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 동거녀와 순애는 어떠신가요-166화 (166/194)

21살의 권성현은 더럽게 재미없는 인간이었다.

뭘 물어봐도 네 아니면 아니요.

내가 말이라도 안 걸면 입 꾹 다물고 밥만 쩝쩝.

결국 그날 알아낸 거라고는 고시원에 산다는 거랑 나이.

그게 전부였다.

“내일 아는 공장 이사하는데, 너도 올래? 빡세지만 일당은 좋아.”

“갈게요. 몇 시까지 어디로 가요?”

“핸드폰 없냐?”

“있는데 안 써요.”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나도 한심한 걸로 치면 대한민국 1%에 들 자신 있는데.

이 자식은 더 했다.

일이 있으면 일주일 내내 일만하고.

일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갔다.

핸드폰도 안 쓰고, 인터넷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은 사람이 어쩜 저렇게 살 수 있나 싶어서 고시원에 찾아가 봤는데.

거기에 있는 거라고는 낡은 PC 하나와 얇은 담요, 반팔 반바지 몇 개가 전부였다.

대신, 쓰레기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빈 도시락통이나 라면 그릇 같은 거.

익숙한 풍경에 숨이 막힌다.

“너...”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앞으로 뭐라도 하려면 일단 방부터 치우고, 저런 거 말고 제대로 된 밥도 챙겨 먹고.

할 일이 없어도 밖에도 좀 나가고.

그래야 취직을 하든 학교를 가든 하지.

이렇게 살면 영원히 이곳에 갇히게 될 텐데.

예전의 내가 떠올라서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형.”

“뭐 임마.”

“제가 죄지은 건 아니죠?”

“뭐?”

“그냥, 원망 듣기 싫어서요. 제가 뭐 잘못한 거 아니면... 그냥 두세요. 내일 봐요.”

성현이의 눈을 보고 하려던 말들을 집어삼켰다.

미래가 없는 인간에게 미래를 닦달하는 건 끔찍한 일이지.

21살의 권성현은 29살의 나보다 더 깊은 웅덩이에 고여있었다.

그날은 집으로 돌아와서 게임을 켜고, 마바지와 던전을 돌았다.

빌리언 사가를 시작한 지 이제 3달째.

어느덧 손놀림이 익숙해져 있었다.

귓속말도 1초내로 보낼 수 있게 됐고.

던전 공략은 상위 10%에 들 정도에.

이제는 친구 창에 접속한 친구가 10명도 넘는다.

내 인생에는 빈 소주병밖에 없었는데, 3달 만에 너무 많이 변했다.

우습지만 게임 덕이다.

게임이 샌드백이던 시절이었다.

게임은 질병이요 만악의 근원이니,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을 게임으로부터 되찾자.

뉴스며, 티비며, 높으신 어르신들은 게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불세출의 용사처럼 정의감을 불태우곤 했다.

진석이가 만든 게임을 비하하는 건 빡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게임을 도피처로 쓰고 있으니까.

내가 정상적인 어른이었다면 게임 말고 다른 걸 하고 있겠지.

하지만... 진짜?

진짜 그럴까?

게임은 마약이고, 질병이니까.

게임 때문에 일하고, 게임 때문에 살아가는 나의 하루도 마귀의 저주이려나.

글쎄, 난 아닌 것 같다.

빌리언 사가를 하고 나서 깨달은 게 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겐 꼰대들이 말하는 이상론보다 게임 쪽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거.

집 밖에 나갈 수 없는 사람에게 모험을 선사하고.

평생 친구 사귀어본 적 없는 사람도 친구가 생기고.

희망이 없는 하루를 살아도 눈감으면 내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꽤나 훌륭한 인생 튜토리얼이 아닐는지.

나는 지금도 미래가 없는 삶을 살지만, 내일도 퇴근하자마자 빌리언 사가에 접속할 거다.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고 솔직히 즐거우니까.

그다음 날도 열심히 일한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게임을 하겠지.

이건 진석이가 내게 만들어 준 희망이었다.

현실에는 없었지만.

가끔씩 생각해보곤 한다.

방에 틀어박혀서 1년 내내 게임을 만들던 그 시절에,

진석이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지.

그냥 내 망상이지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병원비에 치여서 매일 일만 하던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꿈.

게임을 팔아서 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내가 하루종일 일하다 집에 돌아오면 딱 1시간 만이라도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훨훨 날아가는 꿈.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까. 그게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꿈.

빌리언 사가 곳곳에서 그 마음이 느껴진다.

마약이나 질병으로 취급하기엔, 나는 게임에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

그래서 반박해보려고.

진석이가 만든 건 마약이나 질병 같은 게 아니라 희망이라고.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손을 뻗는 상냥한 마음이라고.

꼰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졌다.

이것도 망상이지만...

게임을 만들면서 진석이는 무지하게 행복했을 것 같다.

성현이의 눈을 보고 알았다.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손을 뻗는 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동반하니까.

그 시절의 내가 성현이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면 진석이도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겠지.

이제라도 진석이의 꿈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씨알도 안 먹히지만.

언젠가 그 동태눈깔 자식이 빌리언 사가에 와서

다들 하이ㅋㅋㅋㅋ 라고 말하면 꽤나 통쾌하겠지.

[나 : 마바지야.]

[린넨트라우져 : 뭐요!]

[나 : 조만간 내 동생도 게임 시작할 것 같은디.]

