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75화. 박다혜 진화
* * *
허벅지랑 무릎... 안 아픈 데가 없네.
눈을 뜨자마자 아이고 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으... 하루 세 번은 진짜 오버였나.’
나이에 안 맞는 광란의 하루를 보낸 대가를 이제야 치른다.
12시간을 내리 잤는데도 몸에 힘이 없네.
그래도... 행복하긴 해.
내게는 간밤의 열기보다 다혜의 목소리가 더 짙게 남아있었다.
[다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돼.]
나는 진짜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다혜는 왜 저렇게 나한테 의지해 주는 걸까.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도 나를 안으며 안심하는 다혜가 고맙기만 하다.
이제 아침 6시.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너무 일찍 자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원래는 다혜가 먼저 일어나서 나를 깔아뭉개면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는데.
간만에 먼저 일어난 것도 좋지 뭐.
오랜만에 자는 얼굴이나 구경해야지.
허리를 일으켜 다혜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이건 또 뭐람.
오늘도 다혜는 예쁘긴 하다.
피부가 얇아서 그런가, 잘 때도 입술에 생기가 돌고.
꼭 감은 눈은 속눈썹이 길어서 일러스트 같은데, 살짝 비친 실핏줄에 현실감이 묻는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내가 사준 잠옷이랑 속옷을 입고, 머리에는 내 샴푸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친구만 많았으면 다혜처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마냥 구경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혜의 베개가 젖어있다.
눈 옆에는 눈물 자국이 잔뜩이고.
우리 집에선 늘 좋은 꿈만 꿨으면 좋겠는데.
악몽이라도 꾼 걸까.
하긴, 내가 아는 다혜의 삶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긴 세월을 가족도 없이 혼자서 버텨왔으니 그 인생에 악몽 거리가 하나도 없다면 말이 안 되지.
깨워야겠다.
한번 리셋하면 좋은 꿈으로 바뀔지도 모르니까.
리셋에 실패한다면... 현실에서라도 기분 좋게 해줘야지.
난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았으니 현실에서라도 다혜에게 봉사해야 한다.
“다혜야.”
“으응... 응? 헤... 성현이다.”
매일 보면서 뭐가 그리 좋을까.
날 보자마자 헤벌레 웃는 눈에 심장이 아프다.
“악몽 꿨어?”
“응... 아니? 엄청 좋은 꿈 꿨는데?”
“근데 왜 울어.”
“나 울었어? 헐... 뭐야! 베개 왜 이래?”
“걱정되네... 진짜 좋은 꿈 꾼 거 맞아?”
“응! 다시 꾸고 싶을 정돈데?”
“그러면 다행인데... 이리 와.”
다혜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좋은 꿈을 꿨다면 다행이지만 안심할 수 없다.
다혜는 진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오히려 씩씩해지니까.
내게 응석을 부리고 떼를 쓸 때는 오직 스킨십을 갈구할 때뿐이다.
“착하다. 우리 다혜 착하다.”
“나 애기 아닌데... 진짜 악몽 안 꿨어.”
“그럼 나 씻으러 간다?”
“안 돼! 더 해줘...”
간만에 봉사하는데 곱게 받을 것이지.
나는 이불에서 갓 나와 뜨끈뜨끈한 다혜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말랑말랑한 촉감에 어제 무리했던 게 전부 치유되는 느낌이다.
“성현아~”
“말씀하시오.”
“나 궁금한 거 있어.”
“뭐든 물어보십시오. 다 불어버리겠나이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왜 나랑 친구 하자고 했어? 처음에는 아무한테나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아하. 이제 알겠네.
다혜는 그 시절의 꿈을 꿨나 보다.
미로에서 내가 다혜를 발견한 그 시절의 꿈.
그 무렵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니...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전부 이해된다.
즐거운 꿈에 울었다는 얘기도 뭐,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지.
근데 내가 다혜에게 집착한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다혜는 열두 살 이었으니까.
21살 짜리가 초딩한테 의지했다고 어떻게 말하냐고.
언젠가 술이나 잔뜩 맥이고 조용히 털어놔야지.
“비밀이야.”
“치사해...”
“정 듣고 싶으면 말해주고.”
“됐어. 안 들어도 돼.”
