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태학궁
매달 한 번, 제도의 세자들을 위해 태학궁이 개방되었다.
개방 시간은 딱 하루였다.
오전에는 시사예의(詩詞禮儀)를 가르쳤고 오후엔 궁내의 무도(武道) 전적들을 무료로 대중들에게 개방했다.
사실 이는 용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 보았자 웃음거리만 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풍부단을 복용한 용진은 이미 풍부성의 형태를 응집해냈다.
비록 아직 형태에 불과한 데다가 영기도 얼마 저장하지 못하긴 하나 그래도 경락의 저장량보다는 많았다. 경락을 하천이라고 한다면 단전은 모든 강을 용납할 수 있는 바다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보통 단전을 기해(氣海)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천은 용량의 제한을 받곤 한다. 때문에 지탱해 주는 단전 없이는 아주 빨리 말라버린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풍부성의 응집과 함께 전부 해결되었다. 지금 중요한 건 풍부성의 형태를 응집했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힘만 충족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완전한 풍부성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용진도 자신만의 첫 번째 '단전'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구성패체결에서 가장 변태적인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
게다가 용진은 비록 구성패체결의 전부 운행 법문(法門)을 갖고 있긴 하나 하늘을 거스르는 이 공법(功法)에 대한 요해가 아직 많이 부족했다.
때문에 용진은 구성패체결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했다.
그가 완전한 풍부성을 응집하게 되면 대량의 영기를 저장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간결한 혈맥을 통해 응혈경(凝血境)에 들어가 대번에 진정한 무인이 될 것이다.
용진은 현재 자신의 취기경이 몇 중천이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풍부성의 형태가 형성한 걸 보면 그의 몸이 많이 강화된 것 같았다.
취기경은 무술 수련 입문의 제 일 단계였다. 오직 응혈경에 발을 들여야 만이 온몸의 피가 들끓고 전투력이 상승하는데 이래야 만이 진정한 무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그는 주먹을 뻗는 간단한 동작에도 바람 소리가 났고 오 척 밖의 꽃병도 부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온몸에 기운이 뻗쳤다.
그가 이번에 태학궁은 온 이유는 무도 전적을 보기 위함이었다. 풍부성이 응집되어 체내에 영기가 충족해졌으니 이젠 무도 전기(戰技)를 수행해도 무리 없을 것이다.
무도 전기는 자신의 영기에 근거하고 맥락(脈絡)의 추세를 통해 얻어낸 전투 기교를 말한다.
무도 전기는 무인들로 하여금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전투력까지 평소의 몇 배로 상승시켜 주어 용맹하기로 적들이 당해낼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전기는 모든 무인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전기를 수련할 영기가 생긴 용진도 하루속히 전기를 익히고 싶어 했다.
태학궁은 제도의 북측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부지 면적이 십 리나 차지했다.
태학궁은 황궁을 제외하고는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용진은 요패(腰牌) 검증을 받은 뒤 태학궁에 들어섰다. 그는 곧 문학전(文學殿)으로 달려갔다. 오전 수행은 이곳에서 이뤄졌다.
그는 오전 내내 도학 선생에게 시사예의, 문학 전고 등 따분하기 그지없는 이론을 들어야 했다.
문학전에 들어선 용진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일찍 온 탓에 널따란 문학전에 세자가 열댓 명밖에 없었다.
"하하, 용 형 왔는가?"
용진이 문학전에 들어서자마자 몇 명의 소년들이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저들도 용진처럼 각기 다른 이유로 수련을 할 수 없게 된 소년들이었다. 비록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무인만이 존중받는 봉명제국에서 저들은 비록 용진 만큼 괴롭힘을 심하게 당한 건 아니지만 늘 사람들의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때문에 저들은 용진을 멀리하지 않았다.
특히 오랜만에 보는 용진이 오늘 유난히 반갑게 느껴졌다.
"하하, 생각보다 일찍 왔구려."
용진도 웃으며 인사했다. 풍부성의 응집 성공으로 기분이 좋은 용진은 전보다 훨씬 밝은 모습이었다.
"며칠 전 용 형이 이호와의 결투에서 이겼다 들었소. 난 그 일로 용 형을 다시 보게 되었다네. 자네는 이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오?"
깡마른 사내 한 명이 무척이나 부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신과 동급이라 여겼던 용진이 삼중천의 이호를 이겼다는 소식을 듣자 놀란 한편 용진이 부럽기도 했다.
"헤헤, 운이 좋았을 뿐이오. 하나 내 요즘 확실히 신기(神技) 하나를 새로 배우긴 했네."
