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134화. 던젼 키퍼_(4)
* * *
대회가 끝나면 나는 어떤 결말을 보게 될까?
모두가 예상하던 대로 주아영에게 개같이 패배하고,
시상대 위의 주아영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될까?
아니면 내가 그렸던 비현실적인 상상처럼, 주아영 앞에서 제로투를 추고 있을까.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거다.
지금 대회장 어딘가에선 아이돌이 신곡을 부르고, 수만의 팬들을 동원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그런데...
이젠 나도 몰라.
“아, 오빠! 게임 만든 사람 맞아요? 패턴 다 알고 있잖아요! 잘 좀 해봐요!”
“나 서른안 개안 직전이라고... 알면 뭐 해, 손가락이 안 따라주는데!”
“아오! 이 버스충!”
“나도 아니까 좀 조용히 해 봐...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이제 바깥일 따위는 모른다.
나는 지금 아카랑, 마바지랑 스태프 대기실에 앉아서 던전을 돌파하는 중이다.
디렉터 주제에 이래도 되나 싶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게임을 하는 것도, 게임을 만드는 것도, 그 모든 행동의 이유는 전부 다혜니까.
지금은 어서 빨리 다혜를 따라잡고 싶을 뿐이다.
이 1시간이 끝나기 전에 기록을 남기고 싶다.
우리가 열심히 만든 게임이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 순간에, 다혜와 함께했다는 기록을 새겨야겠다.
그건 너무 당연한 상식인데.
지난 1년 동안 일에 취한 나머지 몰상식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지.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이 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혜랑 파티 플레이를 하고 싶다.
“방송은 보고 있냐? 다혜 죽었어?”
“아뇨! 아직도 살아있어요!”
“말이 되냐? 이제 포션도 없을 텐데?”
“게임 만드신 양반이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일단 14킬 째에요.”
말도 안 돼...
pvp는 처음부터 승률 50%를 목표로 개발했다.
매번 죽는 것도 짜증 나지만 매번 이기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으니까.
회복의 가치를 극도로 높여놔서, 누구나 한두 번 싸우면 밑천이 거덜 나게 만들어 뒀다.
참고로 14연승은 가위바위보를 14번 연속으로 이기는 것과 비슷한 확률.
다혜가 성장형 능력만 고른 게 이제야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미친 컨트롤까지 겸비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가도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나는 가야 한다.
[저, 이미 파티가 있어서요. 그 사람 말고는 다른 사람이랑 파티 안 하거든요.]
나는 다혜랑 8년이나 함께 게임을 했지만.
나는 내가 없는 빌리언 사가에서 다혜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모른다.
그냥 열심히 노가다를 했겠거니, 가끔은 다른 파티에 들어가서 재료도 수집하고, 던전도 가고.
나 없이도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다.
다혜도 날 기다렸던 거다.
내가 폭딸이를 생각하며 지긋지긋한 하루를 이겨냈던 것처럼.
어쩌면 일기장 가득 그림일기를 그렸던 시간만큼.
공용창고에 쌓인 아이템의 숫자만큼, 많은 날들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갈 거다.
내가 빌리언 사가에 들어가면 폭딸이는 언제나 날 기다려줬으니까.
나도 반드시 그곳에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 룰이다.
이제 코앞이다.
보스만 죽이면 화톳불이 나온다.
“아씨... 딜이 부족해... 왜 연금술사로 한 거야!”
“니가 만든 밸런스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하아... 똥겜 수준.”
“말하는 것 보소, 아카야, 저새끼한테 디렉터 자격이 있다고 보냐?”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요... 패배자라 할 수가 없네요.”
“...시발. 우리 왜 졌냐?”
“헐! 오빠 보스 잡았다! 빨리 들어가요!”
이제 화톳불에 붕대만 넣으면 다혜를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준비를 해야겠지.
[포션 제작을 시작합니다. 조합 아이템을 선택해주세요.]