“진짜? 왜?”
그러자 다혜는 칭얼칭얼 모드가 되어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거 몰라도 너니까. 그냥... 사랑한다고...”
아침부터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시는군요.
우리는 어제 세 번이나 했는데, 벌써 가슴이 뜨겁네.
그렇다면... 어차피 일찍 일어나서 시간은 많으니까...
“우리 이빨 닦을까?”
그렇게 말하자 다혜는 나랑 눈을 맞추고 고개를 까딱했다.
고개를 45도로 꺾고... 내 표정을 읽으려는 것 같은데...
뭐가 읽히기는 하냐? 음... 읽었나 보네.
다혜는 씨익하고 웃더니 순식간에 침대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나도 질 수 없지.
다혜와 엎치락뒤치락 화장실로 달려가서 먼저 치약을 낚아챘다.
“응, 내가 이겼어.”
“빨리! 나도 치약 줘!”
그리고는 이빨 닦기 시합이 벌어졌다.
어차피 먼저 끝나면 기다릴 거면서, 우리는 마구 팔을 흔들며 이빨을 닦았다.
다혜는 그 짧은 시간조차 못내 아쉬워서 내 귀를 만지작 거리고.
나는 그 손 위에 내 손을 덮어본다.
그리고는 입을 헹구자마자 다혜의 입술이 내 입을 덮쳐왔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쓰다듬고,
물로 차가워진 입가가 뜨거워질 때까지 입을 맞췄다.
“응... 오늘 출근 안 했으면 좋겠다...”
“나 출근 안 하면 뭐하게?”
“뽀뽀.”
“이미 하고 있잖아.”
“슈퍼 뽀뽀...”
다혜는 한번 삘 받으면 절대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안 떨어지는 다혜를 부둥켜안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나도 출근 안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만, 절대 안 될 말씀이지.
왜냐하면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대가리를 박아야 하거든.
어제는 광고 방송을 터뜨린 걸로도 모자라서 보고도 없이 바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그것도 마케팅과 인사팀 두 쪽에 전부 다 폐를 끼쳤다.
게다가 이대로 집에 남으면 네 번째 거사를 치러야 하잖아?
나 진짜 죽어.
“이제 뽀뽀 금지.”
힘겹게 다혜를 떼어내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
“다녀올게.”
“오늘... 데리러 가도 돼?”
“정류장?”
“아니. 회사!”
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안 그래도 오늘은 진탕 깨질 텐데.
회사 근처에서 맛있는 것도 먹여주고 쇼핑도 하고.
퇴근하자마자 다혜를 보면 전부 다 치료될 것 같다.
역시 파티에는 힐러가 있어야지.
“좋아. 늦으면 가만 안 둬.”
“넵! 6시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이뻐 죽겠네.
괜히 다혜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깨지러 가 봅시다.
**
부서에 사람이라도 많으면 분위기라도 느껴질 텐데.
사무실에는 박과장님뿐이었다.
나는 곧장 과장님 자리로 가서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복귀하고 보고 드렸어야 했는데. 무단으로 이탈했습니다.”
박과장님은 말도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넌 박다혜 작가만 엮이면 이상해진다? 연애하지?”
“넵. 얼마 안 됐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일에 영향 주지 마라. 너나 박다혜 작가 쪽이나.”
“네?”
“마케팅 쪽으로 넘어가 봐. 곽과장한테도 제대로 사과하고.”
“넵 알겠습니다.”
시말서 얘기가 안 나온 건 다행인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경고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다혜 이름은 왜 나온담.
어차피 프로모션도 끝났는데.
그리고 나는 마케팅 사무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박과장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권대리님! 좋은 아침! 빨리 이쪽으로 와봐요!”
잔뜩 신난 곽과장님이 파티션 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리로 가보니 대뜸 매출 그래프를 보여주시네.
“이게 뭐에요?”
“어제 월간 패키지 매출이요! 보세요. 말도 안 되죠?”
프로모션을 했으니 매출을 확인하는 건 당연하지만...
하루 만에 결과가 나와봤자 얼마나 나온다고 그러실까.
그런데 얼핏 봐도 그래프 모양이 비정상적이었다.
어제 하루만 그래프가 산처럼 솟아있네.
