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새외의 흑도를 박살내는 법 (4)
한 움큼 집어 든 금화를 제 주머니에 집어넣자 소년이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뭐, 뭡니까?”
“나 들여보내 준 보답. 다음에 또 올게?”
“……솔직히 말하면. 안 왔으면 좋겠는데요.”
“왜?”
“어린애가 올 법한 곳은 아니잖아요. 당신은…… 보통 애가 아닌 것 같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네.”
“손님들이야 못 보던 광경이라 들뜬 것 같지만요. 저 없었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건 알죠? 저도 으음, 들여보낸 걸 후회하고 있긴 하지만. 재밌어 보여서 들여보낸 것치곤, 진짜 재밌긴 했지만 이거 출혈이 크네요.”
소년은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지독한 연초와 술 냄새.
도박 중독자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그 순간에 건다.
돈을 잃고, 가족도 버리고, 나중엔 제 자신마저 죽여 버리는.
사기꾼의 손목이나 손가락을 망가뜨리는 건 이곳이나 중원이나 마찬가지다. 빚을 갚지 못해 팔려 가는 사람도 많겠지.
그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에 흑도와 사파가 자리를 잡는다.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 그럼 안녕.”
소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어두운 골목길로 타박타박, 들으라는 듯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가로등과 등불이 미약하게 닿는 곳에서 아예 닿지 않는 곳까지.
‘미행이 있군.’
하긴, 도련님이라 불릴 정도의 사람과 함께 있었으니. 게다가 돈도 많이 땄고.
……딴 만큼 많이 잃었지만 어쨌든 벌긴 벌었으니까.
내 모습이 어린애니 겁박해서 돈을 뺏기만 할 테지만, 순순히 잡혀 줄 이유는 없다.
이 돈은 내 조직을 만드는 데 쓸 테니까.
은신술을 써 모습을 감췄다. 허둥지둥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딱 봐도 흑도같이 생긴 놈들이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척을 숨기고 그 모습을 보다가 이동했다. 감춰 놨던 망토를 회수해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내 부재를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
다음 외출도, 그다음 외출도.
나는 같은 드레스를 입고 도박장을 돌았다.
다른 곳에도 가 봤는데 아무래도 맨 처음 갔던 곳은 꽤 큰 도박장이었던 모양이다. 소규모 도박장은 그때 봤던 소년처럼, 나를 보호해 주려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 여자애가 도박장을 기웃거리니 심심풀이로, 애가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왔고 얼마나 게임을 잘하는지 보려고 들여보내 주기도 했다.
내 주전공은 룰렛이라서 몇 판 해서 돈을 왕창 불리곤 그대로 사라졌다.
뒤쫓는 이들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나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선지 북서쪽 거리에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도박장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거금을 따고 사라지는 여자애 유령.
도박장에서 거금을 잃은 아비가 딸을 팔았는데, 그 딸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서 나타난다나?
웃기는 소리였지만 의외로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꽤 많았다.
단순히 재밌어서 떠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게다가 우습게도 도박장을 드나드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도박장의 유령이 도박하는 사람들에게 뿌리는 개평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에 몰려드는 것이었다.
일부는 소문의 유령을 보기 위해 일부러 왔다가 허탕을 치고 가기도 했다.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하나?”
내가 잡힐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잖나. 이 두 손 말곤 가진 무기도 없는데.
벌어들인 돈은 서랍장에 꼭꼭 잘 숨겨 뒀다. 다음에 외출할 때 금고라도 하나 사야지, 원.
그리고 금화도 같은 값어치를 가진 금괴 같은 걸로 바꿔 놓으면 보관에 더 용이하려나?
처음 방문한 도박장은 유령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으로 유명해져서 문전성시였다.
내가 만났던 소년도 이따금 입구 주변에서 보였다.
그는 도박장 근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가, 시간이 늦으면 돌아갔다.
‘날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가 다시 도박장에 가서 돈을 얼마나 털어 갈 줄 알고 기다리겠는가.
‘혹시 내가 못 들어가게 살살 구슬리려고 하는 건가? 흠, 모르겠다.’
나는 지붕 위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대화를 엿들었다.
내가 준 금화를 도박할 때 쓰지 않고 간직한 사람도 있었는지, 큰 소리로 허풍 섞인 허세를 늘어놓았다.
“내가 그때 그 꼬마 아가씨에게 받은 금화가 이거란 말이지-!”
“다른 금화랑 차이가 없는데?”
“어허! 그 유령이 여기서 딴 돈이니까 당연히 그렇지! 이 금화를 내가 따악 내기에 걸었다! 그러면 둘 중 하나야. 절대로 잃지 않든가, 잃는다고 해도 금방 내 손으로 돌아오거나!”
“저놈 저거 취했나? 뭔 헛소리야?”
그래, 돈 많이 벌어라.
나중에 내가 다 가져갈 테니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도박장이 번성하는 걸 구경했다. 양민들 돈 빨아먹는 게 기루와 도박장이지만, 다 자기들이 좋아서 갖다 바치는 게 아닌가.
