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레드홀에 있는 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데보라의 대답에 아벨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곧바로 레드홀을 언급한 걸 보면 자그마한 단서라도 가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레드홀은 여러 가지 소문이 많은 곳이죠.”
데보라는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특히 레드홀이라는 이름이 붙은 붉은색의 구덩이는 오랫동안 금지로 여겨졌어요. 알고 계시는가요?”
“예. 그 근처로 갔던 이들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국 탐사대가 그곳을 탐험하고 개발이 완료된 이후에는 비밀이 밝혀졌지요.”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홀은 일반인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엄연히 제국에서 관리하는 구역 중에 하나다.
즉, 엄연히 통제 속에 있다는 뜻이었다.
“레드홀 주변은 마력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접근하는 이들에게 강력한 마력 중독 증상을 일으키죠.”
“한편으로는 그 마력 때문에 거신과 거신의 파편을 끌어들이는 성격이 있고요.”
“맞아요.”
데보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앞선 대화로 예상하셨겠지만, 거신의 유해는 그 레드홀 내부에 있다고 추정돼요.”
“역시 그렇군요.”
아벨은 새삼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확인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번 방학 동안 레드홀에 가려고 한 것 자체가 그 거신의 유해 때문이었으니까.
거신의 유해는 단순히 거신이 죽고 남긴 시체를 뜻하는 게 아니다.
먼 과거.
거신이 잠에서 깨어나 대륙을 유린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태고의 거신.
개중 한 명이 남긴 신체의 일부가 아벨이 말한 거신의 유해였다.
다만, 그것은 명확히 존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전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데보라는 바로 그 점을 언급했다.
“다만, 아직 거신의 유해가 발견된 적은 없지요. 제국 탐사대가 직접 레드홀 내부를 수색했었는데도 말이에요.”
“저도 그걸 꼭 찾으리라 마음먹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보고 싶군요.”
아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거신의 유해를 찾는 것 자체를 걱정하진 않았다.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
거신의 유해는 게임 속에서도 상당히 운이 따라줘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고민 없이 포기할 생각이었다.
레드홀에선 그것 말고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아벨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데보라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기간트에 레드홀의 강력한 마력을 버틸 만한 마력 차폐장을 이식해드릴게요.”
“정말입니까?”
“예. 앞으로 연구에 계속 협조해주시는 대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유능한 협력자를 잃고 싶지는 않거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벨은 씩 웃었다.
원래는 따로 시간을 들여 이식하려고 했던 기능이니 그로서는 큰 이득이었다.
“오늘 여러모로 선물을 많이 받았네요.”
“후후. 마음 편히 뇌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데보라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마음 편한 뇌물이 있을 리가 없지만, 아벨은 씩 웃으면서 알겠노라 대답했다.
하는 일과 비교해 과한 보상이라면 모를까, 데보라도 아벨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걸 더 이용할 생각은 없어도 괜히 마음의 짐을 질 필요는 없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데보라 님도 바쁘실 테니까요.”
“네. 조심히 가세요.”
데보라는 웃으면서 아벨을 문 앞까지 마중해주었다.
아벨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앞에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사흘 후인가.’
사흘 후.
아벨은 레드홀에 간다.
레드홀의 출입 허가는 이미 일찍이 나왔다.
토너먼트 우승 소식에 카울이 고개를 내저으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한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런데도 사흘 후에 출발하는 이유는 아직 기간트 개조가 한참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불카누스 공방에 맡긴 덕에 일정을 더 미룰 필요는 없었다.
아벨은 오늘도 공방에 가볼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 갔다가 불카누스에게 도와줄 거 아니면 방해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고 한 소리를 들어서였다.
‘테마린 님도 거의 죽어가고 있던데.’
듣자 하니 이번 의뢰 때문에 그녀도 거의 불카누스 공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종일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이번 의뢰를 마치고 나면 그녀 개인적으로도 많이 성장해 있을 것이다.
아벨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슬 어두워지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사흘 후의 아침.
아벨은 평소 향하던 마차 정류소가 아닌 격납고로 향했다.
바로 레드홀까지 가기 위해서였다.
안전한 곳은 마차를 통해 이동할 수 있지만, 레드홀은 엄연히 특별 관리 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마차로는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된다.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으니까.
격납고 근처에 이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벨!”
손을 흔들 때마다 요동치는 근육이 인상적인 남자. 바로 카울 교관이었다.
아벨은 곧바로 예를 취하며 인사했다.
“교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은 무슨.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카울은 그리 말하면서도 아벨의 어깨에 척 손을 얹었다.
“이게 소풍 같은 게 아니라는 건 명심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다쳐서 돌아왔다간 교관님을 뵐 면목이 없으니까요.”
“면목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사히 돌아오는 게 중요하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말투는 얼굴만큼이나 험악하지만, 카울은 원래 생도를 꽤나 신경 써주는 편이었다.