이번 패키지는 다혜의 화제성을 이용하기 위해서 긴급하게 만들어진 거였다.
기존에 있던 아바타를 묶어서 할인가를 적용하고, 거기에 다혜가 작업한 아바타를 끼워 넣은 거.
평소라면 욕을 먹어도 싼 구성인데.
겨우 하루 만에 일주일 치 매출을 기록하다니.
게다가 월말이라 구매력도 떨어져 있을 텐데...
슈퍼 박다혜... 진짜 말도 안 되네.
곽과장님이 신난 것도 당연했다.
아마 작년부터 했던 프로모션을 다 고려해도 이번이 최고 실적 아닐까.
“권대리님! 사과하러 오셨죠?”
“당연하죠. 어제 현장 케어 못 해서...”
“근데 사과 안 해도 될 것 같죠?”
“그래도 할 건 해야죠.”
“하지 마세요. 다혜씨 때문에 프로모션 대박쳤으니까! 이제 일 합시다!”
그다음에는 연이어 다음 프로모션들을 내놓았다.
다음 인방 일정부터, 다혜의 캡쳐샷을 이용한 이모티콘 기획, 광고 출연까지.
하루만에 별걸 다 준비하셨네.
“저... 과장님.”
“네! 시간차 두고 천천히 진행할 거니까 대리님은 작가님이랑 스케줄 조정 좀 해주실래요?”
“죄송하지만 박다혜 작가가 앞으로 인방은 안 하겠다네요. 코스프레도요.”
그러자 마케팅 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더니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신나서 기획서 엄청 쓰셨을텐데, 죄송해라.
하지만 다혜의 의지가 확고해서 어쩔 수 없다.
오늘 아침에도 절대로 안하겠다며 계약금도 돌려주라고 했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음... 하아... 왠지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작가님도 힘드실 텐데, 저희끼리 신나는 것도 그림이 좀 그렇네요. 작가님 상태는 어때요? 상처 많이 받았죠.”
“괜찮아요. 화내고 다 풀린 것 같아요.”
“에휴... 저도 어제 보는 내내 조마조마하더라구요. 그래도 이모티콘 작업은 설득 좀 해봐 주실래요?”
그건 아마 다혜도 좋아할 것 같았다.
외주를 주면 다혜는 앉아서 돈 버는 거고. 딱히 얼굴 팔릴 일도 없고.
안 그래도 요즘 한창 이모티콘 작업 중이니까 직접 외주 받아도 좋아하겠지.
“네, 그건 걱정마세요.”
그리고 곽과장님은 마지막으로 기획서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도요. 이건 작가님도 환영할 테니까... 열심히 진행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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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 깨진 건 10초도 안 되네.
즐거운 마음으로 미팅 두건 진행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다혜를 기다렸다.
아직 5시 반도 안됐는데.
벌써 다혜가 보이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슬리퍼 차림으로 참방거리면서.
예쁜 분홍색 우산을 쓰고, 한손에는 다른 우산을 들고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손을 흔드는 대신 기둥 뒤로 숨었다.
지금 나를 발견하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올 테니까.
대신 다혜가 접근할 때까지 잠복했다가...
“왁!”
“꺄악! 아 뭐야! 놀랐잖아!”
“진짜 놀랐어?”
“당연하지! 아구... 심장 아파...”
“벌써 놀라면 안 되는데. 너 놀랄 거 더 있어.”
“또 뭔데...”
“이거.”
나는 다혜에게 곽과장님이 준 기획서를 보여줬다.
아직은 대외비지만.
엎어질 일은 없으니까.
다혜의 눈이 커다래진다.
지금 다혜는 어떤 기분일까?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못했던 제안을 이제야 하게 되네.
“헐 이거 진짜야!?”
“축하해. 이제 로산느 공식 일러스트레이터네.”
“꺄악!”
다혜는 주변에 사람이 버글버글한데도 소리를 지르며 나를 껴안았다.
회사 앞이라 절대로 이러면 안 되는데.
하긴, 나는 딱히 다혜를 자랑할 사람도 없으니까.
과장님께 사귄다고 말도 했겠다.
이제 다혜가 방송에 나올 일도 없겠다.
무차별 염장이라도 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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