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 동거녀와 순애는 어떠신가요-160화 (160/194)

[나 : 하이이이! 권파 어서오고!]

[권성현파이터 : 겁나 오랜만이네ㅋㅋㅋ 잘 지냈어?]

[나 : 못지냈어 ㅠㅠㅠㅠ 빌리언 사가 생각나서 악몽 엄청 꿈...]

[권성현파이터 : 그래도 돌아왔잖아. 겨우 1년밖에 안 기다렸는데ㅋㅋㅋ]

[나 : 응! 맞아 별거 아니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할래 ㅋㅋㅋ]

[권성현파이터 : ㅋㅋㅋㅋ 그래야 내 파티원이지. 그러면 오늘도 알차게 놀아봅시다!]

[나 : 옹키이이이! 근데 나 지금 공복도 10이야 ㅠㅠㅠ 먹을 거 안 구하면 주금ㅜ]

[권성현파이터 : 이 몸은 이 세상의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오늘은 네가 앞장서시오. 남친 몫까지 먹을 걸 구해주세요.]

[나 : ㅋㅋㅋㅋㅋ 나만 하드모드네! 알떠 나만 따라와!]

이곳은 빌리언 사가입니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죠.

원조 빌리언 사가는 똥겜이라 도시에서 움직이는 플레이어는 몇 명 없거든요.

상점을 열어둔 잠수 케릭이나, 의상템을 자랑하려고 세워 놓은 마네킹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여기는 아니에요.

도시는 활기가 넘치고 여기저기서 뾱뾱뾱하며 말풍선이 솟아올라요.

걷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이 전부 달리고, 채팅창 스크롤 올라가는 속도에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뭐가 그리 바쁜 걸까요?

아. 그렇네요.

저분들에게는 오늘뿐인 시연이니까.

이 재미있는 게임을 조금이라도 즐기려면 서둘러야죠.

빨리 뛰세요! 화이팅!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성현이랑 주점에 가서 빵을 구걸하고, 빵값 대신 간단한 심부름을 해줍니다.

겨우겨우 보리빵 두 개를 구해서 주점 앞에 쭈그려 앉아요.

웃기네요.

[권성현파이터 : 공짜 빵 개꿀ㅋㅋㅋㅋ]

이 세상을 창조한 전지전능하신 분이 제 옆에 쪼그려 앉아서 보리빵을 뜯어 먹습니다.

정말이지... 변한 게 없네요.

우리는 예전에도 이랬어요.

빌리언 사가의 초창기에는 아이템이 정말정말 귀해서 먹을 것 구하느라 하루가 다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냥이 끝나면 다들 주점에서 로그아웃을 했습니다.

그래야 공복도를 아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제일 싼 보리빵을 가방에 잔뜩 쑤셔넣고 마들랜드 평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 연못가에 앉아서.

[아까 본 건 뭐였을까? 아마 이렇게 하면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봤는데, 이건 이렇게 하면 된대.]

[내일은 그 구덩이 속으로 가보자.]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알아냈어.]

끝내주게 재미있을 내일을 떠올리며 새벽이 다 가도록 채팅을 쳤습니다.

그때는 몰랐거든요.

언젠가는 빌리언 사가가 사라지고, 우리의 시간도 흘러가 버린다는 걸요.

그래서 그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것처럼 잔뜩 낭비해버렸습니다.

빌리언 사가의 섭종날, 꿈을 꿨습니다.

저는 유령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두 사람을 발견했어요.

마들랜드 평원에 앉아있는 권성현파이터와 김폭딸을요.

옆에 가서 혼쭐을 내줬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면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온다고.

그러니까 뛰라고.

뭐라도 하라고.

아쉬움 같은 건 하나도 남지 않게 하나라도 더 추억을 쌓으라고.

하지만 저는 유령이라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져버리고,

두 사람은 새벽이 다 가도록 시간을 낭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보처럼 ㅋㅋㅋㅋ 거리면서요.

꿈은 악몽이 됩니다.

현실의 저는 항상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지만, 빌리언 사가에서만큼은 유능해요.

뉴비가 물어보면 무엇이든 척척 대답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빌리언 사가가 사라지고 현실만 남았을 때는...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쿨하게 잊거나.

그러지 못해서 슬프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면서 슬픔을 감추는 거.

그런 방법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역시...

진짜 어른은 다르네요.

그냥 빌리언 사가를 만들면 되는데.

