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다니엘과 헤나가 거의 동시에 이올린에게 질문했다.
“반을 줄인다고?”
“왜?”
“나도 몰라.”
이올린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연히 들은 것뿐이라서.”
“반절로 줄이면 스무 명씩 한 반인 건가?”
“그러게.”
다들 분분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벨은 그냥 적당히 고개만 끄덕였다.
애초에 그럴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을 줄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학생 수가 줄었기 때문이었다.
‘낙제를 당하거나, 개인 사정으로 자퇴를 하거나…….’
1학기에 사고가 한두 번이었나.
영광의 벽. 야외 실습. 거기에 심지어 아카데미 내부의 사고까지.
아무리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고는 하지만, 생도 사이에서 퍼지는 소문까지 막을 순 없었다.
물론, 자퇴한 생도들이 단순히 위험하다는 이유로 아카데미를 나가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거지.’
아마 그런 식으로 아카데미를 나간 이들은 가문의 후계자나 비슷한 신분인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만약에라도 사고를 당하면 가문 전체가 큰 위기에 처할 확률이 높은 곳들 말이다.
아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마 확실하게 결정된 건 아닐 거야.”
“그래?”
“너도 뭐 들은 거 있어?”
곧바로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아벨에게로 쏠렸다.
아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 그냥 반 통합 같은 게 결정됐으면 좀 더 소문이 돌았겠지 하고. 아마 논의 중인 단계 아닐까?”
“그런가?”
“으음.”
잠시 고민하던 아이들은 곧바로 다른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벨은 적당히 대화에 어울리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아직은 논의 단계겠지.’
하지만 그 논의가 그리 오래가진 않을 터였다.
방학이 끝나기 직전에 큰 사고가 터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제국 전체가 뒤흔들릴만한 사고가.
본래 게임 상에서는 확정 이벤트는 아니고 일정 확률로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아벨은 확신했다.
그 사고가 일어나리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헤나의 별장에서 마주쳤던 변이종. 레드홀에서 마주쳤던 거신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그런 사건들에 공통적인 원인이 있다거나 연관점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아벨은 그런 사건들이 몇 번씩이나 일어났다는 것 자체에 주목했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게임 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대격변’은 그 전에 자잘한 전조를 보이기 마련이니까.
아벨이 보기에 대격변은 높은 확률로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날 걸로 보였다.
‘뭐,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건 아벨은 물론이고 누군가 나선다고 막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자연재해를 인간이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 슬슬 다시 시작하자”
한참 수다를 떨던 다니엘이 시간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벨도 그에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헤나. 일어나.”
“으으. 오늘은 쉬면 안 돼?”
“응. 안 돼.”
단호한 대답에 헤나는 울상을 지으면서 일어났다.
헤나의 별장에 다녀온 이후로 네 명은 이렇게 함께 훈련을 하곤 했다.
원래 한두 명씩은 같이 대련도 하고 서로 자세도 봐주곤 했으니까.
그래서 아예 다 같이 모여서 훈련을 하기로 한 것.
네 명이나 되니 2대2 훈련을 할 수도 있었고, 번갈아 가며 대련을 할 수도 있어서 훈련 효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자, 헤나. 오늘은 딱 1,000번만 휘두르고 시작하자.”
“차라리 날 죽여줘…….”
헤나의 앓는 소리와 함께 훈련이 시작되었다.
* * *
높게 솟은 산맥 아래로 자그마한 영지가 있었다.
그 영지의 이름은 자벨론.
자벨론 남작의 영지로, 요정 버섯이라는 특산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 넓지도 않았고 풍족한 땅이라고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살기에 그리 나쁘진 않았다.
주변에 거신은커녕 거신의 파편도 거의 서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제국 남부 쪽은 거의 그런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벨론에 때 아닌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웅-! 쿠웅! 쿠웅!
거대한 무언가로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자벨론을 뒤흔들었다.
아닌 밤중에 소란으로 밖으로 나왔던 주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음의 근원을 목격했다.
“거, 거신?”
쿠웅-!
거대한 산맥 위에 비치는 그림자.
그것의 수는 어림잡아도 열을 넘었다.
쿵, 쿵, 쿵, 쿵, 쿵-!
열이 넘는 거신들이 땅을 울리며 산맥을 넘어오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이잉-!
경보장치를 통해 영지 전체에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습격이란 것에 거의 면역이 없던 영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벨론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었다.
콰과가가가가각-!
어떤 곳에서는 네 발로 달리는 거신이 나타나 순식간에 도시의 한쪽을 무너트렸고.
또 다른 곳에서는 거신의 파편들이 어마어마한 수로 몰려들어 근방의 모든 영지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 들어갔다.
제국의 남부는 물론이고 비슷한 일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모든 일이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제국은 물론이고 모든 나라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전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혼란은 일찍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아카데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도 빠져나가네.”
기숙사 휴게실.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던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아벨도 마찬가지로 바깥을 보며 대답했다.
“그러게. 밀레스 급 열 기에 켄투리오 급까지 포함인가.”
