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105화. 던전의 오아시스_(3)
* * *
지난 3개월 동안 다혜는 정말 귀여웠는데.
나만 보면 쭈구리 표정을 짓고 도망치거나,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리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디렉터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 다음에 쪼르르 사라지는 것도.
뭐랄까, 그럴 때마다 난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모르는 후배한테 일방적인 애정 공세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름 재밌었는데.
근데 이제 못 보게 됐네.
아쉽다.
다혜가 이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표정을 지었다.
“다? 다아~~? 과장님 말고도 다 알고 있어?”
“응.”
“어떻게 아는데!? 곽과장님이 소문냈구나!”
“그럴 분은 아니지.”
“그럼 어떻게 알아? 나 진짜 조심했는데...”
다혜의 분투는 인정하는 바다.
저렇게 노력하는데, 나도 안 들킬 줄 알았지.
그런데 복병은 따로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들킨 이유는...
나 때문이다.
한 달 전쯤에 신과장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디렉터님, 다혜씨한테 관심 있어요?]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이거 보실래요?]
[뭔데요?]
그리고 내게 핸드폰을 보여주셨는데, 나도 들어가 있는 개발팀의 단톡방이었다.
업무용은 아니고,
우리는 회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해왔는데.
과장님은 그간 팀원들이 올린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주셨다.
[사진은 왜요? 저도 다 본 건데.]
[본인이 어떻게 나왔는지 체크했어요?]
[아... 뇨? 전 늘 똑같은데요 뭘.]
[그럼 지금이라도 보세요. 본인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떻게 라니.
난 그때 처음으로 사진 속의 내 얼굴을 제대로 봤다.
단체 사진이나, 사무실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 회식에서 건배를 하는 사진에 내가 나올 때마다 얼굴을 살폈다.
하아...
보면 볼수록... 죽고 싶어지네.
진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사진마다 내 시선은 다혜에게 박혀있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나도 몰랐지.
평소에 내가 저렇게 변태처럼 곁눈질하고 있을 줄은.
[본인이 봐도 이상한가 보네? 디렉터님 얼굴 완전 빨개졌어요.]
[...이제 보니 기분 나쁠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기분 나쁠 건 없지. 그냥 팀원들이 궁금해하길래~ 내가 대신 총대 맨 거에요.]
내 민망한 표정을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신과장님이 당당하게 물었다.
[그래서 디렉터님, 다혜씨한테 관심 있는 거 맞아요? 아, 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저희 사귑니다.]
[옴마?]
이렇게 된 거다.
끝까지 발뺌할 수도 있었지만 괜히 거짓말해서 부스럼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내 한심한 얼굴을 보니 지금 구라쳐도 언젠가는 들킬 것 같았다.
결국 들킨 것도 나고, 실토한 것도 나고.
“이이이! 근데 왜 말 안 했어!”
“그냥, 되게 열심히 숨어다니길래. 귀여워서...”
“으아... 배신이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미리 말했으면 어떻게 했는데?”
“그야 당연히...”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혜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들키든 말든, 결국 달라질 게 없다는걸.
우린 어차피 회사원이니까.
“박다혜 작가님. 아셨지요? 들켜도 뽀뽀는 안 됩니다. 팔짱도 끼시면 안 되구요.”
“대리님...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같이 회사 다니면 재밌을 줄 알았는데...”
“회사에서 재미를 찾으면 양심이 없는 겁니다. 재미없는 걸 하니까 돈을 주죠.”
“재미없는 것도 재밌게 만들어주는 여친이 되고 싶은걸요.”
“윽!”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는 상황극이 진짜 웃긴데.
그 내용이 내 심장을 후벼팠다.
나도 그러고는 싶지.
회사 vs 다혜의 싸움에서는 다혜가 압승했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에 다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했는데.
다혜는 숨어다니느라 더 힘들었나 보다.
나도 다혜의 말처럼 재미없는 것도 재밌게 만들어주는 남친이 되고 싶다.
“다혜씨,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뭐가요?”
“이왕 들켰으니까, 우리 밥은 같이 먹어요.”
“헐...”
“싫으면 혼자 드셔도”
“안 돼! 분명히 같이 먹자고 먼저 말했다! 영수증 겹쳐도 상관없지?”
“당연하지. 안그래도 너 맨날 뭐 먹는지 궁금했는데. 내일은 너가 좋아하는 데로 가자.”
“아싸! 그러면 12시 되자마자 뛰어나와. 알았지?”
“계약직이 디렉터에게 할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디렉터가... 말대꾸?”
음... 벌써부터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지네.
하지만 틀킨 건 나니까 어쩔 수 없다.
내일도 엄청 바쁠 것 같지만, 점심시간 정도는 괜찮겠지.
“알겠습니다 계약직 선생님, 내일 뵙도록 합지요.”
**
다음날, 다혜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작업하면서도 혼자 방실방실 웃질 않나.
팀원들이랑 대놓고 잡담하질 않나.
나랑 눈이 마주치자 혀를 빼꼼 내미는 무리수까지 뒀다.
건방지게...
딱 오늘만 봐줘야지.
어젯밤, 다혜에게 어쩌다 팀원들에게 들켰는지 말해줬더니, 다혜는 잠도 안 자고 새벽까지 단톡방을 구경했다.
사진보면서 혼자서 실실대고, 내 표정 중에 제일 웃긴 것들을 골라서 내게 보여줬다.
아마... 여태까지 혼자서만 눈치 보는 줄 알고 있었는데,
나도 똑같았다는 걸 알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곧 점심시간이 되면 처음으로 나랑 단둘이 밥을 먹을 테니까.
