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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 동거녀와 순애는 어떠신가요-153화 (153/194)

4일간 몇 시간이나 잤는지 모르겠다.

아침에는 늘 컴퓨터 앞이었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작업을 하다가 시계를 보면 늦은 밤이다.

침대에 누워도 머릿속엔 온통 발표 내용뿐이라 잠도 못 들고.

그렇게 나흘이 지나서,

마침내 디데이의 아침이 밝았다.

“어떡해... 성현아, 너 얼굴이 까매... 밖에 한 번도 안 나갔는데... 왜 그러지?”

오늘 아침 다혜의 첫 인사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거울을 보니 정말로 얼굴이 검다.

인디 페스 준비하면서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피로가 뒤지게 쌓이면 이렇게 되나 보네.

그래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마음껏 잘 수 있으니까.

“비비크림 바르면 괜찮아. 조금만 더 힘내자.”

“으으... 우리 성현이 불쌍해서 어떡해...”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거절당하면 더 불쌍해질걸?”

“그건 그렇지만...”

“준비는 다 끝났어?”

“응... 회의실 예약도 다시 확인했고, 택시도 곧 올 거고... 비비크림도 발라줄게, 이리 와.”

그리고 다혜도 엄청 고생했다.

나흘간 언제나 내 옆에 앉아서 피드백을 주고, 아이디어가 나오면 바로바로 원화를 만들어주고.

아마 나만큼 피로가 쌓였겠지.

정말 뒤지게 힘든 나흘이었지만...

돌아보면 힘든 만큼 충실한 시간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둘이 된 게 불안했는데,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방구석에서 둘만 있어도, 우리는 빈둥대는 일 없이 앞으로 갈 거라는 확신이.

이제 이 방구석을 게임 회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비비크림을 바르고 거울을 보니, 시체였던 것이 약간은 사람의 모습을 되찾았다.

딱 3시간만 더 버텨다오.

“좋아, 가자.”

“성현아, 나가기 전에 잠깐만... 이거 받아.”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다혜가 뭔가를 내밀었다.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였다.

내게는 너무 익숙한 물건이지만... 다혜한테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이게 뭐야? 명함?”

“응! 나중에 제대로 만들고... 일단 오늘은 이거 써.”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보니, IT 느낌이 물씬나는 심플한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딱 봐도 다혜가 직접 디자인 한 거다.

바빴을 텐데, 이런 건 언제 주문했대...

흰색 실크지 위에 검은색 글씨로, 맨 위에는 “권성현 게임즈.” 라는 글자가, 그 아래에는 타이니 원의 메인 디렉터라는 경력이 적혀있었다.

그 아래엔 깨알 같은 글씨로 빌리언 사가의 레벨과 직업도 적혀있네.

하긴, 오늘은 내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날이 될 텐데.

명함 한 장 없이는 말이 안 되지.

좋은 장비를 얻었다.

“우와... 이거 보여주면 눈 돌아가서 IP 뱉겠다.”

“히히... 그치? 진짜 열심히 했으니까, 우리 꼭 성공할 거야.”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배운 게 있다.

뭐냐면, 노력이 꼭 성공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거.

아무리 멋진 게임을 만들어도 3일 만에 망할 수 있고.

수 십 명이 몇 달 동안 기획한 마케팅보다 어느 네티즌이 싸지른 똥글 하나가 더 훌륭한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실력보다는 허세, 노력보다는 운이 중요한 시장이다.

그러니까 노력으로 위안을 삼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확신이 든다.

왜냐하면...

그 상속자라는 인간은 우리 못지 않게 빌리언 사가를 사랑하니까.

게임을 버린 게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서비스 종료를 선택했으니까.

그가 파기한 업데이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감이 생긴다.

프레젠테이션에 지난 9년간 다혜와 내가 빌리언 사가에 쏟아온 애정을 모두 담았으니까.

이걸 보면, 그는 반드시 IP를 줄 거다.

어쩌면 굉장히 싼값으로.

“맞아, 100% 성공할 거야. 이제 가자.”

“응! 오늘 저녁은... 알지?”

“지옥에서 먹는다! 가즈아!”

**

택시를 타고 회사 근처에 있는 임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회의 준비를 마치고.

무작정 플래티넘 게임즈의 로비에 멀뚱히 서서 상속자를 기다렸다.

그가 우리의 제안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회의실로 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되고.

아니면 답이 없다.

양아치마냥 으름장을 놓든지, 무릎 꿇고 싹싹 빌든지, 상황을 보고 뭐라도 해야지.

목표는 어떻게든 상속자를 회의실로 끌고 가는 거. 그거 하나다.

아까부터 옆에서 손을 꼼지락대더니, 다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네.

“후... 떨려... 너도 긴장되지...?”

“그러게, 나도 이렇게 일해본 적은 없어서 어떻게 될지 예상이 안 되네.”

“작전대로 가는 거야.”

“무릎 꿇기? 아니면 각목?”

“미인계!”

“그건 안 돼. 차라리 빌리언 사가를 버리고 말지.”

긴장해서 그런지 둘 다 헛소리만 나오네.

둘이서 괜히 실실거리다가 그렇게 11시가 지나고.

남자는 로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주차장에서 바로 플래티넘 게임즈로 갔을 수도 있고, 직원 전용 입구로 들어갔을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는 계속 여기서 남자를 기다려야 한다.

상속자가 플래티넘 게임즈를 나가는 순간, 상원씨가 연락을 줄 테니까.

이제 11시 35분.

