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에 쌓인 돈은 쓸 수 없었다.
그건 진석이의 돈이니까.
빌리언 사가를 만든 건 진석이지만, 유지하는 건 나의 몫이니 돈을 더 벌기로 했다.
꼴에 길드 마스터라 하루종일 밖에 있을 수는 없고, 인터넷으로.
처음에는 빌리언 사가의 아이템을 팔았다.
흔히 말하는 쌀먹이다.
사기도 당해봤고 수익도 별로였지만 자리를 잡아갈수록 수익이 늘어서 언제부턴가는 카페 월급을 넘어섰다.
물론 그런 푼돈으로는 30년이 지나도 게임을 만들 수 없지만.
뭐,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그러다 비트 코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 : 가상화폐? 그럼 아이템도 가상으로 받았다고 치쇼.]
[포페쿠스 : 난 분명히 줬으니까 비번이나 기억해요.]
웬 호랑말코같은 새끼가 템을 먹고 나른 것이다.
개 같은 놈.
그런데 그놈이 남기고 간 비트코인이 한 달 뒤에는 12만원이 되고, 반년 뒤에는 15만원.
실제로 팔아보니 돈이 돼서 매입하기 시작했다.
노다가 행님들이 모른다는 점에서 확신이 들었다.
공짜라면 공구리도 벌컥벌컥 들이키는 양반들이 모른다면, 언젠가 그들이 알게 됐을 때 엄청난 기회가 올 테니까.
내 예상은 적중했고, 2년 만에 대출을 껴서 내 가게를 열 수 있었다.
템을 먹고 나르신 그 지체 높으신 양반의 거취가 궁금해졌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계실는지.
참 좋은 사람.
낮에는 게임 하면서 커피를 팔 수 있도록 카페를.
저녁에는 길드원들이 편하게 놀러올 수 있도록 바를 운영했다.
마케팅도 안 하고 조용히 운영했는데, 낮에는 동네 아줌마들, 저녁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둥지를 틀더니 꽤 많은 돈을 안겨줬다.
직원이 점점 늘어나고, 수입은 덩달아 늘고.
코인은 실체가 없는 게 무서워서 5년 만에 도망쳤지만 그 시점에서 4억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그때부터 개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짜내고 짜내서 공부했지만...
하면 할수록 진석이의 뇌구조가 궁금해질뿐이었다
나는 제일 기초라는 코딩에서 나가떨어졌는데, 그 자식은 어떻게 혼자 다 해치운 거냐고...
이건 뭐, 답이 없다.
이대로는 10년이 지나도 플래쉬 게임 하나 못 만들겠지.
또 다시 남의 손에 진석이의 게임을 맡기긴 싫은데.
돈이 있어도 개발은 무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부를 접었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게임을 못 만들겠지만.
대신 만들어줄 사람이 있으니까.
내겐 진석이가 만들어준 인연이 있다.
어떤 애는 매일 SNS에 짤을 팔아 돈을 벌고.
어떤 아주미는 개발자로 일하다가 결혼해서 커리어가 단절되고.
누구는 모델러에, 누구는 프로그래머.
이상하게도 내 주변엔 늘 능력자들이 넘쳤다.
우연이지만 우연으로 끝내지 않기로 했다.
그들에게 접근해서 조용히 성장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하고.
내 집 주변으로 이사를 권하고.
일거리를 물어다 주고.
여차하는 순간에 함께할 수 있도록, 인연의 다리를 계속 계속 늘려갔다.
그 중, 제일 물건은 단연 그 녀석이었다.
“어휴, 그따위로 패치하면 천옷 아이템 시세가 개박살나고, 덩달아 아슬란 협곡지대 컨텐츠가 전부 삭제되는데. 운영진이 븅신입니까? 그런 패치를 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할 리가 있단다.
이시우 그자식이 패치안을 던지면 나는 늘 성현이에게 찾아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그녀석은 게임 전반에 걸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침 한번 삼키지 않고 줄줄 읊어댔다.
전투, 생산 등, 컨텐츠는 물론이거니와 골드와 현금, 남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 잡템의 가치까지 넘나들면서.
