록해졌지만 조금 더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나랑만 놀고 싶대서 하루만 그렇게 놀아 주기로 했어요. 평소엔 유이사 언니랑 둘이 놀거나 셋이 노는데.”
“그래? 베로니카는 왕자님이랑 노는 거 힘들지 않겠니?”
“원래 동생이랑 노는 건 힘든 거예요.”
“하하. 그렇긴 하지.”
아버지는 쉽게 허락해 주었다.
대신 내가 루이드랑 둘만 놀았다는 걸 유이사가 알면 단단히 삐질 테니 조심하라며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의 의견도 비슷했다.
아직 어린애들이니 둘이서 논다고 해도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만 할 거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리고 약속한 날이 되어서 몰래 루이드를 만나러 갔을 때.
“누나!”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의 머리카락이 약한 바람에 흩날렸다.
제 궁의 뒤뜰에서 간식을 먹고, 좋아하는 곰 인형과 함께 놀자고 한 루이드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못 참고 달려왔다.
그때 까졌던 무릎은 다 나은 건지 잘 달렸다. 긴바지를 입어서 상처가 어떤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리 안 아파?”
“네! 안 아파요!”
“다행이네.”
“누나랑 같이 먹으려고 간식 많이 준비했어요. 얼른 와요!”
루이드는 내 손을 덥석 잡고 테이블로 데려갔다.
깔끔한 흰색 접시 위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과자가 있었다.
그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녹색 개구리 얼굴 모양 쿠키였다.
녹색 쿠키에 하얗고 까만 초콜릿으로 개구리 얼굴을 그려 논 거다.
“누나가 개구리 좋아한대서 준비했어요.”
“이제 별로 안 좋아해.”
“허억……!”
“괜찮아. 쿠키는 좋아해.”
“그럼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루이드는 아몬드를 안고 있는 곰돌이 쿠키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바로 쿠키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우유 마실 건데 괜찮아요?”
“응.”
“저는 우유를 먹고 무럭무럭 자랄 거예요.”
“그러렴.”
“북부 사람들은 우유를 많이 먹어서 키가 엄~~청 크대요!”
“그럼 나도 키가 커지겠네.”
그런데 루이드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뭐지, 내가 무슨 말을 해 주길 바란 거냐.
애들 마음은 알 수가 없네.
침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에 과자 부스러기가 조금 묻긴 했는데 괜찮겠지.
“베로니카 누나,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곰 인형이에요.”
“크네.”
“폭신폭신해요.”
갈색 곰 인형을 만져 봤다. 루이드의 말대로 폭신폭신했다.
놀러 온 내게 루이드는 제가 가지고 있는 곰 인형들을 자랑했는데 그 종류가 꽤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남자애는 인형 갖고 놀지 말라고 하는데, 아빠랑 엄마는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곰 인형이 많아요!”
“나도 개구리 인형이 있어.”
“그치만 누나가 곰 인형을 갖고 싶다고 하면 줄 수 있어요.”
“나는 남의 인형을 탐내지 않는단다.”
내 말에 루이드는 또 시무룩해졌다.
쟤는 즐겁게 말하다가 풀이 자주 죽는구나.
대체 왜 그런 건지 모르겠네. 성격인가?
유이사가 매사 기운이 넘치고 활기차니 반대로 동생인 루이드는 기가 약한 걸지도 모른다.
음, 생각할수록 내 추측이 맞는 것 같다.
“누나는 제가 막 존댓말 쓰는 거 이상해요?”
“뭐가?”
“유이사 누나는 이상하대요.”
“자기가 무슨 말투를 쓰든 그 사람 맘이지.”
“어린애는 애답게 해도 된대요.”
“그건 맞는 말이지. 나도 옛날엔 아무한테나 반말하고 다녔어.”
지금은 경어를 쓰고 있지만, 내가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면 아무에게나 반말 쓰고 다닐 거다.
기다려라, 낭인 생활!
나는 아직도 강호행을 포기하지 못했다. 이쪽 식으로 표현하자면 떠돌이 용병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