용진은 이 화제를 길게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괜히 비밀스럽게 말했다.
"신기? 그건 무엇이오?"
역시나 신기라는 말에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내 뒤바뀌었다.
말 돌리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헤헤, 내 최근 상법(相法) 비적(秘籍) 한 권을 얻었는데 상술(相術)을 공부하고 깨달은 바가 많네."
용진이 살짝 우쭐하며 말했다.
"상법? 그건 저잣거리에서 순 사기나 치는 점쟁이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지 않네. 내 최근 상술을 연구하며 깨달은 바가 많네. 그날 이호의 관상을 보니 미간이 거뭇거뭇하고 이마에 매(霉)가 낀 것이 딱 재수 없을 징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 그의 결투 신청에 응한 것이요. 결과는 뭐, 다들 알다시피 헤헤."
용진은 웃음으로 뒷말을 대체했다.
모두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용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누군가 확신에 차 말했다.
"난 용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듣건대 그날 이호가 마치 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몸에 전투력 하나 없이 용 형에게 당하기만 하지 않았나?"
용진과 이호가 결투한 일은 모두가 익히 들어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호가 패배한 것에 의문을 품었다. 때문에 용진의 말에 신뢰가 갈 수밖에 없었다.
"헤헤, 용 형이 그렇게 관상을 잘 본다고 하니 내 관상도 조금 봐줄 수 있겠소? 내 약혼녀는 대체 왜 자꾸 나와 만나기를 피하는 것이오?"
누군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되고말고. 일단 적당한 자리부터 찾는 게 좋겠소. 이곳에 서서 관상을 보기엔 적합하지 않네."
용진의 말에 사람들은 구석 쪽에 놓인 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상 위엔 세자들이 먹을 수 있게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
용진이 상 위에 놓인 떡을 가리키며 다정히 말했다.
"하나 드시게."
"알겠네."
그자도 사양하지 않고 떡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이해되지 않은 듯 용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맛이 어떤가?"
"맛있소."
"하나 더 드시겠는가?"
"하나 더 먹겠네."
사내는 떡 하나를 또 집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입밖에 먹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용진의 의도를 깨달은 사내는 용진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용 형의 가르침 잊지 않겠네. 이제야 알 것 같네. 사실은 내가 욕심을 부린 것이네. 용 형의 제시는 나더러 만족을 알라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용진에게 경복했다.
그들은 용진의 도행(道行)이 이렇게까지 깊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떡 하나로 사람을 반성시키니 말이다.
그러나 용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내가 자네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건 이거네.
살이 그렇게 찌고도 계속 먹어대니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이대로 계속 먹어대다간 곧 대문도 지나가지 못하겠소. 그러니 자네의 약혼녀가 혼사를 물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네에 대한 크나큰 존중이니 만족하라는 것이네. 어떤 여인이 자네 같은 사내 곁에서 자고 싶어 하겠는가? 자네가 자다가 뒤척이기라도 하면 자네의 부인은 아마 깔려 죽을 것이네."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용진의 말에 그는 오 척 키에 사 척 너비의 제 몸집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살짝 뚱뚱한 것 같긴 했다.
"우 뚱보, 자네는 용 형의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얼른 가서 살이나 빼게. 용 형, 헤헤, 내 관상은 어떤가?"
"자넨……."
용진은 마치 정말 그렇기라도 하듯 괜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자네의 관상은 서른 살 전까지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관상이네. 하나 다행히 서른 살 뒤엔……."
사내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하면 서른 살 뒤면 인생이 풀린다는 말인가?"
"아니, 서른 살 뒤면 자넨 가난에 익숙해질 것이네."
용진이 말했다.
"……."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웃고 떠드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순간, 방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용진은 사실 진작에 그가 왔음을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호가 그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다친 데는 좀 어떤가? 참 다행이네. 위는 괜찮아 보이는데 아래는 어떤가? 아래도 괜찮은가?"
용진이 친절하게 물었다.
이호의 이마에 순간 핏줄이 섰다.
용진의 무릎에 맞은 이호의 소중한 그곳은 엉망진창이 되었었다.
이씨 가문에서 연약(煉藥) 공회(公會)의 약사를 모셔온 것도 모자라 대량의 금폐까지 들여서야 이호를 원상 복구시킬 수 있었다.
돈이 참 좋긴 좋은 것 같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호의 얼굴이 정상인과 별반 차이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용진의 말에 이호는 곧바로 조건 반사처럼 거시기가 아파 왔다. 마치 용진의 발에 차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용진의 발길에 하마터면 영영 아랫도리를 쓸 수 없게 될 뻔했다.
