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29화. 그림일기_(3)
* * *
으... 이 대갈통은 대체 무슨 마법부여가 되어 있길래,
어째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꾸만 내 선을 뛰어넘는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머리를 쓰다듬다 보니, 추악한 현실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그쪽은 누구신데 절 끌어안고 계시는 거죠?
“넌 뭐, 강아지냐? 잠깐 나갔다 왔는데 뭘 현관까지 달려 나와서 앵겨? 긴말 안 한다. 알아서 떨어져라.”
“쯧, 지속시간 개짧네. 권성현 똥캐야 똥캐.”
“저도 인격이 있는 사람인데요. 소환수처럼 사용하지 말아 주시죠.”
“응~ 상관없어. 어차피 침대에선 꼼짝도 못 해.”
진짜 뭐래는 거냐.
소름 돋네.
저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고서 하는 말일까.
“너... 진짜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라. 누가 들으면 부부인 줄 알겠네.”
“헐.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진짜 하지 마라. 죽빵 갈긴다.”
“히히. 빨리 들어와 성현아. 힘들었지.”
박스를 들여놓고 보니 집안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물건들도 미묘하게 움직인 것 같고, 무슨 냄새도 나네.
카레? 카레 냄샌가?
“이 냄새는 뭐야?”
“헐. 냄새나? 요리하느라 코에 익었나 봐. 난 왜 냄새가 안 나지.”
“요리? 설마 카레 만들었어? 혼자서?”
“응! 인터넷 보니까 집에 재료도 다 있고, 칼질만 하면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했지롱.”
주방에 가보니 냄비 하나가 끓고 있고 싱크대가 미묘하게 젖어있었다.
요리를 하고서 나름 열심히 정리했나 본데.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 빨래도 널려있네.
청소기 위치가 달라진 걸 보면 청소까지?
겨우 3시간 다녀온 사이에 그걸 다?
박다혜의 어설픈 가사 실력을 고려하면 조금도 안 쉬고 계속 움직인 게 분명했다.
그냥 쉬고 게임이나 할 것이지.
할망구 주제에.
“근육통 괜찮아? 별걸 다 했네.”
“아니... 엄청 아픈데 그냥 천천히 했어.”
“응 잘했어.”
나는 박다혜에게 따봉을 먹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집안일을 열심히 해준 건 대견하지만 어차피 목적은 따로 있을 테니까.
요즘 부쩍 느끼는 건데, 온기 괴물은 먹이를 주면 줄수록 그 포악함이 날로 더 심해진다.
그러니까,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눈 마주치지 말고 짐이나 정리해야지.
“저기, 님아.”
“박스 정리부터 하자. 옷은 작은방 옷장에 넣고, 버릴 건 지금 빼놓고.”
“저기... 보상은...”
“아, 피규어도 진열해야지. 컴퓨터 방에 진열장도 있고.”
“아 권~성~현~.”
“뭐요!”
“나 빨래도 하고 요리도 했는데... 청소도.”
“아이고, 참 잘했어요. 우리 다혜 착하다 착해.”
“보상 없어?”
“아주 당당하다? 맡겨놨냐?”
“내가 내기 이겼잖아. 빨리 줘. 이 집에선 내가 룰이야.”
“아까 현관문에서 안은 건 룰 위반이니까, 그걸로 퉁쳐.”
“그건 네가 방심한 거고. 빨리 줘.”
욕망 앞에선 염치도 없는 자식.
절대 안 줘.
상식적으로 집주인과 세입자는 머리를 쓰다듬는 관계가 아니다.
돈과 계약과 권리 사이에서 분노를 삭이는 관계지.
그런데 아무리 무시하고 일에 집중해도 박다혜의 머리가 자꾸만 다가왔다.
근육통 때문에 다리도 바들바들 떨리는 주제에.
밀어도, 밀어도, 꾸역꾸역.
그렇게 조르면 해주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자존심 상하니까 절대로 안 해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 쓰이네.
오늘은 왜 포즈가 다를까.
지금 박다혜가 내 쪽으로 들이미는 건 머리가 아니라 얼굴이었다.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이네.
“그 포즈는 뭐냐?”
“뭐가?”
“턱은 왜 들고 있는데?”
“머리 쓰다듬기는 아까 했으니까... 다른 보상을 받아볼까 해서.”
“그 보상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그만 꺼져.”
“나 강아지 같다며. 그러니까 턱 긁어줘.”
뭐지?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보통, 인간에게서 턱을 긁어달라는 말이... 나오나?
아니면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의사소통 체계라도 있었던 걸까.
순식간에 들이닥친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목뒤에서 쇠맛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띵하다.
“다혜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그래, 이제 확신이 드네.
우리 관계가 이상한 건 절대 절대 절대 내 탓이 아니다.
무조건 이 자식이 이상한 거다.
박다혜... 온기 앞에선 인격마저 내던지는 거니.
조금 전까지 나는 그녀의 자취방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도저히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공간에서 홀로 애써온 다혜를 생각하니 대견하고 안쓰러워서 그랬던 거다.
앞으로는 그녀를 사람답게 살게 해주리라 다짐도 했었지.
그런데 겨우 스킨십 하나에 인격을 휴지 조각처럼 내던지는 그녀를 보니...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나올 것 같네.
내 눈물 물어내.
