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흥분한 아벨은 당장이라도 주변을 탐색하고 싶었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으으윽…….”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은 아벨을 메이가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리하지 마. 다른 애들은 괜찮을 거야?”
“응?”
“휩쓸리기 직전에 멀리서 기간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어.”
“아…….”
메이는 아무래도 아벨이 무리하는 이유가 다른 애들을 걱정해서라고 생각한 듯했다.
실제로는 메시지를 통해 거신이 이미 쓰러진 걸 확인한 아벨이었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가 없는 오해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다.”
“응.”
메이는 간단히 대답하고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벨만 그런 것일 터였다.
메이와 친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반 안에서 따지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메이도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이고.’
게임상에서도 메이는 말수가 적었다.
정확히는 만사를 귀찮아하는데다가 항상 꾸벅꾸벅 졸고 있어 말하는 걸 들을 일이 별로 없었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메이가 아벨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할 거야?”
“응?”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어.”
그 말대로 둘이 있는 장소는 너무 트여 있었다.
눈에 띄기 너무도 쉬운 환경인 것.
“그렇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일단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자.”
“기간트는 놔두고 가야 할 것 같아. 둘 다 기동 자체가 힘들 정도로 망가졌거든.”
아벨의 것은 물론이고 메이의 것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동 과정에서 코어가 파손된 것.
강력한 기운에 노출되어서 과부하를 일으킨 걸로 보였다.
“그럼 주변에 동굴이나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있나 보자.”
“응.”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로서도 당장은 휴식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유적을 찾은 다음에 쉬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유적 근처로 공간이동 했다면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원래 목표도 오늘 안에 유적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윽.”
아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비틀거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순간 잊었던 것이다.
그는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볼썽사납게 넘어지진 않았다.
메이가 다가와 팔을 붙잡아준 덕분이었다.
“아, 고마워.”
“걸을 수 있겠어?”
“천천히만 걸으면 괜찮을 것 같아.”
아벨은 그리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찌릿한 고통에 금방 인상을 찌푸렸다.
메이는 그런 그를 보다가 갑자기 잡고 있던 아밸의 팔을 당겼다.
아벨이 당황하며 바라보자 메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축해줄게.”
“꼭 안 그래도…….”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서 쉬는 게 합리적이야.”
그 말에 아벨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그냥 걷는 것보단 부축을 받는 게 훨씬 빠를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부탁할게.”
“응.”
아벨은 메이의 부축을 받아 걷기 시작했다.
키 차이가 조금 나서 불편하긴 했어도 혼자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부드럽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 아벨은 메이를 내려다봤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불편해?”
“아, 아니.”
아벨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서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시선도 돌릴 겸, 현재 위치가 어디쯤일지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애석하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다 비슷비슷해 보이네.’
주변에 있는 거라곤 거대한 나무뿐.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계속 걷다 보니 고통도 더욱 커져서 아벨은 그냥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대로면 그냥 나무라도 올라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아벨.”
“응?”
“저기 봐.”
메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엎드려서 들어가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으음. 확인은 해보자.”
내부도 저런 크기라면 쉬는 것이 힘들 테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를 수도 있는 법.
아벨의 말에 메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응.”
메이는 조심스럽게 아벨을 한쪽에 기대게 해준 후,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벨은 딱딱한 돌벽에 등을 기댄 채 생각했다.
‘마력 탈진…… 생각보다 무섭네.’
머리로야 마력 탈진이 찾아오면 몸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그 이상이었다.
만약 마지막에 치명타를 입히는 데에 실패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곧바로 정신을 잃었으니.
‘다음에는 좀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겠어.’
그때 상황에서는 나름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반성해야 했다.
“아벨.”
자아 성찰이 거의 끝나갈 때쯤, 메이가 굴속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며 그를 불렀다.
“안쪽은 생각보다 넓어. 들어올 수 있어?”
“응. 괜찮아.”
메이는 살짝 고개를 끄떡이고는 다시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아벨은 잠시 기다렸다가 몸을 숙여서는 포복하듯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짜 죽겠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데 포복까지 하려니 정말로 죽을 맛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속 바깥에 있다가 거신의 파편이라도 마주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도 통로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쪼그려 앉을 수는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아벨은 오리걸음으로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까지 펼 수 있었다.
“여기야.”
곧 메이가 보였다.
아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대답했다.
“생각보다 넓네.”
“응.”
넓어져봤자 얼마나 넓어질까 했는데, 끝에 도달하니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쪽에는 웬만한 집의 거실보다 넓은 공간이 있었다.
바닥도 평평하고 천장도 제법 높아서 쉬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 정도면 여기서 하루 정도는 보내도 괜찮겠는데?”