그때, 텅 빈 로비에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원씨다.

[성현씨. 지금 로비세요?]

“네. 대기중입니다. 상속자분은 어디로 나오시나요?”

[저... 그게, 오지랖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성현씨 말씀을 좀 드려봤거든요? IP 관련해서 상담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네!?”

이건 또 뭔소리여.

차라리 그냥 말을 말지...

이런 식이라면, 만나자마자 손사래를 칠지도 모를 일이다.

여태껏 그렇게 거절당한 주제에, 이제와서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하면, 없던 신뢰가 생기냐고...

그런데, 이어지는 상원씨의 말에 반전이 있었다.

역시, 노력보다는 운이구만.

[여기서 기다리신다고 올라오시래요.]

“네!? 정말요?”

[네! 빨리 6층으로 올라오세요. 성공하면 다 제 덕인 거 아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올라갈게요.”

다혜는 옆에서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다가,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내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꺅! 이거... 된 거지? 우리 만나주는 거지!?”

“어. 기회다. 올라가자.”

“헐... 성현아. 근데 피피티 자료 다 회의실에 놓고 왔는데? 어떡해?”

기껏 준비한 회의실이 무쓸모가 됐지만,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게 어디야.

“작전 변경이지 뭐. 그냥 아가리로 승부다.”

“헐... 아가리 파이팅...!”

이제 피피티 따위 없어도 개의치 않는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떠들어주지 뭐.

우리가 만든 기획서는 시간에 치여서 억지로 꾸며낸 게 아니라, 그냥 다혜와 나의 꿈을 담았을 뿐이니까.

우리와 같은 유저로서 그가 우리와 같은 꿈을 꿨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6층에서.

“후, 워낙 까다로운 분이라, 제가 다 긴장되네요. 준비는 잘하셨죠?”

우리는 신상원을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만났다.

빌리언 사가의 상속자.

드디어 만났다.

신상원의 말대로, 그는 정말 별난 남자였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회의실에서.

우리는 이그드라신 트레일을 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

“뭐야, 함정인가?”

“잉? 어? 응? 엥? 왜 오빠가 여기 있어요?”

아무리 개연성을 확보하려고 해도 말이 안 되네.

지난 나흘간 상속자에 대해서 수많은 상상을 했었지만.

그 상상 중에 이런 건 없었다.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원석이 형이 플래티넘 게임즈에 앉아있는 꼬라지 말이다.

안 어울리게 풀정장 차림에, 오늘은 귀찮다고 평생 안 차던 시계도 차고...

다리를 꼰 채로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나를 바라본다.

상원씨가 기겁하며 귓속말을 해왔다.

“성현씨. 빌리언 사가 IP 보유자세요! 말 좀...”

“저 인간이요?”

“아니, 말 좀 조심하라구요!”

하긴, 신상원의 말대로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람은 빌리언 사가의 IP 보유자니까.

논리대로 보자면 원석이 형이 IP 보유자겠지.

근데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 받아들이냐고.

다혜는 생각을 포기한 채, 나와 원석이 형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으로 원석이 형과 함께 보낸 지난 시간을 훑었다.

늘 생각하던 거지만.

원석이 형은 참 별난 사람이었지.

9년 전에 공사판에서 처음 만나서는,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너 게임은 하냐?]

이거였다.

그때는 집을 나와서 한참 고생할 때라. 게임은 꿈도 못 꿨었지.

그래서 “아니요.” 하고 말한 다음에 묵묵히 내 일을 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오지랖인지.

그날 이후로, 원석이 형은 끈질기게 내 인생에 들러붙었다.

일터에서 만나면 밥을 사준다거나, 더 좋은 일자리가 있다며 꼬시거나.

일이 없는 날에도 불러내서는 쓸데없이 내 시간을 낭비하고.

내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도와줬지.

그 오지랖 덕분에 나는 빌리언 사가에서 다혜를 만나고.

서른 살이 되도록 잘 살아있다.

그러네.

빌리언 사가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내게 들려준 사람이 원석이 형이었다.

형은 빌리언 사가가 오픈한 이후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플레이했고.

거기에, 작년부터는 본인이 직접 게임도 만들지.

늘 돈이 많았던 것도 빌리언 사가의 IP계약이라면 설명이 된다.

정말... 원석이 형이 상속잔가?

대놓고 물어보자.

“형. 상원씨 말이 진짜예요?”

“진짜지 그럼. 내가 바로 위대한 빌리언 사가의 IP 보유자다. 앞으로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도록.”

“진짜 딱 한 번만 물어보는데... 제대로 대답해요.”

“뭔데? 뭐든 물어보되, 예의를 갖추도록.”

“직접 서비스 종료시킨 주제에, 우리 앞에서 그렇게 가증을 떨었단 말이죠?”

“아, 그거? 그럴 수도 있지.”

그 말이 나오자마자, 다혜가 달려들었다.

각목으로 꼬신다는 다혜의 작전은 당연히 농담이었겠지만.

어쩌면 목졸라서 IP를 얻어내는 엔딩이 될지도 모르겠네.

“잠깐, 다혜 타임! 이러지 마! 여기 회사야!”

“왜 안 말했어! 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이 나쁜 길마야!”

다혜는 눈에서 눈물을 찔끔 흘리며 원석이 형을 두들겨 패고.

상원씨는 정신이 쏙 빠져서 다혜를 뜯어말리고,

사장님의 썬글라스는 허공을 가른다.

나, 나흘간 진짜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말은 꽁트네.

너무 허무한 나머지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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