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한데, 아벨. 자네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일순간.
아벨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진정한 정체?’
시시각각 그를 죄어오는 압박감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걸 방해했고.
마그누스가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한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벨은 끝끝내 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전 길거리를 전전하던 고아입니다.”
한 번 입을 열자 그 뒤는 쉬웠다.
“운이 좋아 이렇게 아카데미에서 배움을 얻을 기회를 얻었지요. 혹시 제 신분이 미천한 게 문제인지요?”
“뭐? 그럴 리가!”
마그누스가 황급히 부정의 말을 내놓자, 동시에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델 모도르 아카데미에 목표인,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것에 있어 신분은 중요하지 않네! 애초에 그런 의도로 질문한 것도 아니고!”
아벨은 마그누스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안도하지 않았다.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호탕한 듯 말을 걸어오다가 갑자기 위압감을 끌어올리며 난감한 질문을 해왔던 것을.
지금 모습도 일부러 꾸며낸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아벨은 더욱 과장하여 감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크흠, 그래. 무언가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것 같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였네.”
마그누스는 다시 아벨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건넸다.
“이전까지 따로 기간트 운용이나 여타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
“훈련이라면……. 거리를 전전할 적에 몇 번 가르침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오, 누구에게?”
“일반적으로는 용병이나 퇴역한 병사들입니다. 일하던 술집의 단골들이었거든요.”
“……그렇군.”
그 대답에 마그누스는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의례적인 질문이었네. 입학 허가가 나기 전에 이미 조사는 다 끝난 상태였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래. 자네는 앞으로…… 아니, 이미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 뛰어난 재능에다가 혁혁한 공까지 세웠으니.”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중요한 건 앞으로 자네가 공을 세운 만큼 더 많은 지원을 받게 되리란 것이네.”
마그누스는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더욱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고.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그 말뜻은 아주 간단했다.
마그누스는 혹여 아벨이 첩자라든가, 다른 무언가를 숨겼을 가능성에 관해 언급한 것이다.
‘제국이 강대국이라고는 하나, 대적할만한 국가가 없는 건 아니니까.’
지난 대전쟁은 대륙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제국은 여전히 가장 강대한 국가로 꼽히지만, 대전쟁 이전처럼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위치까진 아니었다.
특히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더욱 인재 유출이나 첩자의 존재에 경각심을 기울이고 있을 테고.
‘꼭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지만.’
물론, 아벨은 그런 의심을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마그누스는 그저 의례상 물어본 것이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말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슬슬 본론을 꺼낼 차례군. 현재 학기 중이니만큼 따로 표창장 수여는 없을 거네.”
“예.”
예상했던 일이었다.
황실에서도 이번 일을 더 이상 크게 키울 생각은 없을 테니까.
“대신 자네에겐 두 가지 상이 준비되어 있네. 하나는 바로 활동비네.”
“활동비 말입니까?”
“그래. 아카데미에는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생도에게 더욱 정진하란 의미로 활동비를 지급하지. 이렇게 일찍 결정되는 사례는 드물지만.”
마그누스는 아벨에게 앞으로 매달 활동비가 지급될 것이며, 원하는 용도로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이것이네.”
이어서 마그누스가 건넨 건 다름 아닌 은색의 ‘패’였다.
아벨은 그것을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아채고는 눈을 반짝였다.
“이건……?”
“개인 훈련장 이용 권한이네.”
마그누스는 간단히 설명했다.
“본래 개인 훈련장은 관례상 1학년에겐 주어지지 않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데다가 큰 공까지 세웠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여기서 마그누스가 말하는 개인 훈련장이란, 맨몸으로 검이나 휘두르는 그런 곳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려 기간트를 운용할 수 있는 훈련장인 것이다.
앞서 그가 말한 대로 본래대로라면 1학년은 절대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마그누스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원한다면 다른 재료나 무구로 받을 수도 있네. 조금 무리한다면 비전을 사사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가?”
아벨의 단호한 대답에 마그누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으면서 훈련장 출입증을 아벨 쪽으로 밀었다.
만약 이런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벨은 환호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그 정도로 ‘훈련장’의 가치는 높았다. 어중간한 재료나 무구, 심지어 비전보다 훨씬 더.
“좋아.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마그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벨도 따라 일어났다.
“그럼, 기대하겠네.”
“감사합니다.”
아벨은 마그누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교장실을 빠져나왔다.
“나왔군. 1층까지 안내하도록 하지.”
밖에는 그를 교장실까지 안내했던 베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벨은 그의 뒤를 따르며 주머니에 넣은 출입증을 만지작거렸다.
빨리 이걸 사용하고 싶은 생각에 몸이 달아올랐으나, 흥분도 잠시.
계단을 내려가며 아벨은 생각했다.
‘당분간은 조심해야겠군.’
마그누스는 의례상 건넨 질문이라고 했지만, 그게 사실일 리 없었다.
‘애초에 그쪽이 본론이었을 테니까.’
단순히 칭찬과 보상을 주려는 것이었다면 마그누스가 직접 나설 일도 없었다.
아카데미의 교장직은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니까.
즉, 애초부터 마그누스는 아벨을 심문하기 위해 부른 것이란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말로 크게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닐 거란 점이었다.