가장 이가 갈리는 건 집에 가서야 불알 한쪽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호의 하인들이 허둥지둥 연무대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연무대가 깔끔히 치워진 뒤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불알 한쪽은 들개가 물어갔다고 한다.
깨어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호는 너무 화가 나 하마터면 또다시 기절할 뻔했었다.
하지만 이는 이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
연약사(煉藥師)가 아무리 대단해도 새로 불알 한쪽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비록 걷는 데는 문제 없었지만 대칭되어 있어야 할 물건 한쪽이 사라지자 느낌이 무척 생경했다.
용진이 그 일은 언급하자 이호의 낯빛이 검게 변했다. 그가 용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용진, 이 잡종 새끼야. 너랑 아주 끝장을 본다 내가. 왜 도전에 응할 담이 있냐?"
히죽히죽 웃던 용진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잡종은 아주 모욕적인 단어일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어머님을 모욕하는 말이기도 했다.
'죽여달라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정 그렇게 죽고 싶다면 허락해주지.'
"이번에도 난 내기를 하고 싶네."
용진이 이호를 응시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고 하니 조금 더 의미 있게 죽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필경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닌가?
그는 이호의 죽음이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좋아. 네가 뭘 걸든 다 응하면 될 거 아니야."
이호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어차피 저놈은 오늘 죽을 텐데 뭘 걸든 상관없었다. 저번에는 방심한 탓에 저 자식에게 패했지만, 이번엔 절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은 저번과 달랐다. 오늘 이호가 말한 건 생사 결전이었다.
저번에는 그냥 결투였다. 비록 상대를 죽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저번에는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기만 하면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사 결전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연무대에 올랐다는 건 즉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설령 패배를 인정한다고 해도 승리한 쪽이 상대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내일 오후 삼각, 생사대에서 봐."
이호는 죽은 사람을 쳐다보듯 용진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용진도 속으로 냉소했다. 일벌백계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이호가 가려가자 용진이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걸을 때 조심하시게. 자칫하다간 평형을 잃을 수도 있으니."
용진의 말에 뒤돌아 가던 이호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버렸다.
용진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는 마치 방금 용진의 말을 못 들은 척 천천히 문학전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용진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찔렀다. 다리를 들 때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상기되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떠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걸음걸이가 어색해졌다. 사람들도 그를 괴이하게 바라보았다.
이호가 오리걸음을 걸으며 멀어지자 용진 옆에 서 있던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귀띔해주었다.
"용 형, 대체 어쩌려고 응한 것이오? 이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생사 결정이란 말이오."
"괜찮네. 오늘 저자의 관상을 보아하니 눈썹 언저리가 어둡고 사기가 맴도는 것이 곧 저승 갈 관상이네. 저자는 내일 죽을 것이네. 아, 내 자네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말을 마친 용진이 이내 그들에게 작게 뭐라고 속닥였다.
용진의 말을 사람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우 뚱보라 불리는 사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용 형의 부탁이니 내 재산 전부를 내놓겠네. 다 가져가시게."
말을 마친 우 뚱보가 꺼낸 건 팔만 금폐였다.
용진은 우 뚱보가 이렇게 의리 있게 나올 줄 예상치 못했다.
비록 그들 모두 왕후 세자이긴 하나 대부분이 방계 출신이어서 가문에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이 금폐는 우 뚱보에게 있어서는 거금일 것이다.
"제기랄, 내게도 육만 금폐가 있네. 가져가시게."
"난 삼만 금폐 밖에 없네. 용 형, 이정도 밖에 내놓을 수 없어 미안하네."
"나도……."
용진은 저들에게 끽해야 팔천이나 혹은 만 금폐쯤 밖에 빌리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저들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내가 만약 죽게 보면 이 돈을 다 돌려받지 못하게 될 것이네."
용진은 손에 들린 금폐를 바라보며 모두에게 귀띔했다.
"용 형,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게요? 수행을 못 한다는 이유로 평소 저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많이 당했는데. 용 형이 저들과 죽기 살기로 맞서 싸우겠다는데 같이 싸워주지는 못해도 이 정도쯤은 지지해줄 수 있네." 용진이 이호의 생사 결전에 응하자 모두 함께 이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가슴이 뜨거워진 그들은 용진의 부탁에 앞뒤 재지 않고 모두 발 벗고 나섰다.
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준 이들을 가슴 깊이 새겼다. 수중에 있는 이십 몇 만이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일행이 문학전에 들어서자 떠들썩했던 문학전이 일순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