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7화. 모여봐요 온기 괴물의 숲_(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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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한 모험가 김폭딸은 사악한 마법사 이큐드라우스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패기 좋게 여정을 떠났던 네 명의 모험가는 그렇게, 짐을 챙겨서 마을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앞으로도 세계수의 폭주는 계속됩니다. 왕궁의 찬란한 역사도 언젠가는 세계수의 뿌리에 묻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난 괜찮아. 활약했으니까 상관없어.”
“나도. 비싼 식물 잔뜩 캤으니까, 마을에 돌아가서 부자 되는 엔딩도 좋지.”
“저 두 연놈들만 여기 묻고 가면 나도 찬성임.”
“그러면... 주사위 진짜로 안 던져도 돼요?”
다혜의 물음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금수들과 온기 괴물은 조금 전까지 울어서 눈가가 새빨갛다.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우는 다혜를 보고 귀여워서 웃고 넘겼겠지만.
아니면 그냥 간단히 위로하거나.
하지만 그들은 다혜와 한마음이 되어서 정신없이 울어재꼈다.
나는 그 이유를 아는데,
똥겜 유저라서 그렇다.
빌리언 사가는 8년이나 된 게임이다.
패치는 더디고, 신규 유저도 거의 없다.
초보자 마을은 텅 비어있고 고수들은 뉴비가 나타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소매넣기 쟁탈전을 벌인다.
한 달 전쯤인가, 비테라라는 옆 동네 게임이 서버 종료를 한 적이 있었다.
한때는 빌리언사가와 라이벌이었던 게임인지라, 우리는 단체로 몰려가서 깽판을 놓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고 보니 우리는 아무런 채팅도 못 치고 멍하니 있다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텅 빈 도시.
커뮤니티에 섭종 소식이 퍼졌는데도 모인 유저는 기껏해야 50명 정도였다.
그 적막함과 쓰잘데기 없이 발랄한 BGM이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자아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섞여서 올드 유저들의 추억담을 엿들었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화면에 떠오르는 운영자의 감사 인사를 마지막으로,
검은 화면.
그렇게 간단하게 하나의 세상이 사라졌다.
돌아온 뒤에는 그 누구도 비테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마 모두 똑같은 충격을 받았으리라.
MMORPG인 비테라도 시작은 끝없는 모험으로 가득했을 거다.
하지만 사람이 운영하는 한, MMORPG도 언젠가는 엔딩을 맞는다.
개연성은 하나도 없고, 유저는 뒷통수를 쳐맞고,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쓰레기 엔딩 말이다.
우리에겐 비테라의 종말이 남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빌리언 사가의 서버가 닫히면 우리가 쌓아온 추억도 검은 화면에 가려질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늙었는데도 불구하고 엉엉 우는 다혜를 따라서 울 수 있다.
원치 않는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똑같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혜가 필드를 접어 상자 속에 넣었다.
주사위는 주먹에 꼭 쥔 채로.
그래, 잘한다.
왕국이야 뒤지든지 말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훌륭한 엔딩이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는 똥겜이다.
“아~ 재밌었다.”
“진짜요... 너무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우리 다음에도 또 해요!”
“역시 정모가 최고지? 그러니까 다들 튕기지 좀 말고 부르면 튀어나오란 말야.”
“예이~ 오크 짐꾼도 심부름하느라 고생 많았다. 도적 캐리라 별로 재미는 없었겠지만.”
“권성현파이터는 이불을 깔지 않기로 합니다. 3인의 모험가는 차디찬 방바닥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온 왕국이 린넨트라우져의 죽음에 환호를 보냅니다.”
“너 되게 재미있었나 보다?”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세계수의 미궁이 상자 속으로 사라진 지금도 상상된다.
뒤지기 직전에 마법사 이큐드라우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짱돌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짐을 싸서 떠나는 모험가들을 보고 말이다.
아마 현타가 개쎄게와서 개과천선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오래오래 던전에 남아서 다음 모험가들을 괴롭혀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자들은 노트북으로 빌리언 사가를 하겠다며 거실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웠다.
새벽 3시에 체력도 좋지.
그리고 다혜는 원숭이의 무릎을 베고 공룡을 끌어안은 채로 눈을 껌뻑였다.
모험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걸까? 노트북을 눈앞에 놔두고 자꾸만 허공을 응시한다.
그런데...
보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짜증 나네.
박다혜 이 자식... 언제는 지 마음대로 내 무릎을 가져가 놓고.
이제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 무릎에 기대다니...
이 질투가 추악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그저 원숭이의 허벅지에 로우킥을 개쎄게 박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 원숭이가 째려보며 말했다.
“뭘 봐. 잘 거라며?”
“안 그래도 지금 들어간다 이 아줌마야. 게임 적당히 하고 다혜 재워라.”
“얼씨구, 안 사귄다며 왜 참견? 아빠냐? 그렇게 징징대도 다혜 안줄꺼니까 오늘은 혼자서 자.”
“평소에 남편한테 듣던 말이죠?”
“뒤진다 진짜.”
**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귀가 따갑도록 시끄러웠는데, 드디어 혼자가 됐네.
술 한잔하고 열 시간 동안 앉아있었더니 몸이 노곤노곤하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잠은 못 잘 거다.
벌써 3주가 넘게 다혜랑 자 버릇했더니 이제는 혼자서 잠드는 법을 모르겠다.
이거 의존증인가.
생각해보면 다혜 걱정을 할 때가 아니네.
이렇게 꿀 빨다가 다혜가 사라지면 혼자서 어떻게 잠드냐고.
하아...
