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특별 관리 구역은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사냥터’다.
다른 게임처럼 몬스터를 잡아서 레벨업을 하는 형식의 게임은 아니지만, 전투를 통해 성장하는 건 맞다.
‘방학은 초반에 주어지는 유일한 성장 찬스지.’
다시 학기가 시작되면 당분간 10일 가까이 마음껏 사냥하고 다닐 기회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할 생각까진 없었다.
성장도 어디까지나 목숨이 붙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까.
아벨은 레드홀에서 주의해야할 점들을 한 번씩 떠올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한 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고작 몇 발자국을 내디딘 것뿐인데도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아벨의 기간트인 루푸스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변화를 겪은 상태였다.
우선, 아직 개발 과정에 있던 2세대 코어의 이식을 끝마쳤다.
안정성 면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확실히 그 출력은 이전의 코어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힘이 넘쳐나는군. 아주 만족스러워.
루푸스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벨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칼렛에게서 받았던 삼종 세트 중에 수호자의 방패와 바람의 축복의 개조가 드디어 끝났으며.
마력 차폐 기능과 함께 단단함으로는 최고로 손꼽히는 타르테리움이 섞인 추가 장갑을 장착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밀레스 급 중에서는 거뜬히 상위권에 들리라.
-훌륭한 기간트군요.
아벨이 출입구에 다다르자, 먼저 나와 대기하고 있던 자칼이 말을 걸어왔다.
현재 자칼은 티토에 타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여러 개조를 거쳤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것도 티토 급이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대단하군.’
그 외에 다른 용병들의 티토도 모두 평균 이상은 되었다.
고용주인 아벨로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예.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자칼의 대답에 아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루푸스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건물을 빙 두르고 있던 장벽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열린 문으로 붉은 기가 도는 땅이 보였다.
쿵, 쿵, 쿵, 쿵, 쿵.
문이 완전히 열리자, 티토 급 기간트 두 기가 앞으로 나아갔다.
정찰을 담당한 용병들이었다.
나머지 세 기는 아벨의 기간트를 둘러싸고 그 뒤로는 미젯이 자리를 잡았다.
“후우.”
아벨은 긴장을 가라앉히며 앞을 바라보았다.
경험 많은 용병과 함께였지만, 이번 탐사는 그 누구도 아닌 아벨 본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자칼에게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탐사를 위해 꼼꼼하게 지도를 살피고 계획을 세워둔 아벨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
높임말은 생략했다.
대부분 상황에서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일일이 높임말을 붙이기가 번거로워 미리 생략하기로 정해둔 것이다.
쿵-! 쿵-!
출발 선언과 함께 걸음을 내디디니 용병들도 한 몸처럼 보폭을 맞춰 따라왔다.
현재 전력은 밀레스 급 하나에 티토 급 다섯이다.
티토 중에 두 기는 근접전용이었고, 나머지 세 기는 소형 마공포를 들고 있었다.
어중간하게 근접전을 치르는 것보다는 마공포를 사용하는 쪽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근접전을 맡은 이들은 자칼과 부단장으로서 둘 다 실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력을 생각하면 하급 무리까지도 문제없어. 하지만 중급 이상은 주의해야겠군.’
레드홀에 서식하는 거신의 파편은 대부분이 중급 이하다.
상주하는 기사단이 주기적으로 토벌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아벨의 실력을 생각하면 딱 적절한 수준이었다.
다만, ‘거신의 유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레드홀 근처는 예외였다.
‘언제든 예상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긴 하지만.’
아벨은 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점검하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아직, 거신의 파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 *
아벨과 용병단은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동한 다음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 건 중요하다.
한참 전투를 치르던 도중에 기간트가 퍼지기라도 한다면 대참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번을 이동하고 쉬길 반복했을 때.
“아벨 님.”
휴식을 위해 잠시 바깥에 나와 있던 아벨에게 자칼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
“조만간 거신의 파편과 마주칠 테니 슬슬 이동 시간을 40분으로 줄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동 속도가 느려질 테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레드홀은 이틀 정도 이동해야 하는 거리에 있어서 시간이 부족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휴식 시간이 끝난 후, 정찰 인원을 두 명으로 늘렸다.
정찰을 맡은 용병들은 번갈아 가면서 앞서 이동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이동을 재개한 지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쯤.
-전방에 아이언 베어 무리입니다!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아벨은 그에게 물었다.
-수는?
-총 4마리. 개중 한 마리는 다른 개체보다 덩치가 약 1.5배 정도 큽니다.
-상대할 만하겠군. 주변에 다른 거신의 파편의 흔적은 없었나?
-예.
아이언 베어는 하급에 속하는 종이다.
평범한 거신의 파편보다 훨씬 단단한 금속 외피가 특징으로, 그걸 제외하면 상대하기가 까다롭진 않았다.
-처리하고 간다.
아벨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고, 다른 용병들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병이 말한 방향으로 7분여 정도를 이동하니, 아이언 베어 무리가 언덕 부근에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아직은 거리가 멀어 알아채지 못한 듯하지만, 가까이 가면 무조건 알아챌 수밖에 없다.
따로 능력을 쓰거나 특별한 무장이 없는 이상, 기간트의 발걸음 소리를 확 줄일 수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아벨은 미리 정해진 수신호를 내렸다.
그 뜻은 간단했다.
일제 공격.
콰앙-!
아벨은 강하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는 미젯들과 티토 한 기를 남겨둔 채.