[린넨트라우져 : 혈육 인생까지 조져버리네 ㄷㄷㄷ.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잘해주라고?]

[나 : 길드 만들어야겠다.]

[린넨트라우져 : 올ㅋ 길드명은 당연히 마바지와 핫바지들이겠죠?]

[나 : 올ㅋ 아이디어 좋은디? 참고하겠음.]

앞으로 바빠지겠다.

내 인생의 2페이즈 시작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청소를 했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서 환기도 시키고, 소주병도 다 버리고.

난생처음으로 아침 조깅이 상쾌하다는 걸 알았다.

거의 4년째 유지했던 장발을 자르고 동네 카페에 면접을 봤다.

처음으로 마신 아메리카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술처럼 현실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이 더 또렷해진다는 점에서.

술은 이제 그만 마셔야지.

길드를 만들고 인터넷에 길드원 모집글을 올렸다.

하루하루 등장하는 뉴 캐릭터들과 함께 내 인생도 다채로워진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꽤 노력해봤는데.

다행이다.

한 달 만에 효과가 있었다.

[나 : ㅋㅋㅋ 결국 왔구만. 짐의 왕국에 잘 왔다 소년.]

[권성현파이터 : 길드 이름이 이게 뭐예요... 나중에 친구 올지도 모르는데...]

[나 : 너 친구 없잖아.]

[권성현파이터 : 오면서 생겼어요. 나중에 들어오면 잘해주셈.]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맞는 것 같다.

저 곱창난 인생이 접속하자마자 친구를 사귀다니 말이다.

평일에는 카페에서 일하다가도 주말에는 성현이와 함께 일하는 날이 많았다.

저 자식은 맨날 생기 없는 눈으로 네네. 잡담 한번 없이 시키는 일만 하더니.

언제부턴가 표정이 달라졌다.

“아, 그거 제가 할게요. 저 주시면 돼요.”

이제는 손님 보고 웃을 줄도 알고...

기분 나쁘네.

“왜 그렇게 봐요?”

“실실 쪼개는 거 보니까 기분 나빠서.”

“안 쪼갰거든요. 근데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 맞다.”

저 극적인 변화의 원인은 김폭딸이라는 애였다.

[형, 폭딸이가 말이에요.]

[형, 어제 폭딸이랑 던젼에서.]

하루 종일 폭딸, 폭딸.

아마 쟤는 꿈에도 모를 거다.

지금 니 뒤에서 매니저가 듣고 극혐하는 표정을 지었다는걸.

그리고... 니가 그렇게나 사모하는 폭딸님이 초딩 여자애라는 것도.

알고 나면 또 죽은 눈으로 하루를 살아갈 텐데.

귀여우니까 놔둬야지.

우리 길드는 3달 만에 서버에서 제일 큰 길드가 됐다.

성현이와 폭딸님을 볼 때도 그렇고, 다른 애기들이 즐겁게 노는 걸 봐도 그렇고.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놓였다.

나는 비록 겜알못이지만, 상속자로서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빌리언 사가는 잘나간다.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로 접속자가 더 늘었고, 정산일이 되면 내 통장엔 믿지 못할 숫자들이 적힌다.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플래티넘 게임즈와 설전을 벌였다.

계약서에 적힌 글귀 때문이었다.

모든 업데이트의 결정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나, 판매자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

진석이는 무려 9년 치의 업데이트 플랜을 세워뒀지만 이시우는 그걸 원치 않았다.

[랜덤 박스 상품 판매 기획안]

“이게 뭔가요?”

“원석씨, 그거 아세요? 요즘엔 게이머들도 관대해져서 캐릭터가 강해지는 상품을 유료로 팔아도 별문제가 안 돼요. 그렇다면 우리도 움직여야죠.”

“지금... 스탯을 현금으로 팔겠다는 겁니까?”

“아니죠, 스탯은 기본이고. 제작 재료템이랑, 몬스터 파편에... 아, 그리고 드랍률 제일 낮은 물욕템들은 더 비싸게 받을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걸 랜덤으로 팔면 더 비싸게 받을 수 있다는 거! 어떤가요?”

“좃이나 까잡수세요.”

“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시우는 똑똑한 남자였다.

나만큼 겜알못이라 진석이의 게임을 더 재밌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게임의 수명을 돈으로 바꾸는 걸 기가 막히게 잘했다.

덕분에 진흙탕 회의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언제나 진석이의 업데이트를 밀어붙이고, 이시우는 진석이의 업데이트를 인질 삼아 게임의 수명을 돈으로 바꾸고.

하루하루 게임이 무너지는 걸 내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어깨가 무겁다.

우리 길드 애들이 생각이 없어 보여도, 한명 한명이 고민 많은 청춘들이다.

현실에서는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빌리언 사가는 그들이 지쳤을 때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쉼터였다.

나는 그걸 보는 게 좋다.

내가 만약 시간을 조금만 돌려서 2년 전으로 갈 수 있다면.

나는 진석이가 쫑알대는 게임 얘기를 몇 시간이라도 들어줄 거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없으니까.

이곳에서라도 저 애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싶다.

언제라도 현실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면, “오랜만이네ㅋㅋㅋ.” 하고 인사를 해주고 싶다.

9년은 너무 짧고, 한 30년 쯤.

내가 이시우의 야망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9년은커녕 5년 안에 게임이 망가질 테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