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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은 무림 적폐 (102)화 (103/121)

104화 : 이번에도 나는 그때처럼 (5)

여느 다른 귀족들이 그렇듯이, 사생아는 가문의 치부이며 수치였다. 처음엔 부정하며 여자에게 아이를 돌려주려 했지만 그래도 한때 만났던 여자라서 그런가.

처음 만났을 땐 그렇게 예쁘고 생기 넘쳤던 여인이 지금은 뺨이 홀쭉하게 말라 안쓰러웠다. 그렇기에 사내 된 도리로 당연히 책임을 지겠다면서 집안에 들였다.

아내와 아이들의 눈초리가 매서웠지만 했던 말을 번복할 수 없었다.

들여보내 줄 줄은 몰랐다며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을 땐 양심에 찔리기도 했고,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반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남은 건 아이뿐이었다.

그의 아이가 아니라고 고집하기엔 코와 귀의 생김새가 그와 판박이였다.

여자가 죽었으니 자길 돌봐 줄 사람이 없단 걸 알아차린 듯, 아이작은 다른 사람들을 피했다.

처음엔 좀 불쌍했지만, 밖에서 애를 만들어 온 그를 부인이 죽일 듯이 노려봤기에 애한테 신경을 써 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이가 점점 클수록 그보단 죽은 그 여자를 닮아 가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복잡했다. 아내도 무언가 꼬투리 잡을 것만 생기면 죽은 여자를 언급하면서 그의 속을 긁어 놨다.

자연스럽게, 남은 아이는 가족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그래서 버린 건데……!’

고아원이나 빈민가에 떨어뜨려 놓으면 눈에 띄고 만다.

누군가는 마차에서 내린 귀족이 애를 버리고 가는 걸 볼 테고, 꼬리를 밟다 보면 귀족가의 사생아라는 것쯤은 눈치채고 협박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이 많은 시간을 골라서, 가족이 다 같이 외출한답시고 핑계를 대고 길에 버리고 온 거였는데!

설령 순찰하는 경비병이 본다고 해도 그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얼빠진 녀석은 락버드 백작가라는 이름을 대지 못할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럼 자연스럽게 어디에든 있을 법한 흔한 고아가 되는 거지!

그렇기에 그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락버드 백작은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그 불안한 평화는 울면서 달려온 둘째 아들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으아아앙!! 아빠는 바보야! 왜 그딴 짓을 해서는-!!”

“응? 왜 그러니, 케빈? 갑자기 왜?”

“에이미가 그 꼬맹이가 없단 거 알고 나한테 엄청 무섭게 물어봤단 말이야! 걔- 걔가 이제 나랑 안 논다고 하면 어떻게 해? 다 아빠랑 엄마 때문이야!!”

남몰래 좋아하던 여자애가 자신을 냉담하게 대했다며, 케빈은 엉엉 울면서 당장 아이작을 데려오라고 떼를 썼다.

분명 가족회의를 할 때는 제 형인 에이프와 함께 아이작을 언제 쫓아낼 거냐고 불평하던 놈이 그건 기억 못 하고 이러고 있다니.

에이미 시알레의 부친은 베가노스 공작의 밑에서 일하는 관리였고, 그 딸이 공녀와 친구 사이라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그 소녀가 공작저를 방문했다면 자연스럽게 아이작이 있는 걸 봤을 테고,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증거가 있으니 케빈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려고 했겠지.

락버드 백작은 둘째 아들의 태세 전환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로써 깨달았다.

베가노스 공녀가 데려간 게 바로 그가 거리에 버리고 간 그 애가 확실하다는 것을.

그리고 여기서 말과 행동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면, 가문이 단숨에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오후 티타임.

아이작이 어른들을 어려워해서 그 애만 데리고 차를 마셨다.

접시 위에 올려 준 쿠키를 만지작거리던 아이작은 내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이젠 익숙해졌는지 나와는 눈을 잘 맞춰 주었다.

“만약 널 버린 이들이 너를 데리러 온다면 어떻게 할래? 난 그저 아이를 버리고 간 부모의 얼굴이 궁금하다고 잘 포장해서 말한 것뿐인데 바깥에서는 굉장한 괴담이 되어 버린 모양이라서.”

“어…… 어떤 괴담이요?”

“우리 아빠가 감히 내 딸의 눈앞에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 놈들을 광장에 매달아 버리려 하신다거나?”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있어요?”

“글쎄? 믿으니까 점점 퍼지는 거겠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처음의 그 형태를 잃고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마련이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쿠키를 집어 먹었다.

잠시 후, 주방장 특제 시나몬 롤이 김을 풀풀 풍기며 비어 있던 테이블 중앙을 차지했다.

주방장이 두꺼운 장갑을 낀 채 뜨끈뜨끈한 빵을 가져다주자 나는 보란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칭찬했다.

“와! 갓 구운 빵이야! 난 베일리가 만들어 주는 게 제일 맛있더라.”

“감사합니다, 아가씨.”

“응. 오늘도 고마워!”

“뜨거우니 잘라 드리고 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빵 굽는 것부터 시작해서 서빙에 커팅까지.

