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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 동거녀와 순애는 어떠신가요-142화 (142/194)

〈 142화 〉 141화. 전직 퀘스트_(3)

* * *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홈페이지에는 저번 주까지 이벤트 배너를 걸어놓고,

G펙스에서는 1년 치 업데이트까지 미리 공개해놓고선.

섭종이라뇨.

충격이 너무 크다.

차라리 예고도 없이 처맞았으면 조금 나았을 것 같은데.

섭종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있다가 당일이 돼서 눈물이나 콸콸 흘리고 말면 좋을 텐데.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라이벌 게임의 섭종 현장을 목격해서 그렇다.

텅 빈 도시, 그곳을 지키는 오래된 플레이어들, 접었다가 간만에 들어온 옛 용사들.

채팅창에 공허하게 울리는 낡은 모험담들과 마지막까지 눈물의 똥꼬쇼를 하는 운영진들까지.

그 충격의 현장이 아직도 눈앞에 선해서 아프다.

이제는 남 일이 아니니까.

“하... 괜히 여기 서서 뭐 하냐. 밥이나 먹자.”

마바지를 필두로 햄버거를 바리바리 사서 공원으로 돌아왔다.

벤치 테이블에 앉아서 햄버거를 꺼내고, 공원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참 좋은 날이다.

겨울도 다 끝났는지, 이제는 따뜻한 바람이 분다.

슬슬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도 보이고.

등교하는 애들도 있고.

우리는 선택받은 한량들이니까 그냥 웃으면서 이 시간을 즐기면 되는데.

햄버거가 넘어가질 않네.

마바지가 감튀를 깨작거리다 말고 짜증을 부렸다.

“아씨, 이 나이 처먹고 게임 때문에 속상한 것도 개그네. 왜 입맛이 없고 지랄이야.”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지트가 없어졌는데... 그것도... 저는 8년이나 했다구요.”

“아카야, 우리는 9년이거든?”

“하... 이제 어쩌죠?”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웃겠지.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주제가 게임이라니.

하지만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금수들이 어떤 심정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게 빌리언 사가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집을 나와서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고,

나를 처음으로 받아준 곳이고.

다혜를 만난 곳이고.

돌아갈 집이다.

집이 무너졌는데 슬픈 건 당연하지.

다혜는 어떤 마음일까 싶어서 얼굴을 살폈는데,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돌아왔다.

그 후로도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는데 아무래도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면 다혜가 어떻게 받아드릴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내 상상 속의 다혜는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내게 매달렸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까 의외로 덤덤하네.

아마 속은 다르겠지만.

나의 반 정도만 슬펐으면 좋겠다.

모두가 궁상을 떨고 있을 때, 원석이 형만은 우적우적 햄버거를 씹었다.

“맛있냐? 더럽게 잘 먹네.”

그리고는 마바지의 햄버거까지 낼름 뺏어 먹기 시작했다.

“그래, 많이 처먹어라. 이제 게임에서 니 심술 받아줄 사람도 없는데.”

“뭐래, 게임은 그냥 게임이지, 다들 너무 심각한 거 아니냐? 밥이나 먹어.”

“니가 먹고 있잖아. 븅신아.”

“게임에 정신 팔려있으니까 뺏기지. 겨우 게임 하나에 매달리지 말고, 현실이나 걱정하라고.”

“그래... 그래야지. 그래도 니가 나잇값을 하는구나. 늙어서 좋~ 겠다.”

마바지는 감튀를 한쪽으로 밀어버리더니 아예 테이블 위로 엎어져 버렸다.

저런 말을 들으니까 나도 현타가 씨게 온다.

‘그래, 원석이 형의 말이 정답이지.’

겨우 게임.

이건 딱 그 정도의 일이다.

이렇게나 슬픈 감정이 느껴져도 겨우 게임이라는 말로 지워질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른이니까.

아끼던 장난감이 없어져도 울면 안 되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는.

진짜 어른은 게임 속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야 하니까.

중요한 건 현실이지 게임 따위가 아니다.

더욱이 나는 최근에서야 제대로 현실을 살게 됐으니까.

어른답게 우선순위를 챙겨야 한다.

