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 동거녀와 순애는 어떠신가요-42화 (42/194)

〈 42화 〉 41화. 다녀왔습니다.

* * *

나는 인사팀 대리다.

분명히 이틀 전에는 양복을 입고 스태프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꽃무늬 셔츠를 입고 별 그지같은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도대체가 시간이 안 간다.

약속은 분명히 하루에 딱 두 시간이었을 텐데,

미치겠네.

“성현아! 이분이 사진 찍고 싶으시대!”

이제는 카메라가 들어오면 저절로 웃으면서 손하트가 발사된다.

남창에 이어 광대까지, 사악한 영주와 엮이는 바람에 별일을 다 해보네.

그래도 어제는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됐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사진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설마... 인터넷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앞으로 1분만 참으면 된다.

내가 눈치를 주자, 스태프가 끝도 없이 늘어져 있던 대기 줄을 끊었다.

뒤이어 마지막 팬과 사진을 찍는 것으로...

찰칵!

코스프레 종료!

내 만세와 동시에 곽과장님이 포토존으로 단숨에 뛰어들었다.

과장님은 지금 박수를 치고 있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G펙스 첫날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을 떠올리면...

에이.

그래, 이게 어디냐.

보람찼으니까 나도 불평 그만해야지.

“끝! 끝! 와 진짜 고생 많았다! 다혜씨 진짜 수고하셨어요! 우리 권대리님도 너무너무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결국 끝이 오긴 오네요.”

“에이~ 권대리님 잘만 해놓고 왜 힘든 척? 지금 대리님도 은근히 인기 많아진 거 알죠?”

“제 사진이야 뭐, 유머 사이트에서 짤방으로 쓰이겠죠.”

“그것도 다 인기죠. 다혜씨는 어땠어요? 안 힘들었어요?”

다혜는 쑥스러운 듯 뒷 머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더니.

결국 3일을 버텨내네.

독하다 독해.

“재미있었어요. 사람들이랑 있기도 조금 쉬워진 것 같구요. 다 과장님 덕분이에요.”

“에이~ 도움은 우리가 받았죠. 다시 말하지만 진짜 고마워요. 덥겠다. 빨리 가서 옷 갈아입고 와요.”

“넵!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혜는 곽과장님께 90도로 배꼽 인사를 하고는 나에게 돌아섰다.

그리고는 다시 배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성현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배꼽 인사.

지난 이틀간 다혜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해줬다.

쓰러지지도 않았고, 하루 두 시간 촬영시간을 쉬는 시간도 없이 꽉꽉 채웠다.

어제는 힘들 때마다 내 옷깃을 붙잡더니, 오늘은 한 3번 잡았나.

이젠 사람들과 있는 것도 익숙해졌나 보다.

대견해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그냥 배꼽 인사로 때우기로 했다.

보는 눈도 많거니와, 오늘의 1등 공신은 박다혜가 아니니까.

그 1등 공신이 누구냐면... 바로 나.

고생했다 권성현... 이제 부산에는 두 번 다시 발도 들이지 말자.

“박다혜 작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빨리 옷 갈아입고 오십쇼.”

“넵!”

다혜는 의상팀 스태프를 따라 사라졌다.

나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만,

나도 코스프레 모델이지만,

나에겐! 스태프는 붙지 않는다.

광대는 어디 화장실 구석에 짱박혀서 주섬주섬 갈아입어야지.

“과장님. 저도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아, 대리님! 오늘 그냥 퇴근하시죠?”

“스태프분들 퇴근은 보고 가야죠. 그거 처리하고 부스 정리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에이~ 그냥 리스트만 넘기고 그만 퇴근하세요. 박과장님한테도 얘기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개꿀이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땡땡이는 하루면 족하지.

이제 다혜를 택시 태워서 호텔에 보내고, 나는 천천히 퇴근한 다음에 다혜와 만나서 밥 먹고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다.

