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39화. 로그타운
* * *
타임루프에 빠진 나는 결국 다혜 밥 주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품 안에 다혜를 넣고 침대에 누운 채로, 그녀의 등에 기대서,
멍하니 창밖의 광안대교를 보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다.
그런데 그 순간, 광안대교의 보라색 불빛이 평범한 흰색 가로등 불빛으로 바뀌어버렸다.
“아, 변했다! 성현아 봤어?”
“그러게... 시간 정해놓고 켜주는 건가 봐.”
“예뻤는데, 아쉽다.”
“네가 게으름 피워서 그렇잖아. 아까 나갔으면 직접 볼 수도 있었는데.”
“아닌데? 너가 킁카킁카하느라고 못 나간 건데?”
“그건 니가 강제로 시킨거고.”
“히히, 근데 너가 내 냄새 좋다고 했잖아.”
“냄새가 좋은 거랑 냄새를 맡는 건 별개지. 난 교양인이라서 그런 추잡한 짓 안 한다고.”
“교양인이 아니라 바보네 바보. 맡을 수 있을 때 맡아둬야지!”
이건 무슨 븅신 같은 논리인가 싶으면서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긴, 광안대교의 멋진 불빛도 볼 수 있을 때 봐둬야 한다는 점에선 다혜의 이론이 맞을지도 모른다.
“...박다혜 답네.”
그때, 다혜의 배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꾸르르륵하고.
빈속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니까 그렇지.
소리는 안 났지만 바짝 붙어있다 보니까 진동으로 알아챘다.
“성현아~ 근데 나 배고프다.”
“알아. 방금 꾸르륵했잖아.”
“헐! 들렸어?”
귀가 또 순식간에 빨개진다.
새삼 웃기네.
니플패치 찌찌 공격이나, 강제 킁카킁카는 안 부끄럽고, 꾸르륵 소리는 부끄럽냐?
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비참하다.
이제는 나도 공범이니까.
어제까지는 사악한 영주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겼지만, 지금은 내 마음이 바뀐 걸 알아채고 말았다.
그녀에게 마음껏 유린당한 끝에, 나는 그녀의 품과 향기를 원하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클리셰대로라면 내가 애써 아닌 척을 해도,
흐흐흐,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하군. 하면서 속마음을 들켜서 더욱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고 말 테지.
그러니까 태클 걸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다혜야, 이제 나가서 밥 먹자, 어차피 다시 자기도 글렀는데 밥 먹고 산책이나 하지 뭐. 어때?”
“좋아!”
“옷 줄게 갈아입어.”
다혜에게 내 후드티와 반바지를 빌려줬다.
후드티가 워낙 커서 하의실종 룩이 되어버렸지만, 지금은 차라리 나은 것 같다.
노브라를 감추기에는 오버사이즈가 유리하니까.
창피해도 오늘 밤은 어쩔 수가 없다.
지금 나가서 밥을 먹고, 코인 세탁소에서 옷을 빨면 내일은 다시 원피스 다혜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어차피 다혜는 내일 호텔 밖으로 나갈 일도 없겠지만.
퇴근하면 부산 관광이라도 시켜줘야지.
호텔 안에는 그럭저럭 사람이 보이더니,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서울에선 새벽에도 늘 사람이 많았는데. 평일 새벽의 부산은 그래도 적막이 느껴진다.
비수기라 그런가.
잠든 도시는 오랜만이네.
우리는 버그를 써서 미공개 지역에 들어온 악성 플레이어처럼 성큼성큼 텅 빈 거리를 누볐다.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이라더니.
텅 빈 도시에서는 다혜가 일찐이다.
다혜는 잔뜩 신이 나서 인도를 마구 달려가다가도, 높은 차단봉이 보이면 그 위에 올라가서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내가 도착할 때가 되면 양심도 없이 양팔을 뻗고 말했다.
“내려줘~.”
“혼자 내려올 수 있잖아.”
“내려줘~.”
“어휴. 박다혜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어.”
