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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 동거녀와 순애는 어떠신가요-179화 (179/194)

네. 아쉬움 같은 건 없습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지금 로그아웃하시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정말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아이, 그렇다니까요.

빛으로 가득했던 눈앞에 어둠이 찾아옵니다.

후회 같은 건 없는데, 살짝 아쉽네요.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떨지 궁금해서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제 마지막 모험에 성현이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어두컴컴한 허공을 혼자서 하염없이 떠돕니다.

이곳은 우주 같기도 하고, 어쩐지 평온한 들판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미로처럼 구불구불, 길이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저 끝없는 미로 말고 아무것도 없다면, 모험은 이걸로 충분하겠죠.

힘드네요.

이제 아무 데나 앉아서 편히 쉬려고 했는데.

미로 속에서 채팅 하나가 떠오릅니다.

[권성현파이터 :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서 모해!]

[권성현파이터 : 에잌ㅋㅋㅋ 기껏 이벤트로 준비했는데, 웃으면 어떡해!]

[나 : 여기서 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떠?]

[권성현파이터 : 당연하지. 내가 어딜 가겠어... 그냥 여기 앉아서 우리 다혜는 언제 오나... 언제 또 나랑 놀아주나. 계속 기다렸지.]

[나 : 굿굿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이제 우리 뭐하는 거야?]

[권성현파이터 : 나도 몰라? 너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했어. 스포하기 싫어서.]

[나 : 올~ 역시 좋은 남편이다아ㅋㅋㅋㅋㅋ 그러면 이번에도 내가 캐리함! 자. 손 줘!]

오랜만에 기운이 펄펄납니다!

어깨가 아픈 것도 잊고 힘껏 손을 뻗었는데 손에 주름살이 하나도 없네요.

대신, 제 소매에는 갈색의 칙칙한 로브 자락이 보이고, 반대 손에는 힐링 스태프가 들려있습니다.

성현이도 예전의 멋진 그 얼굴로, 오랜만에 입은 갑옷이 멋지네요.

물론 게임 캐릭터는 이렇게 멋졌던 적이 없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중요한 건 이제부터죠!

저 미로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합니다!

소울 바인더의 미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클 것 같으니까.

아마 영원히 헤매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죠.

[권성현파이터 : 꼬우꼬우! 이번에도 폭딸님만 믿어용!]

[나 : 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도 욕 안 하고 응원해줄 거지?]

[권성현파이터 : 당연하지! 자랑스러운 내 파티원인데. 이제 가자.]

[나 : 응!]

대신, 두려움은 당연히 없습니다.

영영 미로를 탈출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둘이서 즐거울 테니까요.

**

“다혜야! 제발! 일어나!”

“으겕!”

아우, 아침부터 이게 뭔가요...

배에 폭탄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우리 공주님이네요.

“겨울아~ 엄마 위로 점프하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도 맨날 아빠한테 그러잖아! 나도 할 거야!”

“그건 엄마만 할 수 있는 거라니까 그러네...”

“아니야~ 나도 할 거야! 그리고 빨리 일어나야지! 오늘도 게임 하기로 했잖아!”

“게임?”

“응! 노블록스 오늘도 같이 해준다며!”

“그랬었나...?”

겨울이는 흥에 못 이겨 컴퓨터 방으로 달려가고,

성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제 얼굴을 빤히 바라봅니다.

갑옷도 없고, 머리는 빨간색도 아니고, 눈가에 주름이 조금 있지만...

나의 성현이네요.

“기억력 엄청 좋으면서. 네가 뭐 까먹는 거 처음 보네... 괜찮아?”

“응... 그냥... 엄청 긴 꿈을 꿔서... 한 200년 만에 일어난 것 같아.”

“평소에는 꿈도 안 꾸더니... 그래서 그 200년은 어땠는데? 악몽이었어?”

“아니... 무지무지 즐거웠어. 행복했고, 다시 살라면 몇 번이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어.”

“혹시 다른 남자랑 산 건 아니지?”

“미쳤어! 난 쟈기밖에 없떠!”

“알지 알지. 200년이나 같이 살아줘서 고맙구만.”

하... 다행입니다.

꿈이었군요.

왠지... 겨울이가 공부하는 장면은 엄청난 기세로 스킵하던데.

당연하죠. 저는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후아...

그래도 정말 다행입니다.

성현이는 여전히 제 앞에 있고,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겨울이는 아직 엄마 아빠밖에 모릅니다.

겨울이가 나중에 의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앞으로도 이 두 사람만 제 곁에만 있어 준다면, 힘든 모험 같은 건 없어도 그만입니다!

저는 겨울이의 엄마고, 성현이의 여보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알았거든요.

언젠가 이 삶이 끝나도 저는 또 성현이와 모험을 떠날 거라는 걸요.

그건 당연한 건데.

