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위기의 문화재 (3)
“네. 과장님. 지금 자료 다 뽑아서 메일 보냈습니다.”
이른 아침 전화를 받은 배 팀장은 긴장한 투였다.
뜬금없는 연락이었다. 피란에 떠난 과장님이 갑자기 문화재청 자료를 요구하지 않겠나.
준철이 요구한 자료는 대부분 다 민감한 내용들이었고, 한눈에 봐도 큰 사건을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알아보니, 청주 문화재는 대부분 다 수의계약으로 처리했더군요.”
-담당자가 그 오명식인지 뭔지 하는 놈 맞아?
“오명석요. 네, 맞습니다. 수의계약은 다 그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었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능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 어렵다는 문화재 예산을 턱턱 받아 오지 않겠나. 기업이든 공무원이든 똑같다. 예산 잘 따내는 놈이 왕이다.
그 좋은 능력을 정말 문화재 복원에 힘썼더라면 지금쯤 신라, 고려, 백제 문화가 다 복원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애석하게도 능력 있는 놈에게 양심까지 바라는 건 과욕인 모양이다. 오명석이 만진 예산은 항상 지저분했고, 깊은 구린내를 동반했다.
-고생했다. 그리고 그건?
“강원 공정위에 공문 보내는 거요……?”
-그게 제일 중요해. 했지?
배 팀장은 긴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과장님, 이거 정말 하실 생각입니까?”
-뭔 소리냐?
“이거 공문 보내는 거 자체가 강원 공정위에 일 시키는 거 아닙니까.”
종합국은 타 부처에 일을 부탁하는 것 또한 눈치 보는 곳 아닌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엄두도 안 납니다. 지금 과장님 납품 분유 사건 때문에 아직도 감사를 받고 있어요. 국장님이 아등바등 막아 주고 계시는데……. 괜히 일 벌일 필요 있나
싶습니다.”
편법 처벌의 대가는 혹독했다.
감사원이 들이닥쳐 지금까지 준철의 자료를 미친 듯이 뒤져 댔다. 하지만 너무나 탁월한 일 처리 때문에 오히려 혀를 내두를 지경이란 말이 나왔다.
그렇다고 돌발 행동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겨우 잠잠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또 사고를 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거다.
-음…… 국장님껜 좀 죄송한데.
“그쵸? 그럼 그냥 하지 마세요. 이거 어차피 우리가 맡은 사건도 아니잖아요.”
전화기 너머로 종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근데 그냥 덮어 두기엔 너무 지저분한 게 많아. 왜 이 오명석이가 만지는 예산들은 하나같이 다 지저분해?
“그야 그렇지만…….”
-난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어. 그놈이 만진 예산들 다 까 봐야겠다.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결국 과장님의 뜻을 꺾지 못했다.
-당장 보내. 내일 안으로 강원 공정위 사람들 만나 볼 거야.
“다시 말하지만 이쪽 분위기 장난 아닙니다. 그나마 국장님이 커버 쳐 주셔서 마무리되는 추세긴 한데…….”
-그건 내가 따로 용서 빌 거고. 넌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해.
“……알겠습니다. 보내 놓을게요.”
전화를 끊은 배 팀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뭐? 서울에서 공문이 와?”
“네. 그렇습니다. 사천사와 관련한 문제라는데요.”
“자료 줘 봐.”
서울 공정위의 뜬금없는 공문에 강원 카르텔국은 초비상이 되었다.
사실 20년 공직 생활 내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본청에서 오더가 내려오는 경우는 봤어도, 다른 지방 사무소에서 업무가 내려오는 경우는 없었으니 말이다.
심 과장은 한참이나 서류를 읽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천사 복원 공사에 비리가 의심된다는 거야?”
“네. 알아보니 이 모든 공사가 다 수의계약으로 이뤄졌더군요.”
공정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수의계약의 폐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담당자에게 사업 선정권이 있으니 청탁 유혹에 쉽게 빠진다.
사천사 복원 공사는 5억짜리 공사로 어느 여건으로 보나 수의계약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명석이란 놈은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진행했고, 그게 이번 한 번도 아니었다.
“젠장.”
심 과장은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이 사건이 결코 사천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든다.
“이거 자료 보낸 건 누구야?”
“이준철 과장이라고 종합국 소속이라고 합니다.”
“카르텔국이 아니라 종합국?”
“예.”
“아니,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작자가 이런 건 왜 보냈대?”
보고를 하는 팀장도 그 연유를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공문을 보낸 놈이 범상치 않다는 것.
팀장은 모든 연줄을 동원해 이준철이란 작자가 누군지 수소문했다. 그 결과 한번 맡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야말로 꼴통 과장이란 사실이 확인되었다.
주워들은 소문을 다 설명해 주자 심 과장 입에서 다시 한숨이 나왔다.
“어휴…….”
사실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서울공정위의 과장급 아닌가.
서울과 본청에선 발에 채이다시피 많은 족속이지만 4급 서기관은 그리 만만한 족속이 아니다.
지방 공정위에서 4급 정도면 거의 국장급의 파워.
존재감 높은 사람이 이렇게 친히 공문을 보내는 걸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사실 공문 보내고 나서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주 안으로 약속을 잡고 싶다더군요.”
“약속?”
“네. 서류에 담을 수 없었던 뒷얘기를 하고 싶다 합니다.”
산 넘어 산이다. 대개 이런 부류는 직접 얼굴 보는 게 부담스러운데 말이다.
“일단 좀 거절해 봐. 제 놈이 서울에서나 왕이지, 여긴 강원도야.”
“그게 저…… 민감한 말도 해 왔습니다.”
팀장이 조심스레 귓속말을 전하자 과장이 펄쩍 뛰었다.