지켜보다가 이따금 간섭하고, 드레스를 입고 온 날에는 도박장 분위기를 살피고.
낮에도 밤에도 움직이려니 피곤했지만 운기조식은 빼먹지 않았다.
바너드에게 매일 하라고 강요했는데 내가 안 하면 안 되잖아.
나중에 꼭 정령 핑계 대고 오랫동안 한군데 틀어박혀서 수련을 하고 마리라.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한쪽에선 도박장의 유령을 보기 위해 사람이 몰리고, 다른 한쪽에선 사사건건 일을 방해하는 까만 옷의 수상한 난쟁이를 잡으려는 이들이 나타났다.
둘 다 나이므로 즐겁게 구경했다.
백 날 천 날 돌아다녀 봐라, 내가 잡히나.
다만 역용으론 얼굴을 바꿀 수는 있어도 타고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이 나와 내 어머니뿐이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마다 외출을 나가 거리를 살폈는데, 중간중간 내가 훼방을 놓은 탓에 북서 거리를 나눠 먹고 있는 세 조직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더니 결국 충돌하고 말았다.
서로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세 조직 중 파블로냐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 보스의 아들이 피습을 당한 거다.
그리하여 관의 눈을 벗어난 흑도 무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흠? 내가 한 짓은 아닌데.”
구경이나 해야지.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싸움 구경이로다.
마침 잘됐다며 지붕 위에서 기웃거리면서 열심히 구경했다.
하루 만에 끝날 싸움이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도 했다. 경공을 써서 빠르게 달려도 강화된 안력으로 어두운 골목도 훤히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알아본 바, 세 조직 모두 고만고만해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주기가 좀 그랬다.
“병사들 눈 피해서 잘 싸우네.”
중원이야 ‘관과 무림은 서로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지만 이곳은 다르지 않나.
어떻게든 안 들키려고 아득바득 숨기면서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꼴이란.
누구라도 좋으니 어서 하나만 남아라. 내가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해 주마.
그날도 평소처럼 건물 지붕을 막 밟으며 돌아다녔다.
곧 어디 하나가 망할 징조가 보여서 오늘은 좀 바삐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았다.
‘저쪽이 라파르라는 조직 본거지랬지? 아, 마차다!’
그때 보스가 머무르는 저택에서 여러 대의 마차가 빠져나갔다.
사방으로 도망치는 마차 중에서, 하나를 골라 따라갔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는 골목에서 튀어나온 다른 마차와 부딪쳐서 사고가 났다. 말 울음소리가 길게 늘어지면서, 라파르 저택에서 나온 마차가 뒤집어졌다.
일부러 달려와 부딪칠 정도라니. 나는 혀를 차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차 문이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비틀거리면서 나왔다. 개중엔, 열여섯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도 있었다.
“저번에 봤던 애네.”
내가 처음 도박장에 발을 들이려고 했을 때, 도와줬던 애다.
라파르 조직원이었구나.
평범한 조직원이 아니라 보스의 아들쯤 되는 인물인지, 같은 마차를 타고 있던 이들은 소년을 지키려는 듯 둘러싸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들이 탄 마차를 공격한 마차의 마부는 거세게 부딪친 충격에 꼼짝도 못 했다. 안타깝게도, 라파르 조직원이 탄 마차의 마부는 죽은 것 같았다.
“공격해라!”
“일단 잡아! 죽여!”
마차 사고가 났는데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들은 골목에서 무기를 든 채 달려 나오는 놈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소년은 다리를 절뚝이는 게, 아무래도 사고 때문에 발목을 접질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호위 셋은 소년을 지키려고 했지만 머릿수부터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었다.
“도, 도련님!”
“어서 도망치십시오!”
어떻게든 앞을 막아서고, 제 몸을 찌르는 칼을 붙잡고 버티면서 외쳤다.
의리는 있는 이들이구나.
하지만 한쪽 다리를 절면서 도망치는 건 무리였기에, 소년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잡힐 것만 같았다.
나는 지붕의 벽돌 한 조각을 떼어서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던졌다. 두툼한 벽돌이 소년에게 칼을 휘두르려는 놈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컥!”
“허업!”
“누구냐!”
“안녕.”
얼굴을 보여도 괜찮다. 어차피 본 놈들은 다 죽일 테니까. 가볍게 건물 지붕에서 뛰어내린 나는 혼란스러운 싸움판 한복판에 착지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나를 보고 놈들이 당황한 사이, 한 놈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바로 놈의 목을 베었다.
사람의 가죽과 근육, 뼈를 가르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불쾌했다.
촤악, 어둠 속에서 퍼지는 피의 색은 질척하고 역겨웠다.
나는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나 잡으려고 그동안 애를 썼더라?”
“그……!”
“난쟁이!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존재했을 줄이야!”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난쟁이가 뭐야.”
변조한 목소리는 남성의 것도 여성의 것도 아니었다.
내 소문을 들은 건지 놈들의 표정이 더욱 흉흉해졌다. 어서 덤비라는 듯 손을 까딱이자, 말로 도발할 필요도 없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