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정거래위원회-272화 (272/300)

272화

금산 분리 위반

“공정위가 이걸 대체 어떻게 알아?! 정말 내부 고발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 이 중에 밀고자가 없다고 정말 자신할 수 있어?!”

공정위의 공문 한 장에 한명투자 전 임원들이 비상소집 되었다.

직책은 상무일지 모르나 사실상 실질적인 오너다.

“김 회장님 설명을 좀 해 봐요. 내가 진짜 이 사람들 믿어도 됩니까?”

이는 바지회장인 김 회장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정위의 공문이 너무나 세세하게 나와 있다. 영인컴퍼니가 최기석의 소유사라는 것도, 한명투자가 그 회사에 초저금리로 대출을 내줬다는 것도 모두 소상히 적혀 있었다.

“상무님……. 외람되지만 내부자 같은 외부자 소행인 걸로 추측됩니다.”

“내부자 같은 외부자?”

“그룹 실상에 대해선 잘 알지만, 가장 적대적인 사람 말입니다.”

“지금 우리 형제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김 회장의 간절히 읍소하자 최기석도 그제야 범인 찾기를 멈췄다.

그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말이 일리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룹 사정에 대해 잘 알면서도, 나한테 적인 사람, 그리고 내 불행을 가장 즐거워할 사람. 그럼 딱 하나네?”

“…….”

“다른 임원들은 꿀 먹었어? 시원하게 말 좀 해 봐. 이거 큰형 소행인 것 같아?”

아무도 나서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최기석은 이 침묵이 무얼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언젠간 이럴 줄 알았지만 큰형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비록 그 시일이 예측보다 빨랐을 뿐이다.

“하아……. 대책 좀 세워 보자. 우리 대체 어디까지 걸렸지?”

“일단 영인컴퍼니가 상무님 회사인 건 다 들통난 것 같습니다. 정황상 빼도 박도 못할 거고, 여기를 거쳐 간 사장 중 한 사람만 자백해도 다 밝혀질 겁니다.”

“그 회사에 얼마나 대출해 줬지?”

“경주 리조트랑 골프장 부동산 등 합쳐서 2천억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해외 법인을 통해 대출한 금액 1천이 따로 있습니다. 합산하면 3천억 정도 됩니다.”

기준 금리 3%시대. 은행 예·적금이 6~7%를 돌파한 시국이다.

불법 대출 의혹은 피할 길이 없으며, 금산 분리 위반 또한 피할 길이 없다.

최기석 머릿속엔 지난 뉴스 한 줄이 지나갔다. 2년 전 산업은행이 500억대 불법대출을 실행해 부행장 등 다섯 명이 실형에 처해진 사건이다.

사기업이 3천억대, 그것도 오너 일가를 위해 설립한 회사에 불법대출을 해 준 정황이 드러나면 경영권 싸움은커녕 실형도 피하지 못한다.

“대체 큰형이 왜……. 아무리 경영권이 중하다 해도 정도가 있지. 대체 왜.”

“아무래도 지난 사건 때문에 악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사건?”

“일감 몰아주기 당시 우리가 부회장 비리를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쾅-!

“그건 이미 다 끝난 사건에 내가 쐐기만 박은 거고! 이건 없는 사건에 갑자기 불 지핀 건데 이게 어떻게 같아?”

“…….”

“그 새낀 형도 아니야. 아무리 경영권에 눈이 멀어도 형제를 팔아먹어?”

더욱 분통 터지는 건 이 사건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거다.

형은 아무래도 계속해서 칼을 갈아 온 것 같다.

철저한 준비만큼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실형을 살면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건설 경영권이 형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근데 이건 누워서 침 뱉기 아니야? 자칫하면 한명그룹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고.”

우호 지분이 싹 떨어질 수도 있는 문젠데, 이걸 감수한다고?

“아무래도 든든한 우호 세력을 확보한 듯합니다.”

“혹시 막내?”

“예. 소액주주, 임원주주 다 긁어모아 봤자 최만석 이사가 들고 있는 주식만 못하니까요.”

“사실 최근 부회장이 막내 대표님과 접촉을 했다고 합니다.”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지주회사인 한명건설의 운영권. 여기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건 장남도 차남도 아닌, 가장 경영권과 먼 삼남이다.

그 때문에 자신도 심심찮게 연락을 하고 움직였다. 동생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이에 대권을 잡을 수도 있겠단 희망이 번졌다.

하지만 그 가식적인 웃음은 자신에게만 보인 게 아닌가 보다.

형에게 고발당했다는 소식보다 동생이 붙었다는 소식이 더 믿기 힘들었다.

“어떡할까요. 일단 공정위에서 소명 요구가 왔는데…….”

사적인 감정은 뒤로하자.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시간은 얼마나 끌 수 있지?”

“듣자 하니 담당 과장이 그때 부회장 비자금 조사를 했던 과장이라 합니다. 아마 속전속결로 끝낼 겁니다.”

“그쪽 빈틈은?”

“영인컴퍼니를 거쳐 간 소유주들은 못 찾았습니다. 자백 받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시간문제…….”

“그럼 됐어. 일단 현금화할 수 있는 돈 다 긁어모아서 대출 다 갚아.”

“하지만 이미 대출이 진행됐…….”

“일단 갚아! 영인컴퍼니가 자금 여력이 되는 회사였다는 걸 증명해야 할 거 아니야.”

부실기업에 초저금리로 대출해 주는 것과, 그래도 자금력 있는 회사에 대출해 주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최기석은 이미 무죄를 포기했다. 형량이라도 줄여서 어떻게든 집유를 따내야 한다.

“따라 붙은 언론은?”