“형은 이제 뭐 할 거에요? 게임 개발은 포기에요?”

“아니, 포기는 아닌데. 하던 건 접어야지.”

“그걸 왜 접어요? 혹시 내 피드백 때문에 그래요?”

“응. 근본적으로 틀려먹었으니까 접는 게 더 싸게 먹혀.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고 본다.”

“다음에는 성공할 거에요.”

“당연하지. 넌 좀 어때? 인디 페스 우승하고 회사에서 입지 좀 나아졌어?”

“아뇨. 타이니 원을 운영하든, 새 게임을 만들든, 어쨌든 이직은 확실할 것 같네요.”

감튀를 깨작이면서 금수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개발팀이 분리되는 얘기, 김진의 제안.

주아영이 보낸 메일까지.

아카는 듣는 내내 눈을 반짝이더니,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면 연봉도 엄청 오르겠네요? 우승하고서 제일 몸값 비쌀 때잖아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좋겠다... 전 이제 외주도 그만두려구요. 한동안 거지에요 거지.”

아카는 원석이 형이랑 게임 개발하는 동안 월급을 받았다던데.

인디 페스에서 탈락한 뒤로는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원래는 하루종일 일러스트 외주와 빌리언 사가만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빌리언 사가도 없어지는 마당에 외주까지 그만두면, 이제는 새로운 길로 가려는 걸까?

“넌 이제 뭐 할 건데?”

“저 제대로 공부해서 다혜처럼 게임사 입사할 거에요! UI 디자인 쪽으로 가려구요. 학원도 등록했어요!”

“그래, 넌 재능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성공할 거야. 나중에 포트폴리오 나오면 한번 보여줘.”

“네! 저 낙하산 좀 시켜주세요!”

아카는 다혜랑은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

복잡하고 미려한 그림체나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그림은 아니지만.

심플하고 눈에 확 띄는 그림을 그린다.

손도 미친 듯이 빠르고.

그러니까 어딜가나 성공하겠지.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니까 빌리언 사가의 섭종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마바지는?”

“나? 음... 글쎄, 남편이 일 그만두고 창업하자던데, 같이 해볼까 봐. 아직 고민 중.”

이쪽은 희망찬 미래와는 거리가 멀지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 보인다.

그리고 그건 다혜도 마찬가지겠지.

내 상상 속의 다혜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현실 속의 다혜는 이겨낼 거다.

왜냐하면 내가 있으니까.

나는 다혜가 울고 싶다고 말하면 우는 게 질릴 때까지 안아줄 거고, 빌리언 사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일을 찾아줄 테니까.

다혜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웃는 입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그러다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좋네요!”

“뭐가?”

마바지의 심드렁한 대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다들 할 일도 잔뜩이고, 날씨도 좋고! 또 이렇게 모여있잖아요. 앞으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거에요! 그쵸?”

“올~ 역시 짱다혜~. 긍정 킹인데?”

“저 짱다혜에요? 새 별명인가?”

“아니, 성현이 핸드폰에 그렇게 저장돼 있던데?”

“헐...”

왜 갑자기 이야기가 글로 튑니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어째, 제로투가 덜 쪽팔린 것 같기도 하고...

“짱다혜가 뭐가 어때서! 남의 연애가 웃겨!?”

“얘들아, 근데 짱다혜 뒤에 하트도 있더라.”

“오모, 오모나.”

그걸로 순식간에 화제가 전환됐다.

나는 광대가 됐지만, 그래도 웃으니까 좀 낫네.

다들 한바탕 나를 안주 삼아서 웃다가.

이제는 화제를 완전히 미래로 틀었다.

전부 다혜 덕분이다.

“우리 캠핑도 가야죠!”

“맞아! 겨울 캠핑은 끔찍했으니까, 이번에는 여름 캠핑으로 조져.”

“저 면허 학원 다닐 거에요! 운전해드릴게요!”

“음... 그건 좀 무섭긴 한데...”

“제 컨트롤 아시잖아요! 공중제비도 돌 수 있어요!”

다혜의 말대로, 빌리언 사가가 없어져도 우리는 우리다.

아마 앞으로도 종종 모여서 이렇게 놀게 되겠지.