어제 괜히 이상한 고민에 빠져서 너무 긴 꿈을 꾸고 말았네요.

이제 고민은 모두 잊고 오늘은 두 배로 평온한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다혜야, 근데 오늘 아침에 엄청 재밌는 일 있었다?”

“뭔데?”

“이거 봐봐.”

뭘까요?

성현이가 보여준 건 겨울이의 스케치북이었습니다.

스케치북엔 온갖 네모와 동그라미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건 칼이고, 저건 불덩이고.

겨울이는 그림 그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1분도 못 그리는데.

이건 내용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네요.

“이게 뭐야?”

“아침에 겨울이가 게임 얘기 해줬거든. 검사랑 마법사랑 장애물로 가득한 미로를 지나가는 게임이래. 폭탄 함정도 있고, 표창 함정도 있고, 가끔씩 치즈 케이크도 나오고. 어때? 재밌겠지?”

“...”

겨울이가 컴퓨터 게임을 한 건 어제가 처음인데.

하하...

피는 못 속이네요.

벌써 기획을 시작한 건가요?

“우와... 성현아, 나 기분이 이상해...”

“왜? 나 보는 것 같아서? 나도 엄청 놀랐어. 근데 어쩌겠어 내 딸인데, 그래서 말야... 나 내일 회사 그만두려고.”

“응?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생각해봤는데, 우리 너무 오랫동안 쉰 것 같아. 이젠 다시 움직여야지.”

“움직이다니...?”

“뭐긴 뭐야. 겜창이 하는 일이 두 개밖에 더 있어?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만들거나. 그거지 뭐.”

이젠 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지 모르겠네요.

분명히 현실은 이곳이 맞는데.

오랜만에 반짝이는 성현이의 눈을 보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7년 전에 성현이를 처음보던 날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성현이는 늘 그랬죠.

제가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치면 안 되는데도 제 손을 붙잡고 뛰어주고.

슬퍼하는 저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늘 있던 일입니다.

제 소중한 일상이에요.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겨울이도 어차피 처음부터 배워야 하니까. 나도 이번에 코딩 배울 거야. 겨울이가 게임 얘기를 해주면 내가 코딩하고. 그리고 너가 그림을 그려주는 거지. 어때? 재밌겠지?”

저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말이죠.

진짜 회사 그만둬도 되나?

물론 겨울이 키우는데 쓸 돈은 있겠지만...

성현이가 그렇게 이 악물고 지켜오던 게임인데, 떠나는 게 가능할까?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해도 되는 걸까?

겨우 아이의 이야기만 듣고 게임을 만들어도 되나?

우리는 부모니까 처음부터 하나씩 겨울이를 가르쳐주고, 이끌고.

좋은 길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같이 맨땅에 대가리를 박는 게 아니라.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짱 재밌겠다... 나도 할래! 근데 나만 하던 거 계속하는 건 치사하니까, 내가 코딩할 거야. 그림은 네가 그려.”

“어? 나 그림 못 그리는 거 알잖아?”

“나도 코딩 하나도 모르거든! 그래도 이번에 배울 거야. 겨울이도 할 수 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어.”

“그건... 그렇지만... 에이, 그러면 그림은 내가 그릴 테니까, 꼭 출시할 때까지 하는 거다?”

음...

이제와서 생각하니 조금 창피하네요.

저는 이제 겨우 27살인데.

엔딩을 입에 담기에는 한참 이르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수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어떨 때는 실패가 두렵기도 할 거고, 어떨 때는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모험을 그만두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멈춰서도 성현이가 이렇게 손을 내밀 테니까요.

그러면 저는 또 좋아서 그 손을 냉큼 붙잡고.

또 어디론가 모르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 버리겠죠.

“당연하지! 출시할 때까지 가즈아!!”

“가즈아!!”

**

기다려주셨는데 죄송해서 어쩌죠?

이게 끝이에요.

결말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만...

여러분이 모르는 우리의 미래도 모험으로 가득할 테니 끝이 아닙니다.

그냥 가끔씩 살다가 그리워지는 날이 온다면 저를 떠올려주세요.

예전의 기억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모르는 저희의 미래도요.

액션도 좋고, 드라마도 좋아요.

로맨스는 당연히 깔고 가는 거구요.

원하신다면 19금도 좋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거 전부 다 할 거니까요.

여러분은 아쉬움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언제까지나 ㅋㅋㅋㅋㅋㅋ거리며 웃고 있을 저희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세상에 제 편이 하나도 없을 무렵에 찾아와주셔서.

언제나 말없이 제 얘기를 들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가끔은 저를 사랑해주셔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덕분에 고시원 방을 떠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제 편이 되어주셔서 고마워요.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성현이 만큼 애정이 넘치는 여러분들게 제 얘기를 들려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지금까지 박다혜였습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이구요...

영원히 행복하세요.

바이바이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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