그런데 곽과장님은 물러설 기미도 없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웃는 얼굴로 소곤거렸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다혜씨 여기 놀러 왔다면서요. 우리 때문에 하루도 못 놀았는데, 오늘은 두 분이서 같이 G펙스 구경이나 하시죠. 이제 3시간밖에 안 남았어요!”

그러고 보니...

밤에는 호텔 편의 시설이고 부산이고 많이도 돌아다녔는데, G펙스는 구경도 못 했네.

다혜는 게임 말고 딱히 좋아하는 취미도 없는데.

기껏 게임 행사장에 와서 그냥 보내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인기피증 있는 애한테 혼자 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평소였으면 끝까지 사양했겠지만...

나는 곽과장님께 허리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다혜의 이론에 따르면 꿀은 빨 수 있을 때 있는 힘껏 빨아야 한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하긴, 수렁에 빠진 마케팅팀을 구하는 일에 나도 한몫했으니까.

이 정도는 누려도 되겠지.

나는 후딱 옷을 갈아입고 스태프 대기실 앞에서 다혜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스태프 둘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다혜가 나타났다.

어제 같이 산 옷을 입었네.

하얀색 반바지에 박시한 하얀 티셔츠, 그 위에 얹은 루즈핏 청자켓이 시원하고도 편한 느낌이다.

진하고 날카롭던 로산느의 화장은 이제, 손으로 쥐어짜면 귤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누나표 화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쁘다.

로산느보다 훨씬 더.

마음도 훨씬 더 편하고.

“권성현!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옷 잘 어울린다.”

“히히. 뒤지게 예뻐?”

“응.”

그렇게 얼굴 붉힐 거면 왜 물어본 거지.

박다혜는 괜히 다리를 베베 꼬더니, 내 어깨를 주먹으로 퍽퍽 치며 말했다.

“에이, 너도 멋있어~.”

“선심 쓰듯이 말하지 말고. 가자. 나 퇴근했으니까 오늘은 G펙스 구경하자. 어때?”

“진짜로? 벌써 퇴근했어?”

“응. 과장님이 풀어주셨어. 시간 별로 없는데 어디부터 구경할까?”

그러자 다혜는 한껏 긴장 풀린 웃음을 만연에 띄우더니...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말했다.

하긴, 물어보나 마나지.

“당연히 빌리언 사가지!”

**

이제 행사 폐막까지 3시간.

다혜는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런 다혜의 손을 잡고 행사장을 가로질렀다.

마구 뛰면서.

이제 나는 개발사 직원이 아니라, 한심하게 서른 살 먹고 부산까지 게임쇼를 보러 온 겜창이니까.

지난 나흘간 고생한 만큼 마음이 들뜬다.

다혜랑 새 컨텐츠 시연도 하고, 굿즈도 사고.

잔뜩 즐겨야지.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다혜를 만나고 며칠간 꿈과 현실이 구별이 잘 안되는가 싶더니...

그러면 그렇지.

이 지독한 현실이란 놈은... 기어코 결말에 와서 숄더 태클을 거네.

“헐... 어떡해... 시연 다 끝났대 성현아...”

빌리언 사가 부스는 거의 정리가 끝나 있었다.

스태프들도 없고, 시연용 PC에는 천막이 씌워져 있고, 굿즈 매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커뮤니티에도 거의 언급이 없더니...

폭망해버렸구만.

5년 만에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한 빌리언사가는 새로운 필드 보스를 앞세워 신규 유저 몰이에 나섰다.

시연은 주변 사람들과 파티를 짜서 신규 보스를 공략하는 거.

그거 다혜도 엄청 기대했는데.

다혜는 내가 일하는 동안 혼자서 구경할 엄두도 못 내고 호텔 방에서 폰으로 시연 영상만 몇십번을 돌려봤다고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냐.

입술이 역대급으로 튀어나왔다.

“이이이이이... 하고 싶었는데...”