“응.”
메이는 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벨은 아무렇지 않게 한쪽으로 가서 앉은 다음 메이에게 말했다.
“나 명상 좀 할게.”
“응.”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드러눕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명상을 통해 회복에 집중해야 했다.
마력이 고갈된 상태이기에, 우선 마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나면 신체 회복도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아벨은 아예 가부좌를 틀고서 눈을 감았다.
원래는 눈을 감고 곧바로 집중해야하지만, 몸의 고통 때문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공간 이동 현상이 일어난 걸 보면 당장 유적 내부에 진입한 사람은 없다는 거겠지.’
이 숲에 있는 유적은 인근에 있는 이들 중 자격이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물론, 유적에 무슨 지능이 있어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선별하는 건 아니고, 특별한 자격을 갖춘 이들을 공간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격은 동조율이지.’
게임상에서도 동조율이 A급 이상이면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유적에 한 명이라도 사람이 들어가 있는 상태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적어도 아벨이 공간 이동 당한 순간 유적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럼 우선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뜻이고.’
유적은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돌파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최소 6시간. 그것도 어디까지나 유저의 경우다.
게임상에서 선지자라는 단체가 유적을 통과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평균적으로 12시간 이상이었다.
‘이런저런 시간을 빼고 나면 최소 8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보면 되겠군.’
아벨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치고서 은근슬쩍 고개를 들려는 조급함을 내리눌렀다.
지금은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조급하게 행동했다간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니.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쉰 아벨은 잡념을 지우려 노력하면서 익힌 지 얼마 안 된 호흡법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는 깊은 명상 상태로 빠져들었다.
* * *
“……벨.”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명상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던 아벨은 미간을 좁혔다.
“아벨!”
그리고 제 이름을 부르는 걸 확실히 들었을 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하얀 피부와 기다란 속눈썹이 인상적인 눈이었다.
“메이?”
“쉬잇. 조용히.”
아벨은 움찔 몸을 떨었다.
메이와의 거리가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벨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곳. 평범한 동굴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메이는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고, 아벨은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 뻥 뚫린 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상에 들기 전까진 벽으로 막혀 있던 곳이었다.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그게 왜 이렇게 메이가 바짝 붙어 있는지를 설명해주진 못했다.
“그런데 왜…….”
“쉿!”
아벨은 그걸 물어보려 했지만, 메이는 다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가까이 붙은 메이의 온기가 아벨에게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보다 아벨의 눈길을 끈 것은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었다.
자세히 보니 메이는 긴장감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쿵-! 쿵-! 쿠웅-!
둔중한 걸음 소리와 함께 저 통로의 끄트머리에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인간처럼 두 발로 걷고 두꺼운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 키가 2m를 훌쩍 넘는다는 점이었다.
쿵, 쿠웅, 쿵-!
그것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대로 지나갔고, 메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가디언이야. 뭔지 알고 있지?”
“응.”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같아 보이지만,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가디언.
이런 유적에서나 가끔 발견되는 ‘병기’다. 즉, 저 통로가 유적으로 연결된 길이라는 것이었다.
아벨로서는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걸 티낼 수는 없었다.
본래 유적이라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고, 당장 가디언의 존재까지 확인했으니까.
메이처럼 잔뜩 긴장한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아벨은 어떻게 유적에 들어가자고 할지 고민하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지?”
“밖으로는 못 나가.”
“응?”
“네가 명상하는 사이에 확인해 봤는데 주변에 거신의 파편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메이는 하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면서 말했다.
“차라리 저 안쪽에서 다른 출구를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때?”
“현명한 판단이네. 당연히 찬성이야.
아벨은 넙죽 동의했다.
메이는 아벨이 곧바로 대답하자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찮겠어?”
“바깥이 더 위험하다며? 그럼 저 안으로 가야지.”
“그건…… 그렇지. 몸 상태는 어때?”
“아.”
아벨은 뒤늦게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명상에 들기 전보다 훨씬 나았다.
통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전처럼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호흡법을 통해 마나를 회복한 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훨씬 괜찮아졌어.”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선은 내가 앞장설게.”
“알았어.”
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벨은 뒤따라 일어나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랑 성격이 완전히 달라 보이네.’
최근 들어 게임에서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는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단순히 말이 많아진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상황이 그렇다고는 해도 묘하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메이의 과거가 떠올랐다.
‘어쩌면 과거의 기억이랑 겹쳐보는…….’
“아벨.”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아벨은 메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빨리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아벨은 방금 떠올린 생각을 우선 접어두고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당장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유적을 탐사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