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12화. 박다혜의 세 가지 소원.
* * *
길고 긴 게임으로 노곤해진 몸.
치킨으로 든든하게 채운 배.
베란다 문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휴일의 첫날을 마무리하기에 너무나 좋은 밤이었다.
박다혜라는 이물질이 끼어든 바람에 정신이 쏙 빠지게 재미있었는데, 앞으로도 휴일은 3일이나 더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나 되게 초딩 같네.
친구 한 명 놀러온 걸로 신나서 상상일기를 쓰고 자빠졌다.
이러니까 9살이나 어린애랑 절친을 먹지.
“에구구~.”
이렇게 좋은 밤에.
소원을 말한다던 박다혜는 대답도 없이 쇼파 위로 기어 올라오더니, 내 다리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뭐해? 베개 가져다줄까?”
“아니요. 난 이게 좋아.”
“소원은 뭐길래 말이 없어.”
“이거라고 했잖아. 무릎 베개.”
“그냥 베개 줄게. 목 아프겠다.”
“성현아, 패배자는 그냥 네에~ 하면 되는 거야.”
저놈의 시건방.
게임 좀 오래했기로서니, 저렇게 거만해도 되는거냐?
공부하면 욕먹고, 게임하면 칭찬받는 역전세계물도 아니고.
그러나 내 다리를 멋대로 점거해버린 양아치는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드는지, 날 올려다보며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누가 그러던데, 고양이가 조금만 덜 귀여웠다면 멸종했을 거라고.
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알아둬라.
“난 상관없지만, 겨우 이런 소원으로 괜찮겠어?”
“그럼요, 그럼요. 이게 좋아요. 아직 두 개나 더 남았고.”
“네가 정한 거야. 난 이제 모른다?”
“왜 자꾸 물어봐...? 나 무거워?”
“아니, 전혀.”
“그러면 가만히 좀 있어 움직이지 말고. 난 소원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말야.”
“그래 니 잘났다.”
“히히.”
시간은 9시.
소중하고도 소중한 휴일의 밤이 무려 3시간이나 남아있다.
치킨만 먹고 나면 다시 게임하려고 눈에 불을 켤 줄 알았더니.
박다혜는 이 시간을 나보다 더 여유롭게 즐겼다.
아무리 나랑 게임을 신나게 했다지만 천하의 김폭딸이 이틀 치 노가다를 못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박다혜에게 이 무릎 베개가 그렇게 가치가 있는 건가?’
소원에는 당연히 욕망이라는 것이 담겨있을 텐데.
얘는 정말 모르겠다.
무릎 베개 페티시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아니면... 나? 나를 원하는 건가?
혹시 무릎베개가 목적이 아니라, 내 무릎이라서 의미가 있는 건가?
풉. 그건 아니지.
잠시 추잡한 상상을 좀 했다.
그럴 리는 없지.
고작 만난 지 이틀 만에 애정이 솟아나는 경우는 없다.
더욱이 스킨십을 요구할 정도로 긴밀한 애정이라면 더욱.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정말 정말 만에 하나 그랬다 하더라도, 무릎베개 소원은 좀 아니지.
차라리 다른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흠... 상상해보자.
반대로,
만약에 내가 박다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나라면 박다혜에게 어떤 소원을 빌까?
음...
음...
음...
“성현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잠깐만 방해하지 말아봐.”
“치, 알았어...”
음...
그런데 잘 모르겠다.
오늘 하루 같이 지내면서 안건데, 나는 박다혜에게 원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내가 다혜의 리액션이 보고 싶을 땐 다혜는 언제나 리액션을 보여줬고.
내가 컴퓨터 방을 자랑하고 싶었을 땐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굴어줬다.
굴어줬다?
아니겠지. 그녀는 그냥 진심으로 그런 기분이었던 거다.
박다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그녀가 알아서 척척 내놓으니, 원하는 게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는 악성재고가 되어버린 소원권으로 뭘 할까.
그때, 밑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발가락은 꼼지락 꼼지락.
팔자도 좋다.
다혜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빌리언 사가의 마을 중 하나인 루시드 타운의 BGM이었다.
왕국에서 추방당한 공주가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 영원한 꿈에 빠져드는 마을.
스토리 엔딩쯤의 그녀는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죽어버린 왕자와, 그들이 낳았을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서.
지금 다혜는 무슨 상상을 하고 있을까.
입가가 웃고 있는 걸 보니 꽤 행복한 상태인 건 분명하다.
벌써 시간은 열 한시.
‘와... 뭐냐, 얼굴만 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훅 지나갔네, 벌써 열 한시구나.’
이제 조금만 지나면 다혜는 다시 그 고시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일 엉망인 방에서 눈을 뜨면, 그녀는 정신없이 컴퓨터를 켜고 다음 달 고시원 월세를 벌기 위해서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해야 할 텐데.
