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3화. 박다혜_(2)
* * *
“게임…. 이요?”
실화냐? 게임 때문에 취업을 포기한다고?
“네! 저 게임 해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음. 그래. 그럴 수 있지.
그 마음은 이해한다.
인생 선배로서, 그리고 같은 겜창으로서,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X같은 직장 따위 때려치고 하루종일 게임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헤헤헤, 생각만 해도 기분 좋네.
근데, 근데 말이지.
그러면 넌 굶어 죽는단다 꼬마야.
“실례지만…. 무슨 게임을 하시길래…?”
“빌리언 사가요! 아세요?”
이런, 동료였구만.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살다살다 스무살 꼬맹이에게 빌리언 사가 아냐는 질문을 받아보다니.
야래야래, 와타시…. 무려 8년차 고인물이라고.
하지만 빌리언 사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욱더 박다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알죠. 그런데 빌리언 사가면 꽤 오래된 게임일 텐데, 직접 플레이하는 것보단 월급으로 골드를 사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우와. 진짜 아시는구나…. 그건 대리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하지만?”
“케릭터 키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친구 때문에요.”
얘 중증이네.
세상에 어떤 바보가 게임 때문에 직장을 걷어차냐.
친구?
그것도 웃기네? 게임 친구야 퇴근하고 만나면 되지! 누구는 게임 친구 없냐!
나도 김폭딸 있다고!
어떻게 받아쳐야 기분 상하지 않게 회유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는데, 박다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그림 실력이 부족해서요.”
“작가님 실력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보내주신 일러스트만 해도 바로 출시할 수 있는 수준인걸요.”
“그런데 그게…. 좀 오래 걸렸어요.”
“작업시간이요? 얼마나 걸리셨는데요?”
“70….”
“70시간? 괜찮은데요?”
“일…. 이요.”
“….”
비상!!! 비상!!!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린다.
그리고 동시에 때맞춰 징 하고 벨이 울렸다.
비상벨은 아니고 카페 진동벨.
‘내가 카톡으로 미팅 잡을 때부터 알아봤다.’
‘이러니까…. 이력서를 받아야 하는 거라구요 이 대책 없는 과장님아!’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70일은 말이 안 된다.
나라도 참고자료 1000장만 있으면 70일 안에 일러스트 한 장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박과장…. 이번엔 당신이 틀렸어.’
어떤 세침떼기라도 꼬실 수 있지만, 능력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든 계획을 폐기 처분할 수밖에.
“그랬군요…. 오래 걸리긴 했네요.”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죄송해요. 그림은 취업 때문에 보낸게 아니었는데… 그냥 판매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보낸 거였어요.”
“그림이 너무 좋다 보니까 저희 과장님께서 흥분하셨나보네요. 작가님은 그림을 따로 배우신 게 아닌가요?”
“네. 그게 처음 그린 거에요. 게임 하면서 조금씩 그렸어요.”
“고생 많으셨겠네요.”
쳇. 이런 일로 나의 연차를 뭉개다니.
으… 박과장….
4연속 휴일은 고맙게 쓰겠습니다. 헤헤.
텄다 텄어.
아침부터 직업정신이 불타올랐었는데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긴장이 풀리니 급 졸리네.
어제는 한, 두 시간 잤나.
불면증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계약은 물 건너 갔고.
이제 머릿속엔 집에 돌아가서 게임 할 생각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컴켜고, 음…. 그러고 보니 오늘은 김폭딸이 없겠네.
아쉽군.
김폭딸이 없는 빌리언 사가 세상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구만.
갑자기 시간이 붕 뜬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일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예쁜 사람을 봐서 기분은 좋았다.
때 묻지 않은 웃음에 마음이 소독된 느낌.
그리고 그 예쁜 사람은 지금 무스 케익에 코박죽 중이다.
“맛있어요?”
“네…. 진짜 진짜 맛있어요. 대리님도 드셔보세요!”
젊어서 좋겠다.
한창 저럴 나이지.
경험이 적어서 맛있는 것도 많고, 흥분할 것도 많고, 직장에 휘둘릴 필요도 없는 나이.
그녀는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떠서는 내게 내밀었다.
“괜찮아요. 전 케이크 안 좋아해요.”
“네? 그러면 치즈케익은 왜 주문하셨어요?”
“작가님 모자라실까 봐. 두 개 다 작가님 꺼니까 천천히 드세요.”
“우와…. 감사합니다! 대리님 바쁘실 텐데 빨리 먹을게요!”
“저 여기서 바로 퇴근해요.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히히. 그래요?”
어쩜 그리 해맑니.
박다혜는 케이크 한입 떠먹을 때마다 볼을 감싸고 음~ 하는 리액션을 했다.
저 미모로 저러니 누가 보면 광고 찍는 줄 알겠네.
반면, 카푸치노는 처음 한 모금을 마시고 그 다음부터는 손도 안대는 중이다.
내 입에 커피가 안 쓰게 됐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기억도 안 나네.
불쌍한 사회 초년생을 위해 밸런스 패치를 좀 해줄까.
“작가님.”
“네. 대리님!”
“저기 선반에 있는 병 보이시죠.”
“네네. 보여요.”
