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이번에도 나는 그때처럼 (1)
루나, 오웬, 그레이스.
세 아이는 나와 약속했다. 남몰래 힘을 기르면서 나를 위해 쓰겠다고.
‘너희에겐 재능이 있다. 나는 그 재능을 일찍 발견해서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거다.’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고아원으로 흘러들어 온 아이들은 인정과 애정에 목말라 있어서, 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어린애들은 이토록 순진하다.
‘그나마 재능이 있긴 하니까.’
이들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고작 저잣거리 무공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어려운 일은 더 강한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까.
이 애들은 그러니까…… 고아원에 심어 놓은 내 첩자 같은 거다. 여기서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이 애들은 내게 바로 알려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첩자의 수를 점차 늘려 갈 거다.
나이가 찼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애들을 모아 우리 집에서 하인, 하녀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다 가르친 후에는 추천장을 써서 다른 곳에서 일하게 해 주고, 정기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라고 할 거다.
그저 안부 인사만 한 줄 짧게 쓰는 건 어색하니 분명 여기선 잘 지내고 있고, 뭘 먹었고,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소상히 적어 주겠지.
짧게 몇 달이라도 공작가에서 교육받았다고 하면, 아무 교육 없이 다른 저택에서 일하는 것보다 조건도 훨씬 나을 거다.
애들에게도 좋고, 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고.
중원의 모든 정보와 소문을 수집한다는 개방이나 하오문도 처음엔 이런 것부터 시작했을 거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정보를 쌓아 가는 것.
……물론, 그 두 단체와 비교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하오문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개방은 무리다.
중원이야 거지가 아무 데서나 구걸하고 있어도 ‘에잉, 저기 웬 거지가 있단 말이냐’ 하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개방 거지면 건드렸다간 개방과 척을 지는 셈이니 잘 싸우려 하지도 않고.
그런데 여기에선 함부로 구걸하고 다니면 아무한테나 맞거나 경비병이나 순찰대에 잡혀 가니까…….
역시 하오문이 낫다. 걔네는 이곳저곳에 손대서 돈이라도 잔뜩 벌어 번쩍이는 저택이나 주루를 세워 놓고 정보 팔며 장사하니까. 돈이 있어야 어려운 일도 쉬워지는 법이다.
비록 하오문이 그 돈에 집착해 사람 목숨을 날벌레 목숨쯤으로 여기고, 인력이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며 사람을 도구쯤으로 보는 집단이긴 하지만, 그건 우두머리의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고.
내 목표는 직원 복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하오문이다.
***
고아원 감시하고 애들 가르치다 보니 가을에서 겨울이 된 지도 오래.
충성 맹세를 받았으니 한시름 덜려고 했는데, 다른 데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엄마, 이 찻잎은 뭐예요? 비싼 거예요?”
“그리 비싼 건 아닌데 왜 그러니?”
“냄새도 이상하고 색도 별로고, 버리면 안 돼요?”
“그러렴.”
평소 어머니와 차 마시는 시간엔 내가 차를 준비하곤 해서 몰랐는데.
모처럼 어머니와 함께하는 티타임에, 어머니가 내온 차의 향을 맡자마자 이상이 있음을 눈치챘다.
독은…… 아닐 거다. 설령 독이라고 해도 그리 위험한 독은 아니다. 아마 장기간 복용했을 때 문제를 일으키는 종류일 거다. 그 정도로 미약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마셨는지는 몰라.’
그러니 식사와 차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어머니에게 함께 차를 사러 가자고 졸랐다. 다행히 어머니는 동의해 주셨다.
상단에서 괜찮은 찻잎을 구입하고, 집에 돌아와선 식당의 찬장을 직접 확인하며 수상한 것을 가려냈다.
어머니가 마시는 차는 담당 시녀와 하녀가 관리한다고 해서, 방 옆에 딸려 있는 시녀들의 휴게실까지 쳐들어가 확인했다.
수상한 것들은 그야말로 모조리 골라냈다. 어찌나 미량의 독인지 내가 아니면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들이 봤을 땐 전혀 문제가 없는 멀쩡한 찻잎이라, 과발효 혹은 오래되어 곰팡이가 폈다고 여길 수준이랄까.
“왜 그러니, 베로니카?”
“뭔가, 뭔가 수상해서요.”
“그렇구나.”
어머니는 많은 걸 묻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줬다.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나를 보고 파필로나 부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베로니카? 아주 바빠 보이는구나.”
“네. 바빠요. 부인도 조심하세요. 오래된 찻잎에는 벌레나 곰팡이가 생길 수 있거든요.”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맙구나.”
“무척 징그러운 벌레일 테니, 손수 하지 마시고 하녀들을 시키세요.”
어머니에게 해가 될 만한 짓을 할 사람은 저 사람뿐이긴 한데 증거가 없으니 원.
게다가 어머니가 언제부터 이상한 게 섞인 차를 마셨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당분간 차는 나랑만 같이 마셔야 한다고 어머니의 치마를 잡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럼 그렇게 할까?”
어머니는 어리광에 기뻐하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상한 게 있다면 내가 바로 골라낼 수 있다. 아직 먹은 독이 적어서 세상 모든 독을 아는 건 아니지만, 냄새만으로도 뭐가 섞인 건지 아닌지 정돈 알 수 있으니까.