“괜찮아. 어차피 한 달 있다가 업데이트된다니까 조금만 참자.”

“그래도... 아쉽다. 아무도 못깼다길래 너랑 둘이 멋있게 파박! 하고 깨고 싶었는데.”

“너 아이디 김폭딸인 거 잊었냐. 깼으면 지금보다 세배로 유명해졌을 걸? 어그로는 이제 그만 끌어.”

“그런가... 그래도 아쉬워!”

다혜는 내 손을 잡아끌고 굿즈 매대로 갔다.

쿵쾅대면서 걷는 게 엄청 화났나 보네.

그런데 굿즈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제 다혜가 영상으로 보여줬던 초대형 몬스터 인형과 로브형 후드는 이미 다 팔렸고,

남은 건 잔챙이들 뿐이다.

다혜는 뭐라도 반드시 건지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꽉 물고 매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표정이 밝아져서 돌아섰다.

“성현아 이거!”

손에 작은 동그라미 두 개를 들고서.

“워프마커? 컵홀더야?”

“응!”

“그게 마음에 들어?”

워프 마커 모양으로 만들어진 고무 컵홀더였다.

빌리언 사가의 마법사들이 워프 포탈을 열기 위해서 사용하는 아이템.

어떤 장소에 가서 미리 마커만 만들어 두면, 그 다음에는 포탈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

김폭딸은 마법사도 아니면서, 저런 게 왜 좋을까.

컴퓨터 앞에서 음료수 마실 때 쓰려고?

그런데 다혜의 말을 듣고 보니...

음, 애가 따로 없구만.

나랑은 발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이거 가져가서, 다음에 또 부산 오자.”

“부산 워프 마커냐...”

“응! 다음에는 그냥 둘이서 물놀이도 하고, G펙스도 제대로 구경하고! 어때?”

컵홀더로 워프 포탈을 어떻게 만드냐 바보야.

그리고 나는 방금 전에 부산에는 두 번 다시 발도 안들이겠다고 맹세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당장 사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혜가 신이 나서 말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실망하더니,

컵홀더 하나에 어쩜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러면... 너꺼랑 내꺼 두 개... 내가 살게! 이번 데이트에는 내가 사기로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첫 데이트를 하던 날 그런 약속을 했었지.

다음 데이트는 다혜가 쏘기로.

우리는 벌써 두 번째 데이트를 하고 있었구나.

방금 일을 끝내서 몸은 지쳐있고, G펙스는 다 끝나서 구경할 것도 없고, 엉망진창인 데이트지만...

그래도 다혜가 웃는 걸 보니 만족감은 대박이다.

다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부산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으니까.”

발그레 상기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이제는 경험상 알겠다.

이번 출장은 나도 무지하게 행복했으니까, 내 기분을 훔치는 쟤도 행복하겠지.

집으로 가자.

**

자정이 다 돼서 집 앞에 도착했다.

다혜는 탈진해서 눈이 자꾸만 뒤집어지고, 나는 다혜 옷으로 무거워진 캐리어를 옮기느라 죽을 맛이다.

삑삑삑삑삑.

문이 열리는 걸 보고 나서야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때, 다혜의 팔이 앞으로 쑥 나오더니, 자기가 먼저 들어가버렸다.

그리고는 낑낑대며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뭐해?”

“성현아 넌 조금 이따가 들어와.”

“이틀 동안 얼마나 어질렀길래 그래...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가자.”

“그런 거 아니고... 잠깐 할 게 있으니까 10초만 이따가 들어와. 알았지?”

쾅!

그리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도대체 방에 무슨 짓을 해놨길래...

내일 청소할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하네.

“10초 지났어. 이제 들어가도 돼?”

그런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문에 귀를 대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래서 10초를 더 기다리다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안에는...

바닥에 엎드려서 내게로 다가오는 박다혜가 있었다.

“먕! 먕!”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