“저거 시럽이거든요. 두 펌프만 넣어보세요.”
“헐…. 대리님 제가 무슨 생각 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표정만 봐도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거든요.”
“에이, 거짓말.”
당연히 거짓말이지.
박다혜는 룰루랄라 시럽을 넣고는 내게 엄지를 척 세웠다.
나도 엄지 척.
힘내시게 동료여, 언젠가 멀티버스 게임이 나올 때까지, 이 가짜 세상에서 잘 버텨보자고.
무스 케이크와 카푸치노를 다 해치울 때까지 박다혜는 질리지도 않고 웃음꽃을 피워댔다.
주변에서 힐끔 거리는 눈빛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하긴, 쳐다보는 게 당연하다.
어쩜 케이크 하나에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여자 사람과 연을 끊어버린 나조차 흐뭇할 정도니까.
좋은 구경시켜줘서 고맙네 동료여.
하지만 이제 빠이빠이.
난 게임하러 갈 거야.
“그림은 내부 회의를 거쳐서 단가가 정해지면 다시 제안드릴게요. 수요일까지 메일로 원본 보내주시구요.”
“메일이요? 파일은 미리 보내드렸는데.”
“레이어 살아있는 원본 파일이요. 후가공 작업이 있거든요.”
“레이어?”
“네 레이어요. 설마 이거 원 레이어는 아니죠?”
디지털 드로잉은 여러 층에 걸쳐 그림 요소를 분할해서 그린다.
예를 들어 한 장의 일러스트라고 해도, 주인공 따로, 배경 따로, 식물 따로, 소품 따로.
그렇게 분할해야 작업속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 층의 명칭이 레이어.
원화가가 아닌 나도 그건 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저 표정은 레이어가 뭔지 모르는 표정인데.
아니지?
“설마, 이거 수작업이에요?”
“헐. 손으로 그린 건 안되 나요?”
진짜냐.
폰으로 봐서 몰라봤는데, 지금 보니까 이거 스캔 뜬 거네.
이런 복잡한 그림을 물감으로 그리다니.
진작에 천재인 줄은 알았지만, 대단하네.
“그건 아니지만, 작가님 대단한 분이셨네요.”
어쨌든 우리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원본 상태가 좋으면 페스티벌 때 전시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가치가 더 올라갈지도 모르겠어요.”
“진짜요!?”
“너무 기대는 마시구요. 회의를 거쳐봐야 아는 거니까. 그래서 원본은 어떻게 하실래요?”
“저 여기 살거든요. 지금 바로 드릴게요!”
“여기요?”
“네!”
카페에 산다고? 커피 주문은 처음이라면서?
**
카페 상가 6층.
[르네상스 고시텔]
“금방 가져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박다혜는 나를 끌고 건물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고시텔 휴게실에 던져놓고 사라졌다.
스무살에 직장 걱정도 없고, 학업도 안 한다길래 금수저인가 했더니.
고시원에서 자취냐.
르네상스 시절에 만들어진 고시텔이라 그런지 낡기는 또 존나게 낡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카페에서 기다린다고 할걸.
간만에 고시원 휴게실에 앉아있으니까….
‘후…. PTSD 올라온다.’
나도 한때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스무살에 가족과 연을 끊고 홀로 상경해서 3년 동안.
창문도 없고, 화장실도 공용인 제일 싼 곳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참기도 많이 참았지.
운이 좋아서 지금은 벗어났지만 박다혜는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크흑. 동지여, 굿럭. 언젠간 빛을 볼 날이 올걸세.
난 빨리 그림 챙겨서 달아나야지.
여기 계속 있다간 토할지도 모르겠다.
벌써 속이 울렁거리네.
“꺄악!”
그때, 복도 끝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달려가보니 문이 열린 방 안에 박다혜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손에는 뻘건 물감이 흘러내린 도화지 한 장을 들고서.
“그게 혹시 원본인가요?”
“하…. 어쩌죠. 라면 국물 쏟았어요. 진작 치울걸.”
국물? 심지어 물감도 아니네.
기존 물감이 단단하게 굳어서 종이는 멀쩡하지만 빨간 물이 제대로 들었다.
“뭐, 괜찮을 겁니다. 디지털 작업하면서 수정하면 될 거에요. 전시용으로는 못 쓰겠지만.”
“으아…. 난 왜 맨날 이 모양이지…. 죄송해요.”
나한테 미안할 필요는 없지.
그냥 가격이 떨어지거나 회의에서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아졌을 뿐.
나머지 하나라도 멀쩡하길 바래야지.
것보다, 문제는 내 상태인데.
지금 나는 도저히 그림 따위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다.
울렁거리다 못해 이제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
박다혜의 방 때문이었다.
이 방. 뭐냐고.
침대 위에 쌓인 빨래.
바닥에는 먼지에, 책상 위에는 라면 그릇과 빈 도시락 그릇이 잔뜩 쌓여있다.
그래, 내가 알던 6년 전의 삶.
딱 그 모습이네.
절대로 잊고 싶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헉! 맞다…. 방 안 치웠는데!”
박다혜의 눈이 케이크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지금 놀리면 울겠네.
나는 본의 아니게 박다혜의 방에 들어와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