“이런 너의 모습을 보는 나는 참 슬프다 다혜야. 도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내려놓을 생각이니.”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뭘. 빨리해줘. 먕! 먕!”
와우.
대단하다 박다혜.
이제는 짖기까지 하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문득 원석이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디 파티랍시고 이상한 플레이나 하지 마라.]
미안해요 원석이형.
형이 그 말을 했을 때 난...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좀 안 했으면... 하고 속으로 불평했는데.
정작, 제 현실은 이 모양 이 꼴이네요.
개소리는 형이 아니라 폭딸이가 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제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제는...
저도 모르겠네요.
“빨리~ 먕! 먕!”
두 눈을 질끈 감고 턱을 긁어주니 이제는 다른 소리가 나온다.
“끄응~ 끄응~.”
무섭다.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나는 이런 인간관계를 모른다.
우정? 그래. 친구도 있었고.
사랑? 연애도 해봤지.
그런데 한 명은 개 짖는 소리를 하고, 한 명은 턱을 긁어주는 이런 관계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엄청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나 이래도 되는 건가?
이게 합법일 리가 없는데.
“됐어?”
“응! 감사합니다.”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면 자기도 부끄럽기는 한가 보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니지, 그냥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어차피 박다혜의 욕망과 수치심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그냥 이 순간을 견디자, 권성현.
힘을 냅시다.
**
작은방 옷장에 다혜의 옷을 넣어놓고 책상 하나를 비워서 화장품을 올렸다.
화장할 때는 거울도 필요할 테니, 나중에 화장대도 하나 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컴퓨터 방에 있는 피규어 진열장에 내 피규어와 다혜의 피규어를 올려놓았다.
두 개를 붙여서 놓고 아래에서 레일 조명을 쏘니 간지가 작살이다.
그런데 그때, 한참 신나있던 다혜가 방에 들어와서 그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쩔어... 이렇게 멋진 애를... 나는 그냥 방에 처박아 놨었어... 흐어... 미안해... 내가 미아내...”
피규어 걱정하기 전에 스킨십 하나에 개가 되는 네 인생부터 동정하거라.
라고 할 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그래도 우는 표정이 귀여우니, 기록으로 남겨볼까.
“다혜야 피규어 앞에 서봐. 사진 한 장 찍자.”
“흐어... 이렇게?”
“응응, 자 찍는다? 브이 해봐.”
“브이...”
찰칵!
그걸로 이사가 끝났다.
다혜의 짐을 다 정리하고 박스를 밖에 내어놓으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다혜의 짐이 워낙 적어서 티가 날래야 날 수가 없지.
그래도 기분은 색다르다.
이제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 다혜와 나의 집이라는 느낌이 팍팍 풍긴다.
뿌듯하네.
이사를 끝내고 늦은 점심으로 카레를 먹었다.
다혜가 만든 카레는 싱겁고, 감자가 덜 익어서 서걱거리고, 양파는 너무 볶아서 단맛이 풀풀 나고, 당근이 너무 많아서 주황빛이 무서울 정도였지만.
종합적으로 맛을 평가하자면...
“어때 성현아? 싱겁지?”
“아니? 완벽한데? 개 맛있음.”
존나게 맛있다.
카레를 입에 한술 떠 넣으면 그 풋풋한 맛 때문에 이상한 환상이 보인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면서.
집 이곳저곳을 누비는 다혜의 실루엣이 보인다.
건조대에 빨래는 너는 다혜.
청소기가 무거워서 양팔로 낑낑대는 다혜.
이제 막 손에 익은 칼질로 말없이 야채를 자르는 다혜가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레를 입에 넣고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도.
이런 환상이 보이는 걸 보니, 이 집은 이제 다혜네 집이 맞나보다.
그리고 한가지 확신이 드는데,
지금 보이는 실루엣은 확실하게 웃고 있다.
아마, 내게 칭찬받을 상상을 하면서 열심히 했겠지.
이 존나게 맛있는 카레는 아무도 안 주고 내가 다 먹을 거다.
먹기 전에 사진 한 장 찍고.
찰칵!
“악! 그걸 왜 찍어! 창피하게!”
“응, 내 맘이야.”
“안 돼! 나중에 놀릴라고 그러지!”
“너 시집갈 때 남편한테 이거 보여줄거임. 평생 시집 못 감.”
“아 시집 안 간다고! 그래도 찍지마~ 다음에 제대로 해줄게!”
어림도 없지.
나는 다혜가 안보이게 폰을 높이 들고,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뒤틀린 황천의 카레 라이스]
[온기 괴물이 처음으로 만든 요리. 먹으면 힘이 20 오른다. 뒤지게 맛있음.]
음. 영혼 결속의 반지와 맞먹는 엄청난 아이템이로군.
첫 기록으로 써먹기에 이보다 좋은 아이템은 없겠지.
다혜는 나 몰래 8년이나 우리의 일상을 기록했으니까 나도 할 생각이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니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진으로 남겨야지.
앞으로 몇 년이나 너와 함께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벌어지는 일들을 지금부터 이 핸드폰 속에 기록할 거다.
그리고 볼 거다.
네가 이 집을 떠나고, 너의 기억 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된 순간에.
나는 이 기록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너와 함께한 매 순간의 나는 웃고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으면서.
하지만...
폭딸아.
부디, 개가 된 너의 턱을 긁는 기록만은... 하지 않게 해주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