그건 재능도 아니고 노력도 아니었다.
집착이었다.
빌리언 사가에 대한 광적인 애정이 낳은 집착.
상처로 인해 삶이 고꾸라진 인간이 진석이의 꿈을 만나서 탄생한 괴물.
이 자식이 있다면 할 수 있다.
확신이 들었다.
이시우를 닦달해서 게임사에 일자리를 구하고, 성현이를 꼽았다.
그 자식이 개발팀을 걷어차고 인사팀에 지원했을 때는 명치를 줘 패고 싶었지만.
나와 진석이가 만들고 싶었던 건 삶이지, 상품이 아니니까.
언젠가 스스로 개발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며 성현이를 응원했다.
꽤 오랜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찬스가 왔다.
어느 고시원에서.
나는 하루하루 사람을 멀리하고 매말라가던 그 녀석의 눈물을 봤다.
“와씨, 지랄하고 있네. 너 갱년기냐?”
폭딸이를 만난 뒤로 권성현은 변하고 있었다.
가족이라면 질색하는 놈이 여자를 집에 들이질 않나.
평생 자기 앞가림만도 벅차다던 놈이, 남을 동정해서 울다니.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가까워졌다.
당시, 멀리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성현이의 삶은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여있던 삶이 웅덩이를 박차고 순식간에 날아 오른다.
늘 혼자 일하던 놈이 이제는 사람들 틈으로 거침없이 파고 들고.
사람을 집에 초대하고.
여행을 떠나고.
마침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형, 이거 제가 쓴 기획서인데요. 형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이 나이 먹고 게임 만들겠다고 설치는 거 말예요.”
“그게 왜? 그냥 하면 되지.”
“그렇잖아요. 경력도 없이 깝치다 고꾸라지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잖아요. 그리고 다혜는...”
“다혜 핑계대지 마라. 걔 행복은 걔의 몫이야.”
“...”
“그냥 좀 해라. 어차피 너 지금 안 갈아타면 은퇴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다가 뒤질 때 다돼서 후회할 거 아니냐?”
“...신청해볼게요.”
월척이로다.
게임사 내부의 사정은 나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 자식은 개발부서로 옮기자마자 메인 디렉터직을 낚아버리더니, 정말로 인디 게임 페스티벌에서 우승해버렸다.
그 자식이 만든 게임을 처음 해봤을 때는...
그야말로 전율이였다.
게임이 재미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모으고, 함께 뭔가를 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인연을 만들어주는 게임.
타이니 원에는 내가 지난 8년간 빌리언 사가에서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이건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니까.
플레이하는 사람이 세상을 잊고 게임 속에 틀어박히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라,
우리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자고.
매일 매일 함께 미래를 그려가자고 말하는 게임.
이 따위로 게임을 만드는 인간은 이 세상에 권성현이 유일했다.
다른 한 명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곧장 이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계약 연장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좃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내가 모은 돈은 5억.
딱 인디 게임 하나 만들면 적당한 돈이지만, 나는 MMORPG를 만들어야한다.
누군가에게 삶을 주고팠던 진석이의 마음.
그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장르는 MMORPG뿐이니까.
힘든 길이 되겠지.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게임을 만들자고 먼저 연락을 돌리지 않았지만...
전화가 왔다.
[오빠, 오빠 게임사에 인맥좀 있지 않아요?]
[그건 왜?]
[아니... 이대로 빌리언 사가 없어지는 것도 아쉽고... 혹시 누가 만든다고 하면... 지원해 볼까 해서요.]
[이미 만들고 있어. 주소 줄테니까 찾아가 봐라.]
[와우~! 역시 길마밖에 없다잉! 고마워요 오빠!]
처음에는 아카.
마바지.
그리고 패기 좋게 플래티넘 게임즈로 쳐들어간 두 멍청이까지.
결국 모일 사람이 다 모였네.
너무 뻔한 결과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애새끼들이 벌써 이렇게 커서... 든든해도 너무 든든하잖냐.’
나보다 더 빌리언 사가를 사랑하는 멍청이들이었다.