그걸 생각하기는 하는 건지, 미소가 마냥 행복해 보인다.
나라면 내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가 지끈거렸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상상하고 있는 게 무엇이었든.
내가 그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그 상상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상상속의 그녀는 빛이 밝은 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도 나처럼 오늘 하루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기억으로 기록됐으면 좋겠다.
“으으...”
치렁치렁한 머리가 얼굴에 쏟아지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서 떨구려 노력했다.
내 허벅지 위라는 걸 알기는 하냐?
그렇게 흔들어대면 아프다고.
나는 손으로 다혜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제서야 다시 눈이 감긴다.
콧노래도 다시 시작된다.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지고,
발가락도 다시 꼼지락, 꼼지락.
음, 제대로 고쳐졌군.
나는 그녀의 미소가 계속되도록 계속해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네,
이제야 알겠다.
만약 내가 박다혜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는 악성재고인 소원권으로 이런 소원을 빌 것 같다.
내 무릎 위에 그녀를 뉘이고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머리칼을 넘겨주는 그런 소원을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소원권은 필요 없겠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괜히 악성재고가 아니다.
하지만... 뭐, 상상은 상상일 뿐, 현실의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박다혜가 나를 좋아해서 이런 소원을 빌었을 리도 없고.
나 혼자서 상상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그녀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
이번 작전은 실패다 실패.
이쯤에서 상상은 그만 놔주고 현실로 돌아오자.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현실이란 놈의 본래 역할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숄더 태클을 박아넣는 것이다.
이렇게.
“다혜야, 어떡할래? 집에 데려다줄까?”
“그러네. 이제 돌아가야 되는데... 졸려...”
“자면 안 돼. 자다 깨면 추워, 돌아갈 때 감기 걸릴 거야.”
“10분만 더 있을래.”
“10분 다음엔? 10분만 더 할려고 그러지.”
“아니야~.”
“그러면 일어나. 10분 지났다고 치고.”
“으... 권성현 그런 줄 몰랐는데, 잔소리가 심해.”
“내가 그랬지? 난 네가 상상하는 그런 요정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계속 투정 부리면 브레스를 먹여줄 거야.”
“그러면 이렇게 하면 돼지.”
박다혜의 양손이 파박! 하고 올라오더니, 십자가를 그렸다.
“홀리 쉴드! 이제 나는 무적입니다!”
낄낄낄 멍청이. 김폭딸이 따로 없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현실이 게임이 되고 게임이 된 현실 속에서 빌리언 사가의 우리처럼 늘 신나게 모험을 다녔으면 좋겠다.
하지만 불가능 한 건 애초에 상상도 하지 말자고.
“장난 그만치고 일어나.”
“장난 아닌데. 난 지금 진짜로 홀리쉴드 상태야. 한번 밀어볼래?”
어쭈? 못 할 줄 알고?
손가락으로 볼을 꾹 누르니 다혜는 으기기긱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버텨냈다.
“봐, 무적이지?”
“진짜로 민다?”
“밀어봤자 소용없어. 난 진짜로 무적이니까. 왜인 줄 알아?”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고.”
“내 두 번째 소원은 오늘 여기서 자고 가는 거거든. 무적 인정? 어, 인정.”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네.
인정이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만.
이제보니, 지금의 박다혜는 확실히 무적이 맞다.
현실 녀석도 홀리쉴드 위에 숄더 태클을 박았다간 어깨가 빠지고 말겠지.
애써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다니.
역시 김폭딸.
경험의 깊이가 다르다.
나 같은 허접은 매일 밤 현실을 살기 위해 게임을 꺼야하지만 박다혜는 아닌 모양이었다.
쟤는 쌀먹충이니까.
게임에 머물고 싶으면 언제까지고 게임 속에 머물겠지.
부럽다 짜샤.
“박다혜 일어나.”
“헐. 약속은 약속인데!”
“그러니까, 잠옷 가져다 줄테니까 샤워나 하라고.”
**
자려고 누웠다.
새벽 1시.
앞으로 몇 시간이나 깨있어야 잠이 들라나.
박다혜는 작은방에 침대를 펴줬고, 내일 아침이 되면 부리나케 일어나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나다. 몇 시에 잠들지, 몇 시에 깰지, 전혀 예상이 안 된다.
이놈의 불면증. 언제쯤 나아지려나.
그래도 내일은 휴일이니까 부담 없이 눈 감고 양이나 세보자.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양아치가 세 마리.
이상한 양아치 하나가 떠오르네.
방해하지 말고 좀 가라.
벌컥!
그런데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쪽에서 뭔가가 부웅하고 날아들었다.
“그” 양아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