당장 레드홀까지 가는 편도 카울이 직접 나서서 좋은 방법을 마련해주었다.
카울은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리고 격납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간트는 이미 실려 있다. 네가 탄 차량의 바로 뒤를 따라갈 거야.”
“예.”
레드홀까지는 학교의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다.
출입구까지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기간트에 탑승한 채 내부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카울이 격납고 문을 열면서 말했다.
“고용한 용병은 그곳에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는다고 했지?”
“예. 학교 측을 통해 공증을 받은 단체입니다.”
“흐음.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싸웠던 상대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가장 처음에 계획을 세웠을 땐 레드홀에 홀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그건 카울의 반대로 간단히 무산되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허가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벨은 계획을 바꾸어 결승전 상대였던 자칼에게 연락해 그의 용병들을 고용하기로 했다.
더 나은 용병들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돈이지.’
용병은 몸값이 비싸다.
그것도 굉장히.
전리품 분배 비율을 조정해 의뢰금을 낮출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비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의뢰금이 저렴한 자칼 용병단을 고용한 것.
“좋아. 더 이상 붙잡고 있으면 욕할지도 모르니 슬슬 보내주마.”
카울은 그리 말하고는 뒤로 물러나며 손을 휘저었다.
아벨은 그런 카울에게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차량으로 걸어갔다.
곧 출발 준비를 마친 기사가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예.”
우우우웅-!
마정석으로 된 동력원이 내는 소리와 함께 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벨은 창을 통해 바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량은 전용 도로를 통해서 제도를 순식간에 빠져나왔고, 속도를 높여 레드홀을 향해 달려갔다.
‘역시 차량 속도가 비교가 안 되긴 하네.’
일반인들은 대부분 차량을 탈 일이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민간용으로 사용되지 않기도 하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마차에 비해 차량은 소음이 큰 편이고, 자연스레 거신의 파편을 끌어들일 확률도 높다.
‘민간에까지 차량이 확대되려면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레드홀은 제도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차량을 타고 이동한 덕분에 고작 나흘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흘째의 이른 새벽.
잠에서 깬 아벨은 창을 통해서 저 멀리 세워진 커다란 건물을 쳐다보았다.
‘저곳이 바로 레드홀의 입구구나’
제국의 기사단 중에 하나가 항상 상주하면서 출입을 관리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거기에 주기적으로 토벌도 해서 그 수가 확 늘어나지 않게 조절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괜히 특별 관리 구역으로 분류된 게 아닌 것.
우우우우웅-.
차량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가 곧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도착했습니다.”
“예.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벨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차량에서 내렸다.
그러자 누군가가 다가와 아벨에게 인사했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말을 건 이는 기사단의 상징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벨은 곧바로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델 모도르 아카데미의 1학년 생도인 아벨이라고 합니다.”
“예. 아벨 생도에 관해서는 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자칼 용병단을 대동하고서 10일 동안 레드홀 내부를 탐색하실 예정이지요?”
“그렇습니다.”
“용병단은 이틀 전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예.”
아벨은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가 아벨을 데려간 곳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응접실이었다.
“용병단 분들에겐 따로 이곳으로 오라고 일러두었으니, 그동안 잠시 탐사 계획에 관해 대화를 나누지요.”
“알겠습니다.”
본래 들어가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절차였기에 아벨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곧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총 10일이라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지점까지 탐사하실 계획입니까?”
“제출한 물자의 경우, 각각 어떤 용도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자칼 용병단의 경우, 아직 실적이 거의 없는 상황인데 어떤 경위로 고용하셨습니까?”
“돌아올 시 전리품의 매각은…….”
질문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사내는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서 꼼꼼하게 질문했다.
하지만 아벨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하나씩 대답했다.
출입이 깐깐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웬만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준비해왔던 것.
사내는 거의 30분 가까이 질문을 퍼부은 후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꼼꼼하게 준비해 오셨군요. 대충 준비해서 무작정 들여보내달라는 사람이 많은데,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 말에 아벨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아벨 입장에서도 과하게 느껴지는 질문이었으니까.
사내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똑똑-.
대화가 막 끊겼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직접 일어나서 문을 열었고, 곧 열린 문으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바로 아벨과 겨뤘던 상대인 자칼이었다.
그는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정중한 태도로 사내와 아벨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시지요. 출입 절차는 모두 끝났으니 원하실 때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사내가 물러난 후, 아벨은 자칼에게 말했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혹시 기간트는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자칼은 곧바로 대답했다.
“티토 급 다섯 기. 보조용 미젯 급 열 기입니다.”
딱 아벨이 요청했던 대로였다.
미젯 급은 본격적인 전투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사실상 무등급 기간트였지만, 탐사에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짐을 나르거나 거신의 파편을 해체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실질적인 전력은 티토 급 다섯 기라고 봐야 했다.
‘가능하면 밀레스 급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의뢰비용이 천정부지로 솟구치기 때문이다.
아벨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다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번 탐사.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