당당하게 IP부터 슥삭 구해버리고, 벽돌 같은 기획서를 쓴 다음에, 똥겜이 아닌 갓겜으로.

다시 빌리언 사가를 만들면 섭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동안의 고민들이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성현이와 주점 앞에 앉아서 사람들을 지켜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카매진 얼굴로 석탄을 나르네요.

파티를 꾸려서 사냥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벌써 옷 가게를 기웃거리는 사람도, 바보처럼 주점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까 알겠어요.

이제 확신합니다.

이건 빌리언 사가가 맞아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여행을 즐기고 있으니까요.

이 게임은, 빌리언 사가가 맞습니다.

짤랑-!

[찰리 : 어이, 괜히 술맛 떨어뜨리지 말고, 구걸할 거면 다리 밑으로 가봐라.]

[NPC 찰리가 50G를 기부했습니다.]

[나 : ??????]

[권성현파이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모르는 일임.]

[나 : 거지 취급당했어 ㅠㅠㅠㅠㅠ]

이것 보세요.

이렇게 바보같은 짓만 해도 일기에 쓸 내용이 넘치잖아요.

이건 빌리언 사가가 맞습니다.

성현이를 믿으면 모든게 편했을 텐데.

저는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도망쳤을까요.

다시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또 유령이 되어 빌리언 사가를 날아다니다가, 우리를 발견하는 거죠.

그러면 이번에는 가만히 구경할 겁니다.

우리가 허무하게 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그냥 느긋하게 구경하고, 옆에서 ㅋㅋㅋㅋㅋ 채팅을 칠 겁니다.

어차피 이 시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길마 오빠가 섭종하면 성현이가 또 만들어줄 테니까.

다시 여정을 시작하면 그만입니다.

그럼... 오늘도 있는 힘껏 시간을 낭비해볼까요?

[나 : 권파야, 200년이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지?]

[권성현파이터 : 다혜 기준으로? 아니면 그린란드 상어 기준으로?]

[나 : 요정 기준으로?]

[권성현파이터 : 그럼 눈 깜짝할 시간이지. 그건 왜 물어봐?]

[나 :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권성현파이터 : ㅇㄷ? 던전?]

성현이와 던전에 가는 꿈을 100번도 더 꿨지만, 사냥은 다음으로 미룰래요.

가고 싶은 곳이 생겼거든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도시의 이름은 루테니아입니다.

제가 디자인한 도시에요.

바닥이며, 건물이며, 하얀 벽돌로 만들어진 예쁜 도시입니다.

저는 디자인만 했고... 맵 작업은 마바지 언니가 해서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인데요.

이상하게 익숙해요.

주점이 어딘지 몰라도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이구요.

던전을 떠올리면 고개가 저절로 북쪽으로 돌아가요.

저기 건물에 가려진 곳은...

분명히 제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인데.

저는 거기에 길드사무소가 있다는 걸 압니다.

언니도 표절인가요?

디자인은 루테니아지만...

구조는 아메스트리아잖아요.

이곳은 우리가 9년 동안 머물렀던 빌리언 사가의 도시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모습이 조금 달라진... 어쩌면 그런 컨셉일까요?

남쪽 문밖으로 나오니 익숙한 풍경이 이어집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녹색 초원이 보여요.

잡풀은 키보다 높게 자라있고, 시냇가 옆에는 물푸레나무가 무성하지만.

200년 전에도 이랬을까요?

어쩌면 황금빛 밀이 바람에 파도치는 평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유저들은 마차를 타고 옆 마을로 물건을 팔러 가거나, 파티를 꾸려서 숲으로 갑니다.

번개처럼 빠르게 이 평원을 스쳐갑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는 덤불 속을 뒤져요.

200년이 지나서 길이 사라져버렸지만...

음...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니까, 어떻게 들어가지네요!

길이 있습니다!

가시덤불 길은 곧 끝나고.

이내 잔디가 예쁘게 펼쳐진 초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초원 가운데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로 고목의 가지가 멋지게 드리워지는.

200년이 지나도 이곳은 여전하군요.

그리고...

우리가 늘 앉아있던 나무 둥치 위에 익숙한 실루엣도 보입니다.

투명한 나비 날개, 하늘에 흩뿌려지는 별가루.

손바닥만 한 인형이 우리를 발견하고 날아옵니다.

[로살레온 : 우연이네요. 잠깐 잠이 깨서 나와봤는데, 이렇게 만나다니요.]

그녀는 요정왕 로살레온입니다.