“아직은 낌새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공정위가 보도 자료를 흘리면 곤란해집니다.”

임원들은 모두 얼굴이 어두웠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한명투자에 예치된 대부분의 돈들이 빠져나갈 것이다. 고객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투자사는 많아도, 고객 돈으로 자기 사업을 펼치는 오너는 없었으니까.

“그럼 우리도 언론 대응 준비하자. 만약 내 의혹 보도 나가면 이건 우릴 음해하기 위한 표적 조사다, 청탁 조사라고 해. 당연히 그 배후는 큰형이다.”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반박해야 한다.

공정위가 큰형의 청탁을 받고 찍어 내리기 조사를 한다, 이 전략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한명그룹 내부 사정을 모르는 이도 없고, 최근 주가판도 거의 투기판으로 전락했으니

사람들도 믿어 줄 것이다.

“모두 나가 봐.”

임원들이 줄행랑치며 나가자 그의 장남이 운을 뗐다.

“아버지……. 그냥 적당히 선 정리하시죠. 큰아버지 목적은 어차피 망신 주깁니다. 사건 키워서 좋을 게 없습니다.”

“지금 자백이라도 하자는 게냐?”

“공정위 자극해서 좋을 게 없잖습니까. 현 조사 맡고 있는 게 그때 작은아버지 망신 준 작자라 들었습니다. 이런 부류는…….”

“그러니까 더 자근자근 밟아 놔야 한다는 거다. 네 큰아버지가 그때 얼마나 큰 망신당하는지 모르냐?”

익히 잘 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은퇴했던 할아버지가 나와서 동반 은퇴까지 했다.

“그런 놈한테 잘 봐달라고 저자세로 나가면 더 기어오르는 법이야. 이건 초장에 승부 봐야 돼. 이 시국에 우릴 조사하는 게 얼마나 편파적인지 어필해야 한다고.”

“…….”

“성진아, 이번 공정위 대응은 네가 맡도록 해라. 어차피 사업하다 보면 이런 크고 작은 풍파가 있기 마련이다. 후계자 수업 한다 치자.”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들에게 가르쳐 줄 좋은 경영 수업이라 생각하니 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

“전화도 없이 무턱대고 방문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동생이 내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도 이것저것 처리할 게 많아서 바빠.”

“그래? 근데 그 바쁘신 몸으로 큰형은 왜 만났냐?”

극비리에 성사되었던 큰형과의 만남이 이미 작은 형 귀에 들어갔나 보다.

최근 언론의 모든 주목을 받는 게 한명그룹인 걸 감안하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난감해하는 동생을 두고 최기석이 본론을 꺼냈다.

“됐고. 한 가지만 묻자. 너 큰형 편에 서기로 한 거냐? 아니면 내 좋은 동생으로 남을 거냐?”

“자꾸 사람 난감하게 왜 이래. 형제끼리 편이 어딨…….”

“그런 놈이 큰형하고 작당해서 네 작은형을 팔아? 내가 진짜 등신으로 보여?”

전후 사정을 모두 다 파악한 모양이다. 더 이상의 발뺌은 화만 더 키운다.

최만석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풀이 더 당하기 전에 그럼 나도 물어 보자. 큰형이 제보한 내용 모두 사실이야?”

그제야 최기석 태도가 온순해졌다.

“어디까지나 법적으로는…….”

“나 지금 말장난하려고 물어보는 거 아니야. 편법이든 불법이든 그 회사 형이 소유한 거 맞느냐고. 5% 대출까지 실행해 줬어?”

골이 아파지는 최만석이다.

금융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불법대출, 금산 분리 위반.

굳게 닫힌 형의 입이 모든 걸 사실이라 시인하고 있었다.

“얼마야? 그렇게 대출해 준 돈이.”

“2천억 정도 된다.”

“나도 큰형한테 들은 게 있어. 진짜 그게 다야?”

“……3천억 정도 된다.”

최만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할 때, 최기석이 다급하게 말했다.

“근데 이거 다 갚을 수 있는 돈이야! 절대 부실 회사에 실행한 대출 아니라고.”

“그럼 상황이 달라져? 금산 분리 위반 혐의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거 아니야.”

“나한테 쏘아붙이지 말고 너도 판단 잘해라. 지금 이게 너한테 불리한 일이야.”

“뭐?”

“큰형의 속셈은 하나야. 경영권에 제일 위협되는 동생 놈 징역 보내고 그 틈을 타 건설 먹는 거.”

“큰형도 사람이우. 설마 실형까지는…….”

“작년에 산업은행에서 5백억짜리 불법대출 걸려서 다섯 놈이 실형 살았다. 넌 내가 실형 피할 수 있다고 보냐?”

막냇동생은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더 한 판례가 있었으며, 경영권에 눈먼 큰형이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위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나랑 했던 약속이 있잖아. 내가 한명건설 지배권 가져가면 리조트 관련 사업 및 모든 계열사 지분 다 안전하게 분리해 준다.”

두 사람은 이미 사전에 밀약을 나눴고, 최근 돈독한 사이로 발전했다.

“과연 큰형이 나보다 네 몸값을 더 쳐줄까?”

“…….”

“너도 큰형 성격알지? 수십 년 거래하던 하청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사람이야. 경영권 앞에선 형제고 나발이고 없어. 나 감방 가도 사식 한번 안 넣어 줄걸? 근데 넌 다를까?”

카르타고를 무너뜨린 로마는 기다렸다는 듯 주변 약소국을 정리했다.

아테네를 정복한 스파르타도 가장 먼저 한 게 주변국 침략이다.

캐스팅보트는 언제까지나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빛을 발하는 법.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막냇동생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