번쩍 안아서 내려주면 뭐 하냐.
또 달려가서 같은 짓을 하는데.
그렇게 네 번이나 영문 모를 놀이를 하고 나서야 우리는 식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24시간 돼지 국밥집.
오는 길에 매운 닭발과 족발을 패스한 다혜에게 의견을 여쭈었다.
“이건 어때? 안 매울 것 같은데.”
“음... 뭔지 모르는데, 순대국밥 같은 건가?”
“비슷하지. 순대 없고 고기만 많을걸? 근데 나도 안 먹어봐서 잘 몰라.”
“음. 좋아. 이럴 땐 도전이지!”
당당하게 국밥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다혜가 우습다.
지금 다혜는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모르는 걸 발견하고 돌진하는 건 김폭딸이지 박다혜가 아니다.
저것 봐라.
여사장님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쭈구리가 되는 거.
로산느 코스프레는 어떻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
“사장님 돼지국밥 두 개 주세요.”
라고 말하자마자 뚝배기 두 개와 깍두기, 그리고 각종 양념이 상을 채웠다.
순댓국과 비슷한 구성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상차림.
먼저 다혜가 용감하게 수저로 국밥을 퍼 올렸는데, 고기가 수북하게 올라오는 걸 보고서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메뉴 선택을 잘한 것 같다.
설렁탕에 들어있던 고기도 그렇게 행복하게 먹더니, 박다혜는 삶은 고기를 좋아하나 보다.
다음에는 샤브샤브라도 먹여볼까.
그다음에는 친절한 사장님의 튜토리얼에 따라 다데기와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정구지 팍팍 넣고!
다혜는 거기에 깍두기 국물까지 넣고 첫술을 퍼 올렸다.
후후 불어서 뜨거운 김을 날리고, 입 안에 넣고는 핫뜨! 핫뜨! 하면서 입을 마구 오물거렸다.
그리고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들고, 고개를 죄우로 저으면서...
1따봉 적립.
볼을 감싸고 음~! 하는 예쁜 리액션도 좋지만, 이런 국밥 리액션도 볼 맛이 난다.
그 후로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서 국밥을 흡입했다.
쉴 틈 없이 후후 불어서 국밥을 식히고, 다른 손으로는 김치를 집어서 수저 위에 얹는다.
잘 먹는 걸 보니 항상 하는 질문은 안 해도 되겠지.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을 텐데,
행사장에서 얼마나 긴장했던지, 다혜는 과자 하나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리고는 나를 재우려고 또 굶었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나는 돼지국밥을 팍팍 퍼먹는 다혜가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겜창 다혜도 아닌, 사악한 영주도 아닌, 로산느도 아닌, 다른 인격이 튀어나와 말했다.
“성현아 니도 함 무 봐라! 지긴다 지기!”
가끔씩 길드에서 애들이 사투리로 장난을 치던데, 그걸 또 봤나 보네.
저 거친 대사를 초딩처럼 소화하는 것도 재능이다 재능.
“아재요, 주접싸지 말고 퍼뜩 드이소.”
내가 그렇게 받아치자, 다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2따봉을 적립했다.
국밥을 다 해치우고 나서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배도 따끈따끈 든든하고,
거리에는 사람도 없으니 다혜도 눈치 안 봐서 좋고,
나도 신경 쓸 일 없어서 좋고.
그대로 코인 세탁소에 가서 빨래를 돌려놓고, 세탁소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시간은 새벽 3시.
역시, 늦장을 부렸더니 시간이 붕 뜬다.
소화가 덜 돼서 자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갈 데도 없고.
피씨방이라도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다혜가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웃는 표정이 음흉한 걸 보니, 또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성현아.”
“왜?”
“지금 여기 사람 한~명도 없다?”
“그러네. 근데 왜?”
“히히, 여기 로그타운 같지 않아?”
로그타운?
부산까지 와서 피씨방을 떠올리는 나나, 또 현실을 빌리언 사가로 만들어 버리는 다혜나.
우리 둘 다 겜창답네.
