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선순위 가장 위에 있는 거.
그게 뭐냐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다혜다.
누군가 지난 1년 간 내가 했던 일들을 가리키며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묻는다면, 그 이유의 90%는 저거다.
다혜가 내 행동의 모든 걸 설명한다.
기획서의 시작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빌리언 사가가 똥겜이라는 걸 잘 아니까.
이랬으면 더 즐거웠을 텐데, 저랬으면 다혜가 더 웃었을 텐데.
다혜와 밤늦게까지 모험하고, 아쉬웠던 부분들을 모아서 기획서에 적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겠지.
언젠가 빌리언 사가가 사라져도 나는 폭딸이랑 도망칠 곳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개발자가 되고 싶었다.
과장님은 내가 김진 디렉터랑 다른 이유를 물어보셨지.
동백양님 덕분에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그 이유가 뭐냐면...
김진 디렉터의 목적은 순수하고, 내 목적은 불순하다는 거.
“김진 디렉터랑 제가 어디가 다르냐면요 과장님. 김진 디렉터는 언제나 만들고 싶은 이상적인 게임을 만들지만... 저는 겜창이라 하고 싶은 게임을 만들거든요.”
물론 다혜랑 같이 하고 싶은 게임.
내 진심을 전부 쥐어짜서 만든 대답이었는데, 정과장님은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짜 그거냐? 겨우 그거야?”
“네. 김진 디렉터는 늘 기획서만 읽지, 정작 게임은 안 하시거든요. 정과장님은 어떤가요? 마지막으로 게임 하신 게 언제에요?”
“글쎄... 그런 적이 있었나...? 모르겠다. 테스트 말고 진짜로 게임을 즐겼던 적은... 이제 기억도 안 나네.”
“밤새고 싶을 정도로 게임에 빠져보면 어떤 게임이 정답인지 답이 나올지도 몰라요. 제작자에 대한 불만이 막 속에서부터 차오르거든요. 월클 개발자도 게이머 앞에서는 한낱 븅신이니까요.”
“그러고 싶어도 빠질만한 게임이 있어야 말이지. 요즘은 뭘 잡아도 노잼이거든.”
“그건 그렇죠. 재밌는 게임 더럽게 없네요... 특히 온라인 쪽은 더요. 그래서 게임 만들 맛이 나기도 하고요”
“너나 김진처럼 제멋대로인 놈들이나 이런 상황이 즐겁지. 나 같은 범재는 재미없는 게임 양산하느라 일할 맛 안 난다.”
“에이, 자부심을 가져 주십쇼. 타이니 원 기술팀장님이시잖아요.”
“게임 말아먹을 뻔한 기술팀장이지. 나, 앞으로는 기획 쪽에는 손도 안 대려고. 언젠가 푹 빠질만한 게임이 나오면... 그때는 모르겠지만.”
정과장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셨다.
9년차 개발자 앞에서 훈수두는 게 영 불편했는데, 표정을 보니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꽤 후련해보이시네.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정과장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전까지는 회사를 그만둔다는 사실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는데.
이제는 내 행동의 이유를 찾았으니까.
정과장님은 납득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퇴사하길 잘했다고.
애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만약 퇴사를 미뤘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렇게 됐겠지.
타이니 원은 소중한 게임이지만, 그래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나는 게 불편하지만.
내가 타이니 원을 만든 이유는 다혜니까.
지금은 빌리언 사가에 집중하고 싶다.
가능하면 더 나은 게임을 만들어서 우리가 돌아갈 곳을 만들고 싶고.
그곳에서 우리가 소중한 추억을 쌓았던 것처럼, 언젠가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난 며칠 힘들어하는 다혜를 보면서 깨달았다.
나에게 있어 빌리언 사가는 소중한 도피처였지만, 다혜에게는 전부였다는 걸.
빌리언 사가가 사라지만 나는 돌아갈 곳을 잃지만, 다혜는 전부 잃어버린다는 걸.
메인 탱커로서 그것 만은 막아야지.
그러니까 이제는 후회할 시간도 아깝다.
빠이빠이. 너러티브 게임즈.
정과장님이 담배를 비벼 꺼버리더니, 내 등을 펑펑 두들겼다.
“그래도 이제 사장님 되는 거네. 겨우 5년 차 주제에 말야...”
“어차피 나중에 치킨집 사장 모임에서 만나는 거 아니었습니까?”
“웃기시네, 난 늙어 죽을 때까지 게임 만들 거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될 거야. 여길 나가서 또 더럽게 재밌는 게임을 만들겠지. 넌 김진 같은 놈이니까.”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
다혜와 집에 돌아와서 치킨을 먹었다.
배고프다길래 허겁지겁 포장을 뜯고, 콜라도 따라 바치고.
닭다리를 쥐여주자 오물오물 씹었다.
“맛있어...”
“많이 드십쇼. 그리고 수분 보급도 팍팍 하시고.”
“응...”
다혜는 공원에서 돌아오는 내내 울더니, 치킨을 먹다가도 갑자기 왈칵왈칵 눈물을 쏟았다.
나는 이제 마음을 굳혀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마음 쓰게 만든 것 같아서 씁쓸하네.
하긴, 요즘 혼자서 마음고생 많았을 테니까.