지금 말해봤자 변명 같지만...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고전한 까닭은, 단순히 늙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 다혜와 파티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내 실력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그래서 던전을 돌파하는 내내 성장도 포기한 채, 재료를 모았다.
[아이템 , , 를 조합합니다.]
[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숨겨진 레시피였다.
당연히 유저들은 아직 모를 거다.
디렉터인 주제에 게임 안에 숨겨진 지식을 멋대로 휘두르는 건 비겁한 일이지만.
운영자가 유저들을 때려잡는 것도 존나게 치사한 일이지만.
원래 로그 라이트 게임은 처맞으면서 배우는 거니까 괜찮다.
라고 하기엔... 선을 넘었지.
‘유저들아... 못난 디렉터라 미안해... 하지만...’
성현폭딸 듀오는 죽지 않아.
이제부터 뒤지게 쳐맞을 줄 알아라.
“오빠 뭐해요! 빨리 들어가요!”
그래, 이제 포션도 만들었으니까 들어가야지.
그런데, 화톳불을 눈앞에 두고 심각한 문제 하나가 떠오르고 말았다.
“아카야, 지금 안에 몇 명 있어?”
“다혜까지 총 넷이요!”
“그러면... 다혜가 나를 어떻게 알아보지?”
“어...? 그러네?”
이벤트 서버의 아이디는 영문자와 숫자의 랜덤 조합으로 자동 생성된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봤자 다혜는 파티를 안 받아줄 텐데?
“아, 병신아! 그냥 들어가서 비벼! 니가 안 때리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
그래, 마바지의 말이 맞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지.
복잡한 문제는 들어가서 생각하자.
[화톳불의 화신이 당신의 선물을 좋아합니다.]
[이제, 당신만을 위한 피의 축제가 열립니다.]
[숨겨진 장소 에 진입합니다!]
후...
순식간에 맵이 바뀌고 핸드폰이 어두워진다.
방 안에는 아카의 말대로 4명의 플레이어가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엔 시체가 널부러져있고,
다혜는 구석에 몰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르고,
유저들은 거리를 유지하며 다혜를 둘러싸고.
긴장되네.
나는 다혜에게 어떻게든 나라는 걸 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저 방해가 안 되는 쪽에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그리고 그 순간, 아카의 핸드폰에서 동백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4명이죠... 에이, 아무리 재능충이라도 이건 못 이기겠지. 님들도 눈치 그만 보고 빨리 보상받아가세요!]
동백양의 말대로 다혜는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이었다.
체력은 빨갛고, 아이템도 다 썼고.
시청자들이 보상을 받으려고 눈치를 봐서 그렇지, 한 번에 달려들면 당장 끝날 상황이었다.
나는 그걸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 순간, 화면에 글씨가 떠올랐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님으로부터 파티 요청이 도착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아카와 마바지도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뭘까?
난 겨우 2분 서 있었을 뿐인데.
급하게 오느라 이모티콘 설정도 못 했고, 외형 아이템으로 티를 내지도 못했고.
아이디도 영문이랑 숫자 조합일 뿐인데.
심지어 지금은 전사도 아니고 연금술사다.
그런데 다혜는 어떻게 나를 알아봤을까?
나도 모르겠다.
다혜만 아는 졷버그가 있는 걸지도.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지금은 일단 내 자리로 돌아갈 순간이다.
다혜를 둘러싼 포위망의 일원이 아니라, 이제는 다혜의 옆자리로.
[파티를 수락하셨습니다!]
[아이템 을 킹산느에게 전달합니다!]
다혜의 체력이 순식간에 반까지 회복되고, 이제 몸에서 황금색 아우라가 흐른다.
격분한 동백양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반칙! 킹산느님 파티 안 한다면서요! 이러는 게 어딨어!]
[반칙 아닌데요!? 아까 파티 있다고 미리 말했는데!]