나와 다혜는 언제나 함께 있을 거고.

이건 전부 빌리언 사가가 내게 준 선물이지만...

그래, 겨우 게임일 뿐이다.

다혜의 말대로 앞으로는 할 일도 많고, 즐거운 일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어른스럽게 섭종을 받아드려야지.

하지만 오늘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에이, 기분 조졌다. 오늘은 집에 갈래.”

“저두요. 그냥 공부나 해야겠어요.”

아카랑 마바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고.

원석이 형도 가게로 간다고 하고.

맘같아서는 금수들이 다혜랑 더 놀아줬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내가 더 열심히 놀아줘야겠다.

헤어지는 와중에 원석이 형과 이야기를 나눴다.

20살 때부터 일자리가 바뀌면 늘 형이랑 상담을 했는데,

관성이 붙어서 서른 먹고도 마찬가지다.

“일 때문에 고민 많이 되겠다.”

“뭐 그렇죠. 걱정은 안 해요.”

“어디로 갈지 결정은 했고?”

“음... 김진 디렉터님을 따라가지 않을까 싶어요. 페이도 좋고, 타이니 원도 걱정되고.”

“팀은 해체된다면서?”

“네, 그래도 우선 순위가 있으니까요.”

“권성현 주제에 우선 순위라... 다혜?”

눈치는 빨라가지고.

하지만 맞다.

다혜 얘기다.

사실 김진 디렉터의 제안은 나에게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내가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괜히 비싼 돈 받고 가봐야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눈칫밥만 먹겠지.

하지만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다혜가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돈은 중요하니까.

내 우선 순위 최상단에 있는 다혜의 행복을 위해서, 일단 돈을 쌓아둘 생각이다.

그러자 형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좋네. 이번에는 걱정이 안 된다.”

“원래는 걱정했어요?”

“당연하지. 내가 너 일 구해줄 때마다 얼마나 골치였는지 알아?”

“제가 왜요!? 제가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

“그거 말고 임마.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자식, 맞는 일 구해주려니까 골치가 아프지. 그런데 이제는 뭘 해야하는 지 아는 것 같아서. 걱정 없겠다고.”

“...”

그러네.

너무 오래 한 회사에 있었더니 잊고 있었네.

어렸을 때 나는 일자리만 생기면 무조건 ok였다.

어차피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적성에 맞는 일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철저하게 계산한다.

나와 다혜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말이다.

어찌보면 이것도 빌리언 사가가 내게 준 선물이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는데.

빌리언 사가로 도망치다 보니 하고 싶은 것도 생기고 미래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빌리언 사가가 사라져도 바뀌지 않겠지.

“성현아 근데 말이다. 다혜 걱정해주는 건 좋은데, 착각은 하지 마라.”

“뭘요?”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는다고. 수단은 수단이고, 목적은 목적이지. 우선 순위를 세웠으면 수단과 목적을 철저하게 구분해라.”

“...알겠어요.”

“힘내.”

**

공원에서 돌아오는 내내, 다혜는 표정이 밝았다.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고, 강아지들이랑 눈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다혜야, 여름까지 빌리언 사가 엄청 많이 해야겠다. 그치?”

“응! 나 지금 가자마자 할 거야.”

“오늘은 뭐 할래?”

“예전에 가본데 전부 다시 가보려고. 세계일주 어때?”

“좋은데? 그러면 오랜만에 정령 숲도 가보자!”

“당연하지! 튜토리얼 필드도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볼래!”

빌리언 사가가 사라져서 안 힘드냐고.

나는 슬픈데 너는 어떠냐고.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거침없이 앞으로 돌진하니까.

섭종도 그렇게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나보다 훨씬 용감하게.

그러니까 나는 다혜를 믿고 앞을 보기로 했다.

타이니 원의 출시도 바쁘고, 다혜의 운전 연습도 도와주고 싶고.

이직도 결정해야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게는 분에 넘치는 조건들이다.

오랜만의 숄더태클은 너무나 아팠지만,

그래도 앞으로 즐거운 일이 한 가득일 테니까.

빌리언 사가를 세이브 포인트 삼아서.

이제는 앞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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