병원은 진짜 피하고 싶었는데, 날 잡아서 수면 클리닉에라도 가봐야 할 것 같다.
나도 언제가 다가올 종말을 위해 지금부터 재활 훈련을 해야지.
눈을 뜨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키보드 소리.
문밖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목소리와 웃음들.
왠지 듣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4인의 여정이 끝난 뒤에도 끊임없이 에필로그가 계속되는 것 같아서.
나는 창밖이 퍼런색으로 물들 때까지 그 웃음 소리를 듣다가,
소리가 잦아들 때쯤에 몸을 일으켰다.
아침이나 만들자.
**
아침 메뉴는 짬뽕이다.
모듬 해물과 홍합을 넣어서 얼큰하게 끓인 짬뽕에 흰 밥 한 그릇.
열두 시가 다 돼서 깬 금수들이 3일 굶은 누렁이처럼 허겁지겁 수저를 놀렸다.
“어흐~ 뒤지네. 권성현이 센스 좋다잉?”
“진짜 속 다 풀리네... 나 중국집은 절대 안 시켜 먹는데, 니가 만든 짬뽕은 가끔 생각나더라.”
“오빠, 저 배고프면 여기 와야겠어요. 식당보다 훨씬 낫네.”
“원숭이랑 닭 떼놓고 오면 공짜로 줄게. 아, 그리고 섹스라고 할 때마다 멘탈 부담금 1000원 있어.”
“여기요.”
아카는 지갑에서 재빨리 천원을 꺼내더니 식탁 위에 놓고,
“섹스!”
라는 말로 아침을 열었다.
왠지 오늘 하루는 음탕한 하루가 될 것 같네.
누구를 탓하랴, 입조심 안 한 내 잘못이다.
“다혜야 맛있어?”
“응! 토할 것 같았는데, 이거 먹으니까 다 내려갔어.”
“저것들 가면 더 내려갈 거야.”
그러자 원숭이가 또 태클을 걸었다.
“얼씨구? 우리 어젯밤에 너 없이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모르지?”
“왜 모르냐. 밤새 뒤지게 시끄러워서 잠도 못잤구만.”
“다혜 없어서 못 잔 건 아니고? 진짜 다혜 확 우리 집에 납치해버릴까. 방도 남는데 어때 다혜야? 나랑 같이 갈래?”
농담인 거 뻔히 아는데 나는 이상하게 다혜에게로 눈이 갔다.
어제 원숭이 아줌마 무릎 위에 편하게 누워있던 걸 봐서 그런가.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반사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저 여기가 좋아서요... 죄송해요 언니!”
잘한다 박다혜.
그래야 내 리트리버답지.
나는 숙취도 없는데 속이 싸악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아침을 다 먹고 금수들을 배웅했다.
“잘 가라. 다시는 오지 말고.”
“응, 이제 매주 올 거야. 원석아 정모 팍팍 잡아라.”
그리고 아카는 나와 다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차 빨리 상하니까 하루에 한잔 씩은 드셔야 해요! 아셨죠?”
“고마워 잘 먹을게. 다음에 또 보자.”
“안녕히 계세요! 다혜는 알지? 연락해?”
“응! 잘 가!”
쾅.
문이 닫히고 마침내 평온이 찾아왔다.
나와 다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웃으며 하이 파이브를 갈겼다.
드디어... 정모 성공적으로 끝!
걱정을 그렇게 하더니, 다혜의 얼굴에는 아쉬움만 남아있었다.
친구도 만들고, 그림 선생님도 구했으니 수확도 크다.
그러고 보니 전부 다 아카가 한 거네.
원숭이랑 닭은 도대체가 쓸모가 없다.
그때, 다혜가 아카의 찬잔 세트를 가르키며 말했다.
“성현아 이거 내가 열어봐도 돼?”
“그래. 청소하려고 했는데,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천천히 하자.”
“좋아!”
다혜가 찻잔 세트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주전자나 찻잔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그만 상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음... 그러면 그렇지.
아카 나이에 커피도 아니고, 차 선물이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역시 지 같은 선물을 준비했구만.
조금 전에 차나 한잔 마시고 천천히 하자. 라고 말한 게 부끄러워서 미치겠다.
“성현아 이거 뭐야? 왜 찻잔이 없지?”
다혜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상자 중에 하나를 열어서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귀까지 새빨개져서 후다닥 상자를 봉인했다.
뭐긴 뭐야 콘돔이지.
아카의 간절함 바램은 잘 알겠지만, 언젠가 아카에게 돌려줘야겠다.
그래야 섹무새의 증식을 막을 수 있으니까.
“그거 나 주고,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다.”
“성현아, 청소는 나중에 하고 잠부터 자자. 너 못 잤잖아.”
하긴, 다혜의 말이 맞다.
지금 버티다가 늦게 잠들면 또 밤잠을 설칠 테고, 내일 출근을 망칠 테니까.
근데 콘돔을 봐서 그런가, 그냥 잠을 자자는 말이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릴까.
잠만 자는 우리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못이기는 척 침대로 끌려가 다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겨운 향기가 난다.
단 하룻밤 빼앗겼을 뿐인데 미칠 듯이 그리운 살냄새가.
재활 훈련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내가 이 달콤한 꿀을 스스로 끊어낼 수 있을까?
마침내 종말의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어른답게 거침없이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데.
이 향기를 맡으면 한없이 마음이 약해진다.
[못 던지겠어... 안 끝났으면 좋겠어...]
다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내 나이가 9살만 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염치없이 울고불고 떼쓰다가 주사위를 훔쳐서 달아나버릴 텐데.
어른인 나는 도망칠 곳이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