[저 사람이 그분이라구요? 에이, 그걸 어떻게 알아! 다 똑같이 생겼구만!]
[전 알아요! 이 사람 제 남자친구예요!]
[진짜? 아니면 나중에 여기 있는 4명 전부 npc 만들어 주기.]
[네! 100% 확신해요! 그리고... 이제 다들 뒤질 줄 아세요!]
시청자들은 여전히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건 패착이었다.
의 능력은...
40% 체력 회복.
이동속도 +20%.
패링 대미지 +50%
그리고 구르기가 순간이동으로 대체된다.
효과는 딱 10초만 유지되지만 그거면 충분하지.
행사 시간도 이제 겨우 10분 남았으니까.
이 포위망만 뚫어내면 다혜의 시간이 올 거다.
그런데...
내 시간은 없다.
[꺄아아악!]
[헐. 남자친구분 죽었는데요? 되게 못 하시네... 나인 줄?]
[이 나쁜 놈들아! 왜 죽였어!]
둘러싸인 채로 갑자기 적이 되면 죽는 게 당연하지.
14킬이나 한 다혜가 신기한 거다.
나는 평범한 거라고...
그런데 내가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마바지와 아카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한심해서 죽겠다는 표정.
“와... 그걸 그렇게 뒤져버리네.”
“존나 한심했어요. 그쵸?”
“인정. 무슨 히어로처럼 들어가서 버러지처럼 뒈지네. 너 어디 가서 우리 길드라고 하지 말아라.”
“몰라, 난 할 거 다 했어. 아이디 잘 썼다. 다음에 밥 살게.”
“밥 말고 빚으로 달아 둬. 원석이가 너한테 빚 많이 쌓아두래.”
“그래, 쌓아둬라. 언젠가는 갚겠지.”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나는 밖으로 나와서 부스 안에 있는 다혜를 바라봤다.
내가 죽어서 그런가,
이제 다혜는 꺄악 꺄악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동백양님은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고.
사람들도 그걸 보며 웃고.
행사장 가득, 웃음 소리가 들린다.
이 한 시간 동안 나는 무책임한 디렉터였지만, 행사는 성공적인 것 같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게임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누구보다 다혜가 즐거워 보이니까.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100점 말고는 매길 점수가 없다.
“권대리님, 아까 그 연금술사 진짜 권대리님이었어요?”
“아, 곽팀장님. 네 맞아요. 저였어요.”
“우와... 다혜씨는 어떻게 알아봤지? 혹시 미리 짰어요?”
“아뇨, 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 물어봐야겠네요.”
“진짜? 신기하네...”
“그나저나, 공식 행사 분위기는 어때요? 반응이 좀 있나요?”
“좀이 아니죠! 다혜씨는 진짜 마케팅의 신이에요!”
“하하, 저도 그럴 것 같았어요.”
이 1시간은 우리 팀에게는 최악의 시련이었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곽팀장님의 말에 의하면 V팀의 행사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뉴진주라는 아이돌이 와서 튜토리얼을 플레이하고, 가챠 돌리기 시연도 하고, 축하 공연도 하고.
사람은 우리보다 2배 정도 많았고.
기자들도 잔뜩 왔고.
분위기도 좋았더랜다.
그거에 비하면 우리 부스는 초라하다.
아니, 칙칙하다는 표현이 맞겠지.
예쁘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가족이나 커플은 찾아볼 수도 없고.
다들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로 화면과 스크린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기면 꺄악꺄악하는 소리 대신에 우와아아! 하는 군대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어쩐지 질 것 같지가 않다.
겜돌이들이 잔뜩 있고, 재미있는 게임이 있고, 무대에선 빡고수가 참교육을 시전하는데.
여기에 아이돌이 끼어들 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아이돌을 부른 건 패착이지 싶다.
[이제 B블록의 공식 이벤트를 종료하겠습니다. 각 팀은 정각까지 무대를 비워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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