뭔가 명확한 의심이 있었다면 교장실이 아니라 심문실로 끌려갔을 테니까.
이번 일로 눈에 띄는 걸 멈출 생각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 있는 행위는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뭐, 당분간 별일은 없으니까.’
아벨은 애써 무거운 생각을 털어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 * *
일주일간의 휴식 기간이 끝난 후.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다들 멈추지 말고 뛰어! 일주일 쉬었다고 아주 개판이구만!”
체력 단련 담당 교수인 보일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소리쳤다.
“상위 세 명을 제외하고는 열 바퀴 더 뛴다!”
그 말에 생도들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서 달렸다.
하지만 그래봤자 상위 세 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욱, 후욱.”
“좋아! 다니엘! 저기 가서 쉬어라!”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건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딱히 지치지도 않았는지 고른 호흡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벨이 두 번째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짧은 기간 아벨의 체력은 큰 폭으로 성장했다.
입학 전에도 훈련을 게을리 한 건 아니지만, 아카데미는 훈련하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훈련만 해도 됐으니까.
2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후욱, 후욱. 교수님.”
“응?”
아벨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보일에게 말했다.
“혹시 좀 더 뛰어도 되겠습니까? 아직 부족한 것 같아서요.”
“좀 더 뛰겠다고?”
그 질문에 보일은 눈을 부릅뜨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정말 자네는 훌륭한 생도로군! 아주 좋아! 원하는 만큼 뛰게.”
“아, 감사합니다.”
아벨은 보일의 두꺼운 손이 어깨를 퍽퍽 치는 걸 느끼며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교수님! 저도 더 뛰겠습니다!”
“그래!”
그러자 뒤쪽에서 다니엘이 의욕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게 들렸다.
그런 둘을 이제 막 세 번째로 도착한 생도가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벨이 이미 체력이 거의 바닥인데도 다시 달리기 시작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령을 피우기엔 빙의한 게임의 시스템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게임에서 모든 능력치는 극한까지 몰아넣은 상황에서 더 잘 오른다.
거기에 슬슬 체력 능력치가 오르기 직전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벨은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차례대로 생도들이 상위 세 명에 들어서 빠졌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는 아벨과 다니엘만이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쟤넨 진짜 미친놈들인가?”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긴 해……. 난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도 힘든데.”
다른 생도들은 그런 둘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정말 괴물인 다니엘과 달리 아벨은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의지가 굳건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
그렇게 슬슬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체력 능력치가 한 등급 상승했습니다.]
아벨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는 그걸 확인하고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달렸다.
그리고 결승점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멈춰 섰다.
“헉, 허억, 허억.”
“아벨! 고생했다!”
보일이 그런 아벨을 보며 큰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리고 다른 생도들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체력 단련에서 중요한 건 의지다! 의지! 여기 아벨처럼…….”
아벨은 그런 보일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조용히 눈앞에 상태창을 띄웠다.
[아벨]
[종족 : 인간]
[신체 등급 : C]
[동조율 : S]
[마력 : C]
[보유 기간트 : 루푸스]
[스킬 : 뇌격창, 오버플로우, 섀도우 스텝, 더블 어택, 초급 기간트……]
상태창은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벨이 ‘신체 등급’ 항목을 몇 초 동안 응시하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신체 등급 : C]
-체력 : C
-근력 : C
-순발력 : B
-유연성 : C
-……
바로 능력치의 세부사항이었다.
모든 능력치는 여러 가지 세부사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등급은 그 평균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중 방금 체력 등급이 D에서 C등급으로 오른 것이다.
‘잘하면 이번 학기 내엔 B등급까지 올릴 수도 있겠군.’
아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굽혔던 상체를 쭉 폈다.
“자, 모두 아벨에게 박수!”
그 와중에 보일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생도들에게 손뼉을 치라 하고 있었다.
“와아아…….”
물론, 잔뜩 지친 생도들이 보일의 지루한 연설에 열렬하게 반응할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보일은 아벨의 근성을 보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예정보다 일찍 강의를 끝냈다.
아벨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흩어진 틈을 타, 미리 챙겨두었던 체력 회복제를 꺼내 먹었다.
“후우우우.”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빠르게 가벼워졌다.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움직이는 데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마지막까지 아벨과 함께 뛰었던 다니엘이 다가왔다.
“아벨!”
“응?”
“강의도 일찍 끝났는데 훈련장이나 갈래?”
아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얜 정말 괴물인가?’
자신이야 체력 회복제를 먹었다 쳐도 다니엘에게는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즉, 정말로 아직도 체력이 남아돈다는 뜻일 터.
정말이지 비정상적인 체력이었다.
아벨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갈 데가 있어서.”
“갈 데? 어딘데?”
“그런 데가 있어. 좀 있다가 식사 시간 때 보자.”
아벨은 적당히 대답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개인 훈련장이었다.
강의 일정 때문에 드디어 처음 가보는 것이었다.
물론, 단순히 구경 목적으로만 가는 건 아니었다.
아벨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바로 거신의 심장이 든 상자였다.
오늘 그는 루푸스에 거신의 심장을 이식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