하긴, 이곳은 요정왕이 사는 곳이니까 그대로인 게 당연하죠.

보고 싶은 사람을 1000년이나 기다렸는데, 그녀에게 200년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겁니다.

[나 : ㅋㅋㅋㅋㅋ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로살레온 : 오랜만인가요? 전... 방금 인사를 했는데 또 만났구나, 그렇게 생각한 걸요.]

[나 : 반가우니까 오랜만에 만났다고 칠래요 ㅋㅋㅋ]

[로살레온 : 그러면 저도 반가운 걸로 하죠.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아, 혹시 바스코는 만나셨나요?]

[나 : 맞다... 못 찾았어요. 죄송합니다 ㅠㅠㅠ]

[로살레온 : 괜찮습니다. 어차피 조만간 만나게 될 테니까요.]

[나 : 바스코를요?]

[로살레온 : 바람에서 그의 마나가 느껴져요. 이 세상 어딘가에 바스코가 살아있군요. 저를 기억하면 좋을 텐데...]

이건... 무슨 소리죠?

게임을 뛰어넘어서 연계 퀘스트라뇨?

[나 : 헐... 권파야???? 이거 모임? 이번에는 바스코 있어???]

[권성현파이터 : 나는 아모고또 몰라용.]

[나 : ㅂㄷㅂㄷㅂㄷㅂㄷ 치사하게...]

하긴, 말하면 스포니까.

이번에는 저 혼자서 바스코를 찾아야겠습니다.

대신, 바스코를 찾을 때까지 성현이를 질질 끌고요.

아마 엄청 재밌겠죠?

[로살레온 : 반지를 조금 더 맡아주셔야겠네요.]

[나 : 넵! 이번에는 시간 많으니까, 꼭 찾을게요!]

[로살레온 : 다시 만날 때는 넷이겠군요.]

[나 : 꼭이요! 꼭 그렇게 될 거에요!]

이제 요정왕은 우리에게 헤어짐의 인사말을 건네고, 연기가 되어 사라집니다.

잠시 고개를 돌려서 성현이를 봤습니다.

그러자 성현이는 고개를 홱 돌려서 제 눈을 피하네요.

아까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을 때는 모른 척하더니...

성현이는 제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 거네요.

게이머는 자기가 계획을 세운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운영자가 그려놓은 동선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성현이의 레벨 디자인 철학입니다.

저도 당해버렸네요!

그래도... 성현이의 철학이 옳다는 걸 알았으니까 됐어요.

저는 이 순간이 그저 고맙습니다.

다른 엔진으로, 다른 작업자들과 함께.

이 연못을 꾸몄을 성현이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모르긴 몰라도 타이니 원의 기획서를 썼을 때처럼,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성현이는 웃고 있었겠죠.

제가 무서워서 달아나고 있을 때도, 언젠가 제게 이 선물을 전해줄 상상을 하면서.

성현이는 웃었을 겁니다.

저는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나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걸까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이거면 충분합니다.

이제 성현이의 배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다가, 이그드라실 트레일의 정식 오픈 일이 되면 미친 듯이 게임을 해야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아직도 뭐가 남았나요?

허공으로 흩어지던 로살레온이 다시 돌아오더니, 제 손을 붙잡았습니다.

[로살레온 : 아, 분실물이 있습니다.]

[나 : 네?]

[로살레온 : 인간계에서 흘러들어온 물건인데, 바스코를 찾는 김에 이 물건의 주인도 찾아주세요.]

제 손에 아이템 하나를 남겨두고, 그렇게 로살레온은 사라졌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히든 퀘스트의 획득 조건을 모두 달성했습니다!]

[유니크 퀘스트 <끝나지 않는 리뷰>를 획득했습니다.]

유니크... 퀘스트요?

유니크 퀘스트는 서버에서 단 한 명만 깰 수 있는 퀘스트입니다.

성현이와 깼던 <마음의 기한>도 유니크 퀘스트였죠!

우와...

첫날부터 운이 좋네요.

이제 엄청난 모험이 시작될 겁니다.

그러니까 막 신나고, 잠도 못 자고. 얼마 남지 않은 시연 시간이 원망스러워야 하는데.

이 아까운 시간에 저는 그저 서 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을 보고 또 봤습니다.

[아이템 <영혼 결속의 반지>를 습득했습니다.]

<영혼 결속의 반지>

- 두 사람의 영혼을 하나로 묶는 반지.

- 이미 사용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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