그 양옆을 자칼과 부단장이 바짝 따라붙었다.
두 기의 티토는 원활한 사격을 위해 옆으로 확 거리를 벌리면서 마찬가지로 아이언 베어와의 거리를 좁혔다.
쿵, 쿠웅, 쿠웅-!
맨 처음 땅을 박차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던 아이언 베어들은 곧바로 접근하던 기간트들을 발견했다.
평범한 짐승이라면 갑자기 달려오는 거인들을 보고 놀라 도망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러지 않았다.
“쿠워어어어엉-!”
오히려 몸을 잔뜩 부풀리며 마주 달려왔다.
하급 거신의 파편이라 해도 그 덩치는 절대 작지 않다.
땅을 쿵, 쿵 울리며 달려오는 괴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위압감에 어느 쪽이 습격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멈추어 서는 사람은 없었다.
우우우우우웅-!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을 무렵. 마공포 특유의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곧 강렬한 빛이 터져나갔다.
퍼어어어엉!
이어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아이언 베어 두 마리가 뒤로 넘어갔다.
초탄이 두 발 다 명중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나머지 세 마리는 그대로 거리를 좁혔다.
아벨이 달려든 것은 개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아이언 베어였다.
무리의 대장 격으로 추정되는 아이언 베어는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대로 앞발을 뻗었다.
그리고 아벨은 그 공격을 피하지 않은 채 아래에서 위로 검을 들어 올렸다.
칼튼에게서 배운 대로.
묵직한 거검을 그대로 아래로 내리 그었다.
콰드드득!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퍽 하고 액체가 튀어 올랐다.
앞발을 들어 올렸던 아이언 베어는 어깨에 검이 틀어박힌 채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머리를 노렸지만, 마지막 순간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것이다.
“꾸워어어어어억-!”
게다가 놈은 상처가 얕지 않을 텐데도 곧바로 몸을 거칠게 흔들면서 팔까지 휘둘렀다.
그러나 아벨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만으로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아이언 베어는 엄청난 방어력과 강한 한 방이 특징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건 아벨도 마찬가지였다.
아벨은 팔을 휘저으며 일어나려는 아이언 베어를 보고 다시 검을 들어 올렸고.
녀석의 팔을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콰직!
“끄워어어어어!”
아이언 베어의 팔이 그대로 뭉개지면서 축 늘어졌다.
녀석은 단단하긴 했지만 아벨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 치고는 잽싼 편이기도 했지만, 아벨을 압도할 만큼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것이 아이언 베어가 고작 세 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절명한 이유였다.
아벨이 휘두른 검에 그대로 머리가 깨진 아이언 베어는 부들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왼쪽! 왼쪽 다리를 노려라!
그 사이 다른 용병들도 순조롭게 나머지 아이언 베어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다들 티토를 타고 있는 만큼 아벨처럼 압도적으로 몰아붙이진 못했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연계가 뛰어났다.
‘아이언 베어들이 제대로 공격조차 못 하고 있군.’
아이언 베어가 공격을 할라치면 곧바로 포격이 날라와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출력을 제한한 소형 마공포인 만큼 단단한 가죽을 뚫지는 못했지만, 견제용으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아벨은 용병들의 실력에 만족스러워하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후우우우우웅-!
거대한 검이 힘차게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
나머지 아이언 베어를 정리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겨우 6분이었다.
* * *
“상당히 순조롭군요.”
“자칼 님과 용병 분들 덕분입니다.”
아벨은 뜨겁게 데운 수프를 먹으며 대답했다.
주변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곳은 미리 정해두었던 휴식 포인트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는데다가 거신의 파편이 서식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자칼은 입에 넣은 것을 다 씹어 삼키고는 아벨의 말에 대답했다.
“저희야 명령대로 따랐을 뿐이지요. 게다가 아벨 님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전투에선 분명 기체 손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자칼의 진지한 말에 아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레드홀에 들어온 첫날.
아벨과 용병들은 무려 4번의 전투를 치렀다.
예상보다 전투가 수월해 시간이 많이 남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 때는 꽤나 위태로운 순간이 있었다.
“하급 마수도 열 마리쯤 되니 확실히 위협적이긴 하더군요.”
거신의 파편 자체는 맨 처음 상대했던 아이언 베어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종이었지만, 문제는 돌발 상황이었다.
갑자기 한 마리가 확 몸을 빼서는 미젯이 있는 곳으로 달려든 것이다.
만약 아벨이 빠르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기체 손상은 물론이고 사망자까지 나왔을 수도 있었다.
아벨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전투를 치러야겠습니다.”
“저도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레드홀에 들어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 9일이나 더 머무른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레드홀 인근까지 접근해야 하지.’
아벨의 기체와는 달리 다른 기간트는 마력 차폐 장치가 없지만, 당연히 해결책을 가져왔다.
3-4회 정도 마력 차폐막을 사용할 수 있는 보조 무장을 챙겨온 것이다.
거기에 기간트 자체에도 어느 정도의 차폐 효과가 있으니 하루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만약 6시간 안에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다면 곧바로 물러나야겠지.’
일이 그렇게 되면 아쉽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전투 때도 욕심을 부리다가 화를 입을 뻔했으니까.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럼, 슬슬 자러 가겠습니다.”
“예. 저도 그럼 이만.”
아벨은 자칼과의 대화를 끝마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날 아침.
쿠우웅-! 쿠우웅-!
아벨은 귀를 파고드는 굉음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