밖에는 저 멀리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기간트들이 보였다.
아마 남부 쪽의 토벌대에 차출된 병력일 것이다.
당연히 그 병력이란 아카데미의 생도들이었다.
졸업을 앞둔, 사실상 라이더나 마찬가지인 4학년 생도들.
“원래 4학년 때는 대부분 실습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던데.”
“라이더 서임만 안 받았지 실제 전력은 크게 차이가 없으니까. 오히려 웬만한 가문 출신들보다 낫지.”
델 모도르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무려 4년에 걸쳐 철저하게 라이더로서 키워진다.
일반적인 가문에서도 라이더를 육성하기 위해 몇 년을 투자하긴 하지만, 수준 차이는 컸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부터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이들만 뽑기도 하고.
즉, 제국 남부가 거신과 그 파편에 의해 혼란에 빠진 이상, 4학년 생도들이 차출되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 교관님들까지 차출되는 거면 엄청나게 큰일 아냐?”
다니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4학년 생도가 차출되는 것과 교관들이 차출되는 건 무게감이 달랐다.
우선, 개강이 일주일 미루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교관 중에 절반 이상이 차출되었는데 어떻게 정상적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한단 말인가.
물론, 위쪽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은 아니었다.
애매하게 대응하는 것보단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동원하여 조기에 진압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더 커지기도 할 테고.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거지.’
게임 상에서 이번 일은 ‘대격변’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발적인 사건에 그런 이름이 붙을 일은 없다.
앞으로도 제국의 남부는 계속해서 거신의 습격에 시달릴 것이다.
제국 남쪽. 영토 너머에 있는 ‘죽음의 땅’에서부터 잠들어 있던 거신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서 점차 야욕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순례자들도 개중 일부였지.’
순례자들은 일전에 야외 실습 때 유적과 관련된 일로 부딪혔던 연합 왕국 산하의 단체다.
오랫동안 때를 기다려왔던 그들은 이번 대격변을 자신들에게 내려온 계시라 생각할 것이다.
어디 그들뿐이랴.
제국을 넘어 인류의 적이라 할 만한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휘이이이이이이-.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살짝 열린 창틈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쩐지 불길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었다.
절로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아벨은 그에 매몰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이 끝나고 드디어 본게임에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즉, 어차피 언제고 일어났을 일이란 소리다.
좀 더 늦게 시작되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스윽-.
그때,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짙은 갈색 머리에 소심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한 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서 휴게실 내부를 둘러보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문을 닫았다.
아벨은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돌아가나 보네.”
“그러게. 어제도 2명인가 돌아갔던데.”
“응.”
2명. 그리고 방금 1명.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생도들이었다.
개중엔 낙제로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만간 불어 닥칠 비바람을 피하고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다니엘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갈 생각 없지?”
뜬금없는 질문에 아벨은 나지막이 답했다.
“딱히. 돌아갈 곳도 없고.”
“그래? 나도 그런데.”
곧 시선이 마주친 둘은 피식 웃었다. 다니엘은 앞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글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면 실전 위주로 강의하지 않을까?”
“으음. 대전쟁 직후처럼?”
“그래. 대전쟁 직후처럼.”
델 모도르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은 지식 함양이니 친목이니 하는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강한 기사를 육성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은 뛰어난 라이더를 육성하기 위해.
즉, 본래 이곳은 처음부터 ‘전사’를 키우기 위한 곳이다.
기존의 커리큘럼은 평화로운 시대를 반영하고 있었지만, 시대가 급변한다면 당연히 가르치는 것도 바뀔 터.
아벨이 가볍게 꺼낸 말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었다.
휘이이이이이이-.
아까 전보다 더 강한 바람이 불어와 둘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다니엘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폭풍이라도 오려나.”
“그러겠지.”
폭풍이 올 것이다.
대륙 전체를 휩쓸 폭풍이.
잠시 침묵하던 다니엘은 곧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후우. 훈련이나 하러 가자.”
“그래. 가자.”
이런데서 침울해하고 있어봤자 나아질 건 없다.
차라리 몸을 빡세게 굴리는 게 더 생산적이리라.
아벨은 다니엘과 함께 훈련소로 향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1학년 생도들이 모두 대강당으로 모였다.
과거, 입학시험 때는 거의 꽉 차 있던 대강당은 휑해 보일 정도로 비어 있었다.
겨우 스물둘의 생도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왜 부른 거지?”
“그러게. 이제 개강하나?”
다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앞쪽의 문으로 익숙한 인원들이 들어왔다.
교장인 마그누스와 몇몇 교관들이었다.
그들은 생도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서서는 입을 열었다.
마그누스는 생도들을 쭉 훑어보고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방학 동안 잘 쉬었나?”
“예-!”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모두 입을 모아 대답했다.
마그누스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네들을 불러 모은 건, 2학기부터 바뀔 커리큘럼을 통지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서두를 연 마그누스는 찬찬히 웃음기를 지우면서 말했다.
“설명이 끝난 후, 커리큘럼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곧바로 돌아가도 좋다.”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