나는 열심히 주방장을 칭찬했고, 그는 기쁨을 감추려고 했지만 얼굴에 번지는 웃음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네모난 팬을 가득 채워 구운 빵을 집게로 하나씩 떼어 내 나와 아이작의 그릇에 덜어 준 뒤, 주방장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다.

“얼른 먹어 봐. 맛있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네…… 그, 공녀님은 일부러 어린애인 척하시는 건가요?”

“응? 그건 왜?”

살짝 뜨끔해서 내가 물었다.

그러자 아이작은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어른분들을 대할 때 유독 목소리가 가늘고, 그…… 귀, 귀여운? 그런 느낌이셔서요.”

“아.”

보통 어린애들은 안 그러는구나.

부모님 눈에 나는 아직 아기니까 귀여워 보이려고 그러는 것뿐인데.

저택 고용인들도 내가 방방 뛰면서 어린애답게 돌아다니면 감추려고 하면서도 귀여워 죽겠다고 얼굴로 다 표현하고 있고.

그런데 진짜 아이인 아이작의 눈에는 좀 과해 보였나 보다.

반성해야지.

“내가 원래…… 친한 사람들에겐 애정 표현을 잘 한단다.”

“이상하다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그래,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어서 빵이나 먹자.”

아이작은 제 말이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여긴 건지 시무룩해졌다.

그런 애를 달래면서 나는 주방장 특제 시나몬 롤을 마음껏 먹었다.

아이작은 하나만 먹으려고 해서 접시에 두 개를 더 덜어 줬다. 이 맛있는 빵을 하나만 먹는다는 건 아까운 일이다.

“내가 아까 물어본 거, 곰곰이 잘 생각해 봐.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아마, 괴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들은 널 버린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데려가려고 할걸? 넌 돌아가고 싶어?”

“아뇨…… 아니, 모르겠어요……. 저는 그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걸요. 저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많은 한심한 바보 멍청이예요.”

세상에. 어쩜 이런 점마저 그 녀석과 똑같을까!

자존감과 자존심이 바닥을 치던 당천의가 그 성격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면 딱 이런 말을 했을 거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의자를 끌어와 아이작의 옆에 두고 앉았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나뭇가지처럼 마른 소년을 꼭 안아 주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어. 너도 아직 잘하는 걸 찾지 못한 것뿐이야.”

“그렇게 말해 주시는 건 공녀님뿐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쓸모 있을 필요는 없지.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네 존재가 중요하다면 그걸로도 괜찮지 않을까? 아, 이건 되게 위험한 말이네. 그래!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거야. 한 사람에게 목매는 건 좋지 않단다.”

재빨리 내가 한 말을 수정했다.

중원에서 워낙 많은 인성 파탄자와 인생 망한 자를 봐 와서 그런가…….

아이작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한다. 되려면 차라리 당천의처럼 자기를 괴롭히고 무시하던 녀석들을 싹 없애 버리고,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나도 아직 어린애라 할 수 있는 게 없네. 내가 갖고 있는 힘은 미약하고 권력은 없지. 타인이 나를 두려워하는 건 내 아버지의 권력을 두려워해서야. 내가 아닌 내 뒤에 있는 존재에 겁을 먹는 거지. 나는 그들이 내 집안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나 자체를 두려워하면 좋겠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뭐든지 배워 나갈 거고.”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무서워할 수 있게…….”

“하면 돼. 남은 시간 동안 나랑 같이 공부하자.”

이 아이의 가족이 언제 변명 꾸러미를 가지고 올지 모르겠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다.

내가 아이작에게 처음 추천한 건 제국어였다. 내가 익히고 있는 분야라 가장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도 하고, 외국어를 잘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고 일종의 보험도 준비하기로 했다.

시장에 나갈 시간이 없어서 집에 있는 도구를 사용해 말린 독초를 가루로 만들었다. 네 가지 독초를 모두 빻은 뒤에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와 꿀도 살짝 섞었다.

그다음 내가 직접 먹어 보면서 독성을 판단한 뒤, 쥐가 다니는 길목에 음식과 섞어서 만든 함정을 두고 실험했다.

마지막으로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깎아서 반지처럼 만들고, 패인 홈에 내가 만든 독환(毒丸)을 끼워 넣었다.

“선물.”

“선물……?”

“미리 말해 두는데 이거 위험한 거야. 만약 네가 고난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으면 이걸 그냥 먹으렴. 이 동그란 것만. 먹으면 바로 즉사야. 하지만 너를 괴롭힌 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면 이걸 반으로 쪼개 같은 비율의 설탕과 민들레 뿌리에 섞으렴.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테니.”

“네……?”

“조금 먹는 걸로는 효과가 없어. 타인을 죽이려면 두 번이 한계야.”

아이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진심이었다.

나는.

전생에도 이 아이와 비슷한 사람에게 같은 선택지를 내밀었다.

네가 죽을지, 아니면 널 괴롭히던 이들을 죽일 건지.

당천의는 후자를 택했고 승리했다.

그럼 아이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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