이 손으로 의술을 하는 건 무리고, 무엇보다 아직 나는 의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미천해 한번 상하기 시작한 장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보양을 해 줄 약을 지을 수는 있지만, 지금으로선 약을 만들 기구나 약초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니, 당분간 어머니가 먹는 것을 철저히 관찰하다가 이상한 것이 있다면 가려내고 누가 그걸 준비한 건지 알아내 몰래 잘라 낼 준비를 해야 한다. 앞으로 더 복용하지만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해독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눈이 내릴 시기가 되었다.
바너드가 올 때쯤에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녀석은 눈사람이 다 돼서 집에 돌아왔다.
올해도 무사히 마친 녀석은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오빠, 괜찮아?”
“응…… 괜찮아. 머리가 많이 아플 뿐이야.”
“감기 걸린 것 같다. 생강레몬꿀차 타 오라고 할게.”
“아냐, 됐어.”
“특별히 생강 듬뿍 넣어서 만든 거 있어.”
“그래서 싫어.”
하지만 바너드는 결국 내가 타 온 생강레몬꿀차를 마셔야 했다.
생강을 듬뿍 넣은 만큼 꿀도 듬뿍 넣어서인지, 바너드는 말없이 꼴깍꼴깍 잘 마셨다.
차 덕분에 바너드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
며칠 동안 내린 폭설로 눈이 두껍게 쌓이자 나는 또다시 눈 밟기에 도전했다.
경공의 수준을 알아보려면 눈 내리는 밤이 딱이다.
초상비야 내 눈으로 관찰하기가 어려우니, 흔적이 남는 것으로 경지를 알 수 있는 눈이 딱이지.
눌리거나 패인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한 눈 무더기를 확인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꽤 그럴싸한데?”
슬슬 밤놀이 준비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여기서 ‘밤놀이’라 하면 밤에 장사하고 활기를 띠는 곳을 조진다는 뜻이다.
조진다는 건? 당연히 흑도 놈들의 지갑을 터는 일이고.
오랜만에 하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곳의 흑도들도 돈을 잔뜩 쌓아두고 있을까? 당연히 그러겠지?
바너드에겐 비밀이다. 알면 깜짝 놀라서 따라온다고 할 텐데 바너드의 경공과 은신술은 아직 수준이 낮다.
게다가 학교에서 얼마나 바빴는지 또 무공 실력이 퇴화해서 온 게 아닌가.
이대로 뒀다가 학교에서 주화입마라도 온다면 큰일이라서 내가 손수 교정해 줘야 했다.
그리하여 바너드가 방학을 맞이한 지 일주일째, 나는 허리에 손을 짚고 말했다.
“오빠 잘 들어. 내가 오빠를 미워해서 때리는 게 아냐.”
“그, 그럼……?”
“이건 추궁과혈이라고 하는 건데, 기의 순환을 돕기 위해 때리는 거니까 나를 너무 원망하진 말아 줘.”
“어쨌든 때리는 거- 으아악!”
퍽! 퍼버벅! 빠각!
연무장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너드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기혈이 애매하게 막힌 것 같으면서도 안 막힌 것 같은, 아무튼 때리면 좋을 곳을 딱딱 골라내서 때렸다.
바너드는 연무장에서 수련한다고 핑계 대고 왔고, 나는 낮잠 잔다고 사람들을 다 물린 뒤에 방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엿보는 사람도 없다.
추궁과혈 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끄윽- 끄으윽…….”
“많이 아파?”
“죽을 것 같아…….”
“걱정 마. 안 죽어. 내가 신기한 거 하나 알려 줄게. 단전을 부숴도 처치만 잘하면 사람은 죽지 않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그 말을 마치고 바너드는 기절했다.
너무 야무지게 내공을 실어서 때렸나 보다. 사실 제대로 추궁과혈을 하는 건 나도 힘든데.
바너드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어서 연무장 한쪽에 있는 소파에 눕혀 둔 뒤엔 방으로 돌아가 운기조식을 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정령들을 꼬드겨서 몇 가지 독초를 먹고, 내가 기르는 독초도 꾸준히 복용하다 보니 눈곱만큼씩 독이 늘어났다.
이전에 짐조를 하나 삼켰으니, 이번 생에서도 월경이 오기 전에 일정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 거다.
이토록 어렵게 얻은 내공을 써서 힘들게 추궁과혈을 해 주는 걸, 과연 바너드가 알까?
나한테 맞다가 기절한 게 창피한 건지, 그날 내내 바너드는 나한테 말 한마디 걸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공 수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보법은 하나만 쓰는 게 아니야. 여러 개를 다양하게 쓸 수도 있어. 내가 쓰는 건 보통 기척을 없앨 때 쓰는 거라서, 공격할 땐 다른 보법을 쓰면서 눈을 어지럽혀.”
“……응.”
“오빠가 천뢰보에 익숙해져서 그걸 잘 쓸 수 있게 되면 다른 보법도 알려 줄게. 오빠가 강해져야 나랑 무공을 써서 대련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기대해도 되지?”
“열심히 할게.”
녀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말 안 해 주고, 아무래도 사춘기인가 보다.
……세상에. 내 오빠가 사춘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