로그타운은 빌리언사가의 던전 중 하나였다.
몰락한 왕국의 성터를 도적들이 차지해서 생겨난 일종의 무법지대.
특이한 점은 성을 둘러싼 해자가 넓어서 외부에서 공략이 불가능하다는 점인데,
정석 공략법은 이랬다.
먼저 필드에서 강도를 당하거나, 납치당해서 로그타운의 감옥으로 끌려가는 거다.
그렇게 감옥에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을에 폭동이 일어나는데, 성이 텅 빈 때를 노려서 성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챙겨야 한다.
골때리는 점은 유저는 많은데 탈출선이 하나뿐이라는 거.
그래서 아무리 많은 보물을 챙겨봤자,
그걸 얻을 수 있는 유저는 가장 먼저 해변에 닿은 단 한 명뿐이다.
그런데... 지금 다혜가 로그타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뻔하지.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아아아악! 같이 가!”
다혜가 기를 쓰며 쫒아왔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아무리 직장 생활에 쩌든 29살이라도 여자한테 달리기를 질 정도는 아니라고.
승리는 나의 것이다.
그런데...
옆구리 뒤지게 아프네... 쟨 또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나는 신호등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단숨에 건너서 계단 아래에 보이는 모래사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 해변의 이름은 더 이상 광안리 해수욕장이 아니다.
승리자의 도착점인 [도망자의 해변]이지.
그리고 도망자의 해변에 자랑스러운 발자국을 찍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와 씨, 아슬아슬했네.
바로 뒤에 박다혜가 있다.
“허억... 허억... 허억...! 내, 승리다, 이 애송아... 후우...”
“하아... 하아... 아오... 거의 다 따라잡았는데... 개치사해 권성현!”
“그래도... 소원은 나의 것이다... 이 패배자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해변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팔짱을 낀 커플들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낮의 해수욕장에 비해 너무 조용하다.
웃음소리도, 고함소리도 없이 철썩철썩 파도 소리만 들린다.
해안가 넘어 보이는 광안대교는 이제 멋진 보라색이 아니라, 흔해 빠진 가로등 불빛으로 빛나고 있다.
광안리 해수욕장이라는 이름값도 못 하고, 화려하지도 않고, 흥분감도 없는 조용한 바닷가.
그런데 나는 지금 이 바다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낮에 로산느가 된 다혜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다혜는 정말 누구보다 빛이나는 사람이구나.
언젠가 대인 기피증도 다 날려버리고,
그림을 그리든, 훌륭한 원화가가 되든, 훌륭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녀는 정말 눈부신 사람이 되겠구나.
나는 내 마음을 인정한다.
나는 박다혜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누리고 있는 행복은,
내가 마땅히 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불행한 나날이 내게 그녀를 내려줬을 뿐이다.
아마 지금 조용한 바다가 내 마음에 쏙 드는 건 그 때문일 거다.
내가 다혜와 함께 할 수 있는 건 반짝이는 미래가 아니라,
빌리언 사가나, 25평짜리 우리 집이나, 호텔 침대 위나, 사람이 없는 바닷가 같은,
세상과 단절된 곳 뿐이니까.
그것도 그녀가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만.
미래로 가지 말고 영원히 과거에 머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 욕심이겠지.
다혜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나랑 같은 기분이면 좋을텐데.
하지만 이것 또한 욕심이리라.
그때 다혜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성현아.”
“왜?”
“나 말할 거 하나 있는데.”
“와우, 고백으로 혼내주려고? 미리 도망가야겠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앉아봐!”
“뭔데.”
“그냥, 별건 아니고. 너랑 만나서...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고마워서 말하고 싶었어.”
하하. 웃음이 나오네.
뭐, 다혜는 언제나 그랬지.
내 허락도 없이 내 기분을 훔쳐서는, 늘 나를 울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저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나도 행복해 라고 말하고 싶은데.
무섭다.
혹시나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나의 마음이, 그녀의 미래를 붙들고 늘어지는 건 아닐는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