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검술은 핑계고 (1)
가르친 보람이 없게 그가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면 저 괴도는 그를 상아탑으로 데리고 도주할 것이다. 그럼 알타이르는 상아탑에서 목숨을 부지한 채 죽을 때까지 마법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제국인은 아니에요.”
“뭐가요?”
“방금 이상형 물어본 거 아니었어요? 일단 제국인은 아니라고요.”
“왜요? 이유가 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미없다며 투덜거리고 김이 팍 샜다며 흐느적거리던 인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알타이르는 뭐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투로 답했다.
“그야 제국 귀족들은 다 쓰레기니까요.”
“하하. 당신이 왕관을 얻게 되면 다 그 밑의 신하가 될 텐데도?”
“그전에 물갈이를 할 테니 괜찮을 거예요.”
“희대의 폭군이 탄생할 거라는 예고인가요? 그럼 저는 미래의 폭군이 될 마법사 황제의 비밀 교사? 와, 나중에 마리카가 알게 되면 저 혼나요. 그렇게 되진 마세요.”
“마리카?”
“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말 돌리는 것 봐라.
어차피 저 허술한 인간은 나중에 또 저 이름을 흘릴 게 분명하다.
지금은 꼬투리 잡지 않고 넘어가 주겠다면서 알타이르는 손바닥을 보았다.
꽁꽁 얼었던 손바닥은 녹은 지 오래였다.
아직은 힘을 다루는 게 서툴러서 마력을 집중하는 손이 얼어붙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나중엔, 분명히 손톱 끝에도 서리를 만들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겠지.
그날이 기대되었다.
그는, 악착같이 살아남아 기필코 황태자가 될 것이다.
***
“저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응?”
그래, 역시 이쪽의 검술도 배워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면서 싸움의 기술을 배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배운 적도 없는 검술을 쓰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테니 뭐라도 익혔다는 증거를 하나라도 남겨 놔야겠지.
치밀한 계획 끝에 이렇게 말했는데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갑자기?”
“오빠 연무장에 남은 목검 휘두르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어요.”
“그렇긴 하겠구나. 알겠다. 내가 알아보마.”
“와!”
아버지의 의욕을 북돋아 주기 위해 열심히 기쁨을 표현했다.
방방 뛰면서 아빠가 최고라고 외치니 아버지가 하하 웃으면서 꼭 좋은 선생님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호신용으로 배우면 좋을 것 같아요.”
얼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실전 검술도 좋지만, 괜히 집중하다가 내 본 실력이 나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간단한 것만 배우는 게 나았다.
배운 건 얼마 없는데 실전에서 큰 활약을 한다? 그럼 잠들어 있던 내 천재성이 깨어났다고 하면 되겠지.
바너드에게 연무장이 생기고 나서 내가 맨날 그 뒤를 따라다녔다는 걸 아는 아버지는 즉시 내게 검술 선생을 붙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네? 검술요? 아가씨한테요?”
“어떻게 그런 일을……!”
“아무리 공작님 명령이라고 하셔도 그건 좀……. 아가씨께서 다치실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나름 고민 끝에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줄 만한 기사들에게 말을 꺼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낱 기사인 그들이 어찌 아가씨를 훈련시키느냐는 말이었다.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자고 사전에 입을 모은 것처럼 똑같은 변명만 해 대니, 내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오빠도 하는데! 나는 왜 안 돼?”
“그야 훈련이란 무지무지 힘든 일이랍니다. 그러다가 다치실 수도 있어요.”
“배우다 보면 당연히 다칠 수도 있지.”
“아뇨. 다치면 아주 아픕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 직접 검을 배운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고 강한 호위를 두시는 게 어떤가요?”
“싫어! 나도 배울 거야!”
어린애처럼 바닥에 드러누워서 버둥거리면서 떼를 쓰지는 못하지만, 나는 있는 힘껏 얼굴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그러자 기사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뭐, 저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귀하디귀한 아가씨 고집 들어주다가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다치지 않을 자신도 있고, 저들이 얼마나 힘든 훈련을 시킨다고 해도 다 할 수 있다.
뭘 하든지 중원에서 내가 겪었던 일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테니까!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동굴이었고, 거기서 살아남으려고 온갖 것을 다 집어먹고 비급을 얻은 뒤엔 혼자서 수련했는걸!’
게다가 나는 이미 단전이 자리 잡은 몸을 내 방식대로 훈련하고 있었다. 체력도 근력도 성인 남성의 평균 수준을 웃돌 텐데, 다들 하나같이 몸을 사리다니.