이 바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평생 이곳에 남아줄 테지.
만약 그래준다면 진석이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테니까.
진석이의 돈을 쓰기로 했다.
이들의 월급이라면 진석이도 불만 없겠지.
그 후로 1년이 흘렀다.
**
[잠시 후 9시 정각부터 입장이 시작됩니다.]
이제 곧 부산 게임쇼가 시작된다.
아카에게 무섭다고 유난을 떨긴 했지만... 맞다.
솔직히 존나게 무섭다.
올해 오픈하는 대기업 MMORPG만 3개.
유저들이 그렇게 지랄해도 MMO는 죽어도 안 만들던 양반들이 말야...
왜 우리 게임 내자마자 지랄들이냐고...
MMORPG가 메인스트림이던 시절에도 개발비는 곧 그 게임의 재미를 의미했다.
우리는 대기업에 비하면 1/10도 안 되는 개발비지만.
뭐 어쩌겠어. 결과는 봐야지.
나는 바지지만 우리 애들은 천재니까.
결과가 나빠도 찌푸리는 일 없이 등을 토닥여줘야겠다.
담배를 끄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보니, 부스 앞에서 아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 오빠! 왜 이제와요!”
“왜? 나 필요해?”
“아뇨. 무서우니까 그냥 좀 여기 있어요.”
“여태까지 잘해놓고 겁은.”
“후...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우리가 만든 게 정말 갓겜 맞아요?”
“모르지. 그건 유저가 평가하는 거니까.”
“으... 으...”
“손님들 입장한다, 잘해보자.”
“네... 오빠도 도망가지 말고 시연이라도 하고 있어요.”
“알따잉~. 파이팅!”
담배를 연속으로 빨아서 그런가.
어째 현실감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부스로 밀려오고, 시연하고, 웃고, 핸드폰을 두드리고.
바로 옆에서 무슨 무슨 얘기를 해도 귀가 멍해서 잘 들리지 않는다.
너무 오래 달려와서 지쳤는지도 모르지.
이 게임의 시작은 애들과 바에 모였던 1년 전 그날이 아니라.
12년 전, 내가 사준 컴퓨터를 보고 진석이가 죽을 만큼 좋아했던 그날이다.
진석이는 고생하는 나를 위해 빌리언 사가를 만들고.
그 곳에서 나는 새 삶을 시작하고.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함께 두 번째 에피소드를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
이제 더 이상 남은 힘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돈을 모을 수는 없겠지.
바라건데 부디, 이곳을 스쳐가는 모든 이들이 잠시라도 하늘을 날았으면.
현실의 짐은 살짝 내려놓고,
시연이 끝나면 내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기도록.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아카와, 오랜만에 현금 만져서 신난 마바지.
그리고 은글슬쩍 스태프 대기실로 들어가는 두 바퀴벌레도.
진석이의 게임을 만나서 행복했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 100점일 텐데.
글쎄, 어떻게 되려나.
나는 겜알못이라 사람들의 반응만 봐서는 감이 안 온다.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네.
[부산 게임쇼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1일 차 일정은 이걸로 모두 끝이-]
행사가 끝나고 관람객들이 부스를 빠져나간다.
아카와 마바지, 그리고 직원들이 신나서 하이파이브를 하는 걸 보면 성공인 것 같은데.
과연, 이 세상은 우리의 게임을 어떻게 평가해주려나.
담배나 더 피워볼까.
그 순간이었다.
텅 빈 무대 위로 누군가 뛰어 올라가는 게 보이더니.
“어... 어... 다혜야! 방송 아직 안 꺼졌는데!”
스크린 속으로 익숙한 얼굴이 쑥하고 들어왔다.
진짜 다혜네.
얼굴은 완전히 눈물 범벅이고, 끅끅대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다혜는 동백양님을 붙들고 서럽게 말했다.
“언니... 나 프로포즈 받아떠... 성현이가 나랑 결혼하쟤...”
“꺄아!”
그 말 한마디에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지고 채팅창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쟤네 언젠가 결혼할거라는 거 모두 다 알고있었으면서.