“이, 이 새끼가 어디서 그런 망발을!”
“…….”
“그 새끼 당장 불러와. 어디 한번 끝장을 보자.”
아무래도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모양이었다.
***
처음 가 본 강원 공정위는 서울 사무소와는 무척 다른 분위기였다. 도심지에 있다고는 하나 특유의 한적함이 묻어 나온다.
넥타이 부대들이 빽빽이 들이차는 여의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여유였다.
경치 감상은 여기까지.
준철과 서 팀장은 긴장한 얼굴로 약속 장소에 향했다.
“주눅 들지 마라. 우리가 죄지었냐?”
“민폐 끼치는 건 사실이잖아요…….”
“민폐는 내가 당했지. 강원 공정위가 일 잘했으면 나도 이 법석 안 떨었어.”
“네……. 저는 과장님처럼 강심장은 아닌 모양입니다.”
여유로운 얼굴의 준철과 달리 서 팀장은 계속해서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반응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건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옆집에 불 지르러 온 격 아닌가. 갑자기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불편하지만 이 관계가 파악되면 당사국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다.
왜 이런 비리를 관할청이 발견하지 못했느냐는 후속 질타가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가 물씬 반영된 탓인지 강원 지청엔 적막이 엄습했다.
준철이 신분을 밝히자 경계 가득한 시선들이 꽂혔다. 강원 공정위 직원들 모두 이 두 이방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철은 접견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담당자를 기다렸다.
“어서 오십쇼. 제가 강원 공정위 심 과장입니다.”
“예. 제가 공문 보낸 이준철 과장입니다. 실례하게 됐습니다.”
이윽고 담당자가 등장했고, 매우 어색한 악수가 오갔다.
적당한 안부 인사가 오갔을 때, 심 과장이 본론을 꺼냈다.
“먼저 보내 주신 공문은 다 봤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저희한테 조사를 지시하는 거죠?”
“지시라기보단……. 협조라는 표현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문화재청의 수의계약은 문제가 좀 많아요.”
“네. 보내 주신 자료 보니, 저도 좀 이상한 게 많았습니다. 한데 이 사건 어떻게 맡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냥 익명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어디서요?”
“여러 군데에서 좀 제보를 받았어요.”
“그 출처를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어지간히도 이 사건을 맡기 싫은 모양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자꾸 캐묻는 걸 보면.
“저희가 그것까지 밝혀야 하나요? 익명이었는데.”
“아, 익명이었다면 어쩔 수 없죠. 다만 놀라서 그랬습니다. 사실 저희가 관할청인데, 저희조차 이 공사가 수의계약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 몰랐거든요.”
뜸 들이고 있는 그에게 준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과장님, 혹시 하기 싫으신가요.”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어렵습니다.”
“어렵다니요?”
“아시잖아요. 이게 기업 간의 비리면 그냥 조사해도 되는데, 지금 우리가 건드려야 하는 건 문화재청 사람이죠. 다른 공무원 터는 게 어찌 쉽겠습니까. 그리고 문화재청은 업무 특성상
특활비가 많은 존재죠.”
준철은 그런 궤변을 들어 줄 여력이 없었다.
“특활비도 나름이죠. 문화재청이 무슨 국정원도 아니고 특활비를 이렇게 남발합니까.”
“그건…….”
“그리고 이런 공사는 당연히 썼던 예산마다 증빙을 다 부쳐야 돼요. 근데 지금 보면 온통 다 불투명합니다.”
공개 입찰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예산 횡령이 어렵다는 것이다.
경쟁사를 의식하며 가격을 써 내야 하니, 입찰 단계부터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를 수 없다.
수의계약은 정확히 이 반대다. 눈치 볼 놈 없으니 부르는 게 값이며, 예산 횡령도 많이 일어난다.
“그거야 뭐 문화재청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쪽 사업 기획서를 봤는데, 지역 건설사 활성화를 위해 일부러 수의계약을 했다더군요.”
“과장님. 그건 말이 안 되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이 사건 맡고 싶지 않습니다.”
정당한 이유도 없이 그냥 하기 싫다?
이쯤 얘기가 오가자 준철도 예의를 벗어던졌다.
“혹시 치부가 드러나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뭐?”
“아닌 말로 이 문제 지적은 강원지청이 먼저 했어야죠. 관할청 아닙니까.”
“아니, 지금 싸우러 왔어요?”
“싸워서 해결될 일이면 굳이 피하진 않습니다. 물론 기분은 이해합니다. 상급 기관에서 내려온 지시도 아니고, 동급 기관에서 내려온 지신데 불쾌하실 수 있겠죠.”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지만 감정 제쳐 두고 일단은 사건 그 자체만 보자는 겁니다. 오명석 과장. 문화재청 해결사로 불릴 만큼 예산 잘 따오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만진 예상은 이상하게도 다 구린내가
풀풀 나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근데 공개 입찰은 한 건도 없고, 전부 수의계약이네요? 그것도 자기가 다 최종 결정권자인.”
“…….”
“만약 문제가 없다면 이것만 시정 요구하면 돼요. 외부 기관에 오해 살 수도 있으니 앞으로 계약은 공개 입찰로 진행하라. 근데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 썩은 살은 다 도려내야 할 거
아닙니까.”
준철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만 나열하며 심 과장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어찌 됐건 동급 기관의 지시를 받아 자존심이 크게 상한 모양이다. 크게 터질 게 빤히 보이는 사건을 맡기도 싫고.
준철은 심드렁한 그의 얼굴을 못 이기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참 아쉽네요……. 심 과장님도 순장 당하시겠어.”
그제야 심 과장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뭐? 내가 순장을 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