그래도 빌리언 사가가 부활하는 상상을 하면 좀 나아지겠지.
오늘 회사에서 들은 이야기를 좀 해줘야겠다.
“다혜야, 나 정과장님한테 재미있는 얘기 들었다?”
“뭔데...?”
“빌리언 사가 얘기야. 빌리언 사가가 왜 사라지는지, 원로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말이 돌더라고.”
“진짜? 인터넷엔 아는 사람 하나도 없던데...?”
“그렇겠지. 안 그래도 소통 없다고 욕 엄청 먹고 있으니까. 근데 나는 알지요~. 궁금해? 궁금해?”
“아아~ 빨리...! 알려줘!”
음... 역시 효과가 좋구만.
다혜는 이제 눈물을 뚝 그치고는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 이래서 내가 회사를 그만둔 거지.
비록 준비는 하나도 안 됐고, 앞으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언젠가 게임을 완성할 때까지 다혜가 이렇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따라와 줬으면 좋겠다.
이제 슬픈 생각은 접어두고 앞으로 있을 즐거운 일들만 떠올리면서.
지난 1년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다혜야, 나도 오늘 알았는데. 원래 빌리언 사가가 플래티넘 게임즈 소유가 아니래. 6년 계약으로 퍼블리싱 계약만 했는데, 게임이 오픈하기도 전에 IP 보유자가 사망한 거지.”
“헐... 그랬구나... 그러면... 어떻게 9년이나 운영한 거야?”
“그치? 너도 이상하지? 그 점이 바로 핵심이야. 우리가 노려야 될 부분이지.”
아직은 확실한 정보가 아니다.
정과장님도 그냥 게임판에 도는 썰을 전달해 줬을 뿐이니까.
[빌리언 사가 같은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나 참, 진짜 이 세상엔 나만 모르는 좃토피아가 실존하는 거냐? 왜 비슷한 것들끼리 뭉치고 지랄이야?]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세요?]
[개발 천재 거론할 때 꼭 빠지지 않는 게 빌리언 사가 개발자잖냐. 거의 전설이지 전설. 너도 요즘 주변에서 천재 소리 듣더니, 천재병 걸려서 허세 부리는 거냐?]
[그런 거 아니구요... 꼭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근데 천재라뇨? 그 똥겜을 만든 게 왜...]
[빌리언 사가가 1인 개발 게임이라면 넌 믿겠냐?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소문은 그래.]
[에이, 말도 안 돼. 당연히 헛소문이겠죠.]
요즘에야 엔진도 잘 나오고 공짜 소스도 얼마든 구할 수 있지만.
9년 전에 빌리언 사가를 혼자서 만들었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도태 되어 버린 고전 게임들도 수십명이 달라붙어서 만들던 시절에.
2023년까지 살아남은 게임을 혼자서 만들었다니.
최근 밸런스가 엉망이긴 해도, 빌리언 사가에는 다른 게임과 비교할 수 없는 분명한 장점이 존재했다.
랜덤에 의한 모험과 로망.
생산과 전투가 절묘하게 배분된 레벨 디자인.
아직도 카피 게임이 없는 걸 보면 얼마나 천재적인지 알 수 있지.
그런데 그걸 혼자서 만들었다니.
[근데 개발자가 계약하자마자 병으로 죽어버려서, 얼마 전까지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업데이트 플랜대로 게임을 운영했다는 거 아니냐.]
[9년을요? 그건 진짜 뻥인데요?]
[듣기 싫냐?]
[아뇨. 계속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정과장님의 말은 하나같이 거짓말 같았다.
혼자서 빌리언 사가를 만든 천재.
최근까지 그가 남긴 업데이트 플랜으로 운영된 게임.
그리고...
IP 상속자와 게임사의 충돌.
[여기서부턴 거의 추측인데, 매년 계약 갱신할 때마다 게임사가 상속자한테 빌었다는 거 아니냐. 그런데 이번에는-]
[거절했군요! 그래서 갑자기 최신 이벤트까지 다 취소하고...]
[그래, 근데 이것도 뻥 같긴 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들어올 텐데. 그 인간은 뭐가 아쉬워서 계약을 파토 냈을까? 나 같으면 갑질 오지게 했을걸?]
정과장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다혜는 손에 양념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게임사에 바로 전화해봤거든? 그 상속자 좀 소개해달라고. 근데 거절 당했지 뭐.”
“헐...”
“어때? 이 이야기 넌 진짜 같아?”
“음... 모르겠는데, 진짜였으면 좋겠어. 왠지... 퀘스트 같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파헤치다가...
엄청난 진실을 목격하고 갑자기 모험이 시작되는 건...
너무 흔한 클리셰잖아.
반짝거리다 못해 울 것 같은 다혜의 얼굴을 보니, 나까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만약 이게 퀘스트라고 치면, 우리의 출발은 너무 순조로운 것 같다.
내가 전화로 상속자 얘기를 꺼냈을 때, 과장이라던 사람은 다 루머라고 변명하면서도.
지나가는 말로 [그 새끼.]라고 중얼거렸다.
그건... IP와 관련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게임사와 마찰을 빚은 것도 사실인 거고.
나머지는 내일 직접 찾아가서 대가리를 박으면 될 일이다.
“그래서 내일 가보려고. 너도 갈 거지?”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