오늘은 기분 좋게 놔두고 싶다.
‘그나저나 궁금하네...’
다혜는 평소에 뭘 먹고 살았을까.
개발 4팀의 식사 문화는 완전히 자유였다.
규칙이 하나 있다면 [일 얘기 금지] 정도?
우리 팀은 워낙 시간이 빠듯해서 밥 먹다가도 일 얘기로 빠질 게 분명하니까.
최소한 점심만큼은 쉬고 오라고 이런 규칙아닌 규칙을 정했었다.
그래서 프로그램팀을 빼면 대부분 혼자서 먹고 오던데.
혼자 밥 먹는 다혜의 모습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대인 기피증이 있기도 했고, 편의점 VIP이기도 했으니까.
다혜는 도대체 어떤 가게에 들어가서 뭘 먹었을까.
영수증이나 한번 훔쳐볼 걸 그랬네.
그래도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예전처럼 컵라면이랑 도시락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시간은 어느덧 11시 50분.
“다들 밥 먹고 합시다.”
파티션 너머로 다혜와 눈이 마주치고, 10분 빨리 점심시간을 열었다.
그리고 어제 다혜와 약속한 대로 회사 빌딩 건너편 상가에서 다혜와 만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계약직 각하.”
“디렉터놈 왔느냐! 10분 일찍 끝낸 건... 참으로 묘수였노라!”
“오늘만이다. 내일부터는 다시 빡빡하게 할 거야.”
“알지, 알지!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다혜는 내 손을 잡고, 빌딩마다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미로를 헤쳐 나갔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겨우 하루에 딱 1시간만 공유할 뿐인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까.
그런데 사진 속 내 얼굴을 생각해보면 나도 다혜랑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 또 병신같이 웃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때, 다혜가 회사 바로 앞에 있는 빌딩으로 들어갔다.
나는 벌써 5년이나 이 동네에서 밥을 사 먹었는데.
이 빌딩에서는 뭘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여기는... 대형 문구점이 있어서 비품 사러 가끔 오는 곳인데.
식당도 딱히 없고.
“다혜야 여기 맞아? 너 도대체 뭘 먹고 산 거야?”
“습! 또 말대꾸? 어제 나 먹는 걸로 먹기로 했잖아~.”
“그건 맞지만... 여긴 밥집 없는데?”
“있지여~ 나만 아는 개꿀 밥집.”
설마, 비상계단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그런 결말은 아니겠지.
그러면 나 진짜 운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혜의 개꿀 밥집으로 들어가서 당당하게 메뉴를 주문했다.
“기본 1시간으로 둘이요!”
라는 요상한 메뉴를.
여기는...
만화카페잖아 다혜야...
“너 맨날 여기서 밥 먹었어?”
“응! 우연히 발견했는데, 여기 진짜 좋아. 너도 엄청 좋아할걸?”
세대 차이인 걸까.
다혜는 진심으로 좋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나는 눈물 나오기 1초 전이었다.
대딩도 아니고 왜 여기서 밥을 먹냐고...
나는 학생 때도 만화카페에 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막 어른들이 담배 피고 냄새 엄청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긴 하네.
식사 메뉴도 엄청 많고.
다혜는 29살 먹은 나조차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식사를 주문했다.
“저 항상 먹는 걸로 주세요! 성현아 넌 뭐 먹을래?”
항상 먹는 거라뇨...
다혜가 그렇게 주문하자 아르바이트생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40년 된 노포의 단골도 아니고, 아주 죽이 척척 맞는구만.
“난... 가라아게 덮밥 먹을래.”
음식을 받아서 다혜를 따라가니, 다혜는 자연스럽게 동굴처럼 생긴 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안에는 작은 테이블 같은 것도 있고.
둘이 들어가도 공간이 충분히 넓어서, 어째... 점점 괜찮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밥을 다 먹은 다음에는 그 기분이 확신이 되었다.
만화카페 좋은데구나.
동굴 입구에는 커튼이 있어서,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도 푹신푹신하고, 쿠션도 있고.
나는 다혜랑 구석에 앉아서, 어깨를 붙이고, 손을 잡았다.
방금 전까지는 회사에서 미친 듯이 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집에 온 것 같다.
하긴, 제주도에서도 느꼈었지.
난 다혜랑 둘이 있으면 집이 아니더라도 최대치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성현아 여기 어때? 여기 개꿀 밥집 맞지.”
“인정. 개짱 좋다...”
“히히, 누워봐. 잠깐 자고 가자.”
다혜의 다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내 손을 주물럭거리는 다혜의 손길을 만끽했다.
그러자 개꿀 밥집이 천국이 된다.
어제 게임 시연은 반응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경영팀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부족했다.
내 수익구조는 전문가들의 눈에는 그저 겜돌이의 망상일 뿐이니까.
정광철 과장이 말했던 것처럼.
그래서 이제부터는 팀원들의 의견을 들어볼 참이었다.
전체 회의를 소집해서 각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나만의 망상이라면 노선을 변경하려고.
그래서 하루 종일 위가 지끈거렸는데.
하...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마치 어제 했던 1.0D 버전 같다.
다혜와 던전을 공략하다가 빨피로 오아시스에 도착해서, 단숨에 체력을 가득 채운 느낌.
“성현아, 시간 됐다. 이제 가야 해.”
잠깐 눈 감은 것 같은데,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겨우 30분의 휴식이 너무 개운해서 미치겠다.
몸이 저절로 일으켜진다.
좋아. 체력도 다 채웠으니까, 씩씩하게 다음 보스의 목을 따러 가야겠다.
물론 다혜랑 같이.
“일하러 가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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