결국 한숨을 푹 쉬었고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답답한지 똑같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니, 그대로 순순히 돌아서면 어쩌자는 겁니까!
내가 급히 아버지 손을 붙잡고 물었다.
“아빠? 그럼 나 검은?”
“아무래도 우리 집 기사들은 안 되겠구나. 외부에서 데려오마.”
“네!”
내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참으로 다행이다.
사실 이 수도의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은 죄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이 집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라 나랑도 진작 안면을 텄지.
그래서 나를 자기 부하들 굴리듯이 굴릴 수는 없어서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게 잘 보이면 진급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쑥덕거리고 있었다.
뭔 소리를 하나 궁금해서 내공으로 청력을 강화해 엿들어 보았다.
“갑자기 왜 검을 배우신다는 걸까?”
“우리가 못 미더워서 그런 거 아냐? 훈련을 좀 더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답이 없다.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하는 거였어!”
“게다가 아가씨는 어렸을 적에 납치당하신 적도 있잖아. 근접 호위가 필요해.”
자기들끼리 알아서 좋게 해석해 주니 다행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계집애가 헛바람 들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우습게 보고 한 발 걸치려 든다고 해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머리가 단단히 굳은 중원인은 지능이 장강 사는 붕어와 비슷해서, 건드리면 안 되는 상대에게도 떡밥에 달려드는 물고기처럼 시비를 걸곤 했다.
내가 남장을 하고 있을 적엔 내 곁에 제갈세현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는데도 법석이 심했다.
세현이 건방지고 콧대 높은 계집이라 아무와도 결혼하지 못할 거라 악담을 늘어놓았으면서, 그 옆에 번듯하게 잘생긴 내가 있으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비렁뱅이가 귀한 아가씨를 꼬드겼다고 욕하는 거다.
당시엔 그녀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 소소하게 설사약을 먹이는 식으로 시비 거는 놈들을 골탕 먹이곤 했다. 아마 내장에 낀 살들조차 쏙 빠질 정도로 호되게 고생했을 거다.
후에 혼자서 강호행을 하다가 환 공자를 만났을 땐 누가 나한테 무례하게 군다 싶으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환 공자가 죄다 패 주었다. 물론 나도 그놈이 마시는 차에 설사약을 타는 식으로 소소한 반격을 했다.
애초에 중원 무림에서도 여인의 신체가 사내에 비해 연약하여 같은 무공을 익혀도 대성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있었다.
여고수가 등장하여 그 편견을 깨부수려고 해도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려웠고.
내가 고수이긴 했어도, 막판에는 무림맹을 상대로도 적의를 드러냈으니 음, 무림 역사에 내가 어떻게 새겨졌을지는 뻔하다.
내 무공의 근본을 따지고 들어 스승인 사독진왕이 몸담고 있던 당가의 어느 족보에 끼워 넣었을지, 혹은 환 공자와 혼인한 것을 따지고 들어 마교 인물 쪽에만 끼워 넣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흉악하고 강대한 거악(巨惡)으로 묘사했겠지.
“베로니카, 아빠가 꼭 좋은 선생님을 데려오마.”
“네!”
안 좋은 선생이면 내가 내쫓을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검술 선생을 구하기 힘든 건지 일주일이 지나도 아버지에게선 별말이 없었다.
설마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슬슬 떼를 써 보려고 할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베로니카, 아빠가 선생님을 구해 보려고 했는데.”
“네.”
“우리 집안 기사들은 하나같이 소중한 아가씨를 부하들 대하듯 굴릴 수는 없다고 하더구나.”
“그럼 오빠는 부하처럼 굴렀어?”
“으으음…….”
내 물음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래, 바너드는 우리 집안에 봉사하는 기사한테 기초 훈련을 받았잖아. 걔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냐는 말이다.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더니 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그들이 거듭 못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외부에서 데려오기로 했단다. 전하께 상담하니 왕실 기사 중에 적당한 인물을 보내 준다고 하더구나. 일주일에 두 번.”
“적어.”
“하지만 기사님이 오지 않았을 땐 베로니카가 혼자서 훈련하면 되지. 그럴 수 있지?”
“어쩔 수 없죠.”
일주일에 두 번이 어디냐.
아버지가 충분히 노력한 결과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 그때 만난 기사님들한테도 꼭 그렇게 말해 주렴.”
아버지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실 뿐이었다.
공작가 기사가 아니라 왕실 기사가 내게 검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어머니와 파필로나 부인 모두 놀란 듯했다.
특히 파필로나 부인이 크게 놀랐다.
“왕실 기사에게 교육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