프로포즈가 의미가 있나?
“뭐래? 뭐라고 말하면서 결혼 하쟤?”
“이러케... 이러케 막 무릎 꿇고, 반지 끼워주면서...”
그런데 보다 보니까 더럽게 재밌네.
다혜는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눈썹에 힘을 바짝 주더니, 누군가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서브 퀘스튼데, 나랑 결혼해줄래? 이래떠...”
“꺄아아악!”
아이고, 그러셨어요?
그 칙칙한 인간이 무릎을 꿇고, 서브퀘스트니 뭐니.
그런 달달한 멘트를 쳤단 말이지?
그리고 평생 골드 모으는 것 말고는 관심도 없어보였던 천하의 김폭딸이.
결혼하자는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렇게 좋으셨구나.
그 어리던 애들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
“흐... 성현아... 나랑 살아줘서 고맙고... 내가 앞으로 평생... 흐윽...! 행복하게 해줄게... 사랑해...”
그리고 그때, 무대 위로 갑자기 남주가 튀어올라왔다.
여자들의 비명소리는 이제 고막이 터질 것 같고, 채팅창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성현이는 웹진 인터뷰 때 얼굴을 깠으니까.
그가 이그드라실 트레일의 디렉터라는 걸 모든 시청자가 알고 있었다.
같은 겜창 주제에, 그딴 징그러운 말로 프로포즈를 하다니.
채팅창이 온통 살해 협박 메시지로 채워진다.
세금 더내라는 걸 보니 국세청 직원도 있나보네.
그리고...
세상에.
4만명? 행사 때는 3만 언저리더니... 이것들이 이제와서 뭐하는 거야...
방송은 그걸로 터졌다.
성현이가 방송 부스 안으로 들어가서 다혜를 번쩍 들어안고.
“죄송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유료 컨텐츠에요.”
하며 카메라 밖으로 나갔을 때.
엄청난 비난과 함께 방송이 터져버렸다.
어째... 나도 맛이 갔나. 내 눈에도 멋져 보이네.
저 핏덩이가.
인간 관계는 필요없다며 사람과 만날 때마다 상처 입던 죽은 눈이.
이제는 행복에 겨워서 눈웃음을 실실 흘려댄다.
다혜도 그래.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좋아서, 손에 주사위를 꼭 쥐고 울던 꼬마가.
이제는 비틱질을 하며 좋다고 웃네.
“나 이제 아줌마야!!!”
잘 컷다.
“오빠. 쟤네 진짜 웃기죠. 부럽긴 한데, 내일 어쩌려고 저러지?”
“내일은 나몰라라 게임이나 하겠지. 둘 다 겜창이니까.”
“오빠도 부럽죠? 결혼하고 싶죠?”
“아니?”
“에이~ 뻥.”
“진짜로.”
진짜. 다 걸고.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
오히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아카에게 말한대로 게임의 평가는 유저의 몫이고, 나는 그걸 보는 눈이 없지만.
이걸 보고도 모르면 병신이지.
우리가 만든 게임은 갓겜이 분명하다.
그렇잖아?
세상에 어떤 게임이 사람들에게 미래를 주냐고.
살고 싶지 않아서 고시원에 틀어박힌 둘을 끄집어내고, 같이 모험을 떠나보내고.
이제는 평생 함께하게 만드는 거.
이게 갓겜이 아니면 뭐겠어.
“뭐야? 오빠 왜 실실대요?”
“그냥, 좋잖아. 우리 게임 되게 잘 만든 것 같지 않냐?”
“당연한 소리좀 하지 마세요!”
진짜로.
이 정도면 나도 꽤 하지 않냐고.
너처럼 천재도 아니고, 판타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걸 보고 너도 만족했으면 좋겠다.
이제와서 사과는 안 할게.
그냥...
너는 네가 바라는 미래를 만들었고.
나는 그걸 받아서 최고로 행복한 삶을 살았으니까.
불행한 두 인생이 아니라.
잘못을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는 그냥 열심히 살았다고 너를 칭찬해줄 테니.
